<기자협회보> 칼럼 (2020.12.9)
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html?no=48556
‘내 손톱 밑의 가시가 남의 고뿔보다 더 아프다’는 속담이 있다. 자기중심적 감정은 말이 주는 상처의 크기를 가늠하는데도 영향을 끼친다. 일례로, 다수의 시민들은 ‘흑인을 모방하기 위해 얼굴에 검은 칠을 하는 표현’에는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으면서 ‘아시아인을 모방하기 위해 눈을 찢는 표현’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의정부 고등학교 학생들의 블랙 페이스 졸업사진이 문제가 된 직후 이뤄진 혐오표현 관련 일반시민 인식조사 결과다.
혐오표현의 의미를 알려면, 직관이 아니라 학습과 공감이 필요하다. 블랙페이스가 흑인비하와 인종차별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블랙페이스의 시작과 현대적 의미를 알아야 한다. 19세기 미국의 촌극 ‘민스트럴 쇼’에서 백인 배우가 “멍청하고 열등한” 흑인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기 위해 얼굴에 검은 칠을 하기 시작했다. 민권운동이 활발해진 1950~60년대부터 인종차별 행위로 금기시되어 왔다.
혐오표현의 효과를 알기 위해서는 표현 이면에 존재하는 권력관계를 파악해야 한다. 혐오표현은 ‘내가 듣기에’ 기분 나쁜 표현이 아니다. ‘네가 싫다’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기분이 나쁜 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이 말의 진정한 효과는 누가, 누구에게 하느냐에 달려있다. 사장이 직원에게 ‘네가 싫다’고 하는 것과 직원이 사장에게 ‘네가 싫다’고 말하는 것은 무게와 효과가 다르다.
혐오표현에 문제를 제기하면 ‘웃자고 한 이야기에 너무 예민한 거 아니냐’고 하는 경우가 있다. 토머스 포드 등은 비하성 유머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실험했다. 이슬람교도, 동성애자, 여성을 비하하는 유머를 접했을 때 억눌렸던 편견이 표출되는 효과가 컸다. 당신에게는 재미있는 농담이 사회적 약자를 더 편견에 시달리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는 얘기다. 게다가 유머는 긍정적 감정을 자극해 상황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을 떨어뜨린다. 필자가 최근 실시한 조사에서도 여성을 성적대상화 하는 표현 사례들 중 유머를 사용한 경우에는 그 심각성에 대한 평가가 낮게 나타났다.
혐오표현을 제재하는 게 필요하다고 하면 ‘표현의 자유의 신성함’을 역설하기도 한다. 표현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미국은 혐오표현을 규제하지 않는다는 오해도 널리 퍼져있다. 미국 기업인 페이스북, 구글, 트위터 등은 자사 정책에 따라 혐오표현을 규제한다. 10년 전만 해도 표현의 자유를 앞세우며 규제에 소극적이던 트위터는 혐오표현으로 점철된 트위터를 떠나는 이용자가 급격히 늘어나자 2015년쯤 방침을 바꿨다. 며칠 전에는 혐오표현 규제를 ‘더’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최근 페이스북은 혐오표현 규제를 ‘다르게’ 하기로 방침을 바꿨다. 페이스북 내부문건을 입수해 보도한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페이스북은 더 이상 모든 욕을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흑인, 이슬람교도, 유대인, 성 소수자를 향한 욕설은 “최악 중의 최악(the worst of the worst)”으로 규정하고 알고리즘을 통해 적극적으로 걸러내기로 했다. 반면, 백인, 남성, 미국인에 대한 경멸적 표현을 단속하는 일은 후순위에 놓기로 했다. 역사적으로 차별을 경험했고 사회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소수자 집단을 향한 공격의 발언(혐오표현)과 그러한 경험을 지니지 않은 집단을 향한 공격의 발언(가령, “백인은 멍청하다”와 같은 집단모욕)을 구별하고 규제 정도를 달리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 모든 욕은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