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공유저작물 창작 공모전 2차 - 글 부문
사각사각 펜이 종이를 닿는 소리가 방 안 가득 메웠다. 정오가 지나고 서재 가득 햇살이 들어오는 시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불과 두 달 전에 바다에서 살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마야.
"네 이름이 마야였구나?"
내가 쓴 종이를 매튜 왕자는 유심히 보았다. 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생겼다.
목소리로 말할 수 없지만 이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마녀에게 목소리를 뺏기고 육지에 올라왔을 때 막막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나도 소통 창구가 생긴 것이다.
한 달 전부터 나에게 글을 가르쳐주기 시작한 것이 매튜 왕자였다.
"어디서 왔어?"
바다.
나는 또박또박 글씨를 썼다.
"바다? 섬에서 왔나? 아이슬란드?"
매튜 왕자는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아직 아니다. 내가 인어였다는 걸 말하더라도 믿지 않을 것이다.
빨리 앤드루 왕자에게 알려주고 싶다. 나의 이름을. 그를 보기 위해 꼬리와 목소리를 버리고 육지로 나왔으니까.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니 내가 동경하던 세상에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앤드루 왕자와도 가까워진 것 같았다.
"꼬마 마야, 승마 타러 가자."
앤드루 왕자는 나를 친여동생처럼 아꼈다. 두 달 전 나를 해변가에서 발견한 것이 앤드루 왕자였다.
"눈떠 봐! 정신 차려!"
나를 바라보는 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꿈에서도 그리워하던 앤드루 왕자. 나를 사랑하고 나와 결혼해야 비로소 나에게 영혼이 생긴다. 인간에게만 있고 인어에게 없는 영혼. 영혼을 얻지 못하면 나는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만다.
"어디서 왔을까?"
앤드루 왕자 옆에 두 살 어린 매튜 왕자가 물었다.
금발에 갈색 눈인 앤드루 왕자와 달리 매튜 왕자는 흑발에 푸른 눈이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매튜 왕자는 나를 바라봤다.
"네 이름이 뭐니?"
나는 입을 벌려 말을 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눈만 끔뻑끔뻑했다.
"말 못 하나 봐."
안쓰러운 표정으로 매튜 왕자가 말했다.
"일단 성으로 데려가서 의사를 부르자."
앤드루 왕자는 나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고 나서 천천히 궁전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날부터 나는 궁전에서 살게 되었다. 오히려 말을 못 하는 나를 답답하게 여긴 매튜 왕자가 먼저 글 쓰는 것을 가르쳐주기로 제안했다.
"내일부터 서재로 와. 글공부를 빼먹으면 앤드루 형한테 이른다."
내가 앤드루 왕자를 따르는 것을 안 매튜 왕자는 놀리듯 나에게 말했다.
수업을 빼먹는 일은 없었다. 나는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자 빨리 책이 읽어보고 싶어 졌다.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책을 읽다가 서재에서 잠이 들기도 했다. 앤드루 왕자와 사냥을 나가거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때가 아니면 서재는 나의 방이 되었다. 궁 안에서 앤드루 왕자 다음으로 가장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나였다.
물이 없는 땅이 있다는 데 가봤어요?
나의 질문을 보고 앤드루 왕자는 생각에 잠겼다.
"아프리카 대륙에 사헬 사막이라는 곳이 있다고 들었어. 모래와 바위로 덮여 있고 낮에는 너무 더워 위험하기도 하지. 사헬이 아라비아어로 무슨 뜻인지 알아? 바로 바닷가라는 뜻 이래. 재밌지?"
물이 없는 곳인데 이름이 바닷가라니. 바닷속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사막이라는 곳에 꼭 가보고 싶었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바닷속에서 보는 별과 사막에서 보는 별의 차이가 궁금했다.
왕자가 이웃 왕의 아름다운 공주와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근사한 배가 항해에 나설 준비를 했다.
“내일 떠나야 해. 공주를 보러 가야 하거든. 부모님의 바람이야.”
앤드루 왕자는 썩 내키지 않아 했지만, 이웃 나라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공주를 만나러 가야 했다.
“매튜도 이번 여행에 같이 갈 거야. 마야도 다른 나라 구경을 해볼 생각이 없니?”
이웃 나라는 빙하로 만들어진 좁고 깊은 만과 신화에 나오는 트롤들이 사는 나라로 유명하다. 그런 곳을 갈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리가 없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마야는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을 줄 알았어.”
앤드루 왕자는 활짝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바다 위를 항해하는 느낌은 편안했다. 처음 배를 타면 뱃멀미로 고생을 하기 마련인데 나는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첫 항해를 나선 매튜 왕자가 뱃멀미로 굉장히 괴로워했다. 사흘이 지난 후에야 매튜 왕자는 객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살짝 지친 기색이었지만 매튜 왕자는 갑판 위 난관에 기대고 있었다.
나는 매튜 왕자 곁으로 다가가 손에 든 물통을 내밀었다.
“아냐. 물 마시면 더 울렁거려.”
매튜 왕자는 내가 내민 물을 마다했다.
“넌 어쩜 그렇게 멀쩡하니? 정말 바다가 고향 아냐?”
난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쓰러운 눈으로 매튜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배가 큰 파도와 부딪혔는지 높이 튀어 올랐다. 중심을 잡지 못한 매튜 왕자는 순식간에 바다로 떨어졌다.
“악!”
매튜 왕자의 외마디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난 생각할 틈도 없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매튜 왕자가 보였지만, 인간의 몸으로 더 깊이 내려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 순간 익숙한 꼬리가 눈앞을 지나갔다. 인어 한 마리가 매튜 왕자를 낚아채더니 바다 수면 위로 끌고 올라갔다.
나도 인어를 따라 물 밖으로 나왔다.
“막내야, 괜찮냐?”
매튜 왕자를 꼭 안고 가라앉지 않게 붙들고 있는 인어가 할머니였다. 늘 기품 있고 빛이 나던 할머니였는데, 수심이 가득한 얼굴 때문인지 몇 년은 더 늙어 보였다.
“네가 걱정돼서 배를 따라왔단다. 어디 다친 데는 없지?”
나는 머리를 저었다.
배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저기 있다!”
선상에서 우리를 향해 팔을 흔들고 있는 선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가야. 난 피해야겠다.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이 할미를 찾거라.”
할머니는 매튜 왕자를 나에게 넘기고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저 멀리서 작은 배를 탄 앤드루 왕자와 노를 젓는 선원이 다가오는 것을 봤다.
나는 배가 다가오자 매튜 왕자가 먼저 배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왔다.
“그렇게 뛰어들다면 어떡하니? 너까지 죽을 뻔했잖아.”
앤드루 왕자는 나를 꼭 안으며 말했다. 빠르게 고동치는 앤드루 왕자의 심박 소리가 느껴졌다.
배에 다시 올라오고 잠깐 쉬다가 나는 복잡한 심경을 안고 갑판 위로 올라왔다. 어두운 하늘을 밝게 수놓는 별들을 눈 안에 담았다.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았다.
“고마워. 나 때문에 배에 뛰어 내렸다며?”
매튜 왕자는 익사할 뻔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이 초췌해 보였다.
어두운 바다를 말없이 보던 매튜 왕자가 어렵게 입을 뗐다.
“있잖아. 안 믿겠지만, 바다에 빠졌을 때 나를 구한 게 인어였어. 의식을 잃기 전에 분명히 봤어. 머리가 은발인 인어할머니가 나를 잡았거든.”
나는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인어가 너를 막내라고 부른 것 같단 말이지.”
매튜 왕자는 나를 살피며 말을 이어나갔다.
“솔직히 널 처음 봤을 때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 혼자 해변에 나타나고, 가족 얘기도 안 하고, 바다 생물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인간에 대해서 궁금한 것도 많고....”
내가 가만히 있자 매튜 왕자는 결심한 듯 말했다.
“상관없어. 네가 인간이든 아니든. 나한테 넌 마야니까.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사람.”
나는 매튜를 돌아보며 사실을 다 고백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나는 매튜 왕자에게 두 손을 들고 가만히 있으라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 내가 머무는 객실로 달려가 일기장을 찾았다. 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쓰기 시작한 나의 이야기. 내가 누구인지, 왜 말을 못 하는지, 일기장에 매일 적어 내려갔다. 그 일기장을 가슴에 안고 갑판 위로 뛰어갔다.
나는 일기장을 매튜 왕자에게 내밀었다. 매튜 왕자라면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 줄 것 같았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이웃 나라에 도착했다. 공주를 만난 앤드루 왕자는 깜짝 놀랐다. 작년에 죽은 듯 바닷가에 누워있을 때 자신을 구해준 것이 공주라고 했다. 앤드루 왕자와 공주의 결혼식 준비는 속전속결 치러졌다. 앤드루 왕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슬플 줄 알았지만 의외로 나는 덤덤했다. 오히려 나의 일기장을 읽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매튜 왕자가 신경 쓰였다.
앤드루 왕자와 공주의 약혼을 축하해주는 저녁 만찬이 끝나고, 매튜 왕자가 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내 일기장을 나에게 돌려주었다.
“마야, 일기장 다 읽었어. 사실 세 번은 읽었을 거야.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지. 마녀에게 다리를 얻는 대가로 목소리를 잃은 거였다니...”
나는 매튜 왕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거 하나만 알려줘. 여전히 앤드루 형을 좋아해? 만약 그렇다면 지금 내가 당장 결혼식을 못하게 막아줄게. 네가 물거품이 되는 걸 견딜 수가 없어.”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앤드루 왕자를 사랑하고 있었나? 나는 들고 있던 일기장에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니 앤드루 왕자는 친오빠 같은 사람이야.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나는 떨리는 맘으로 나도 몰랐던 진실을 고백했다.
매튜 왕자는 활짝 웃으며 나를 꽉 안았다.
“다행이다. 네가 진짜 앤드루 형을 아직도 좋아한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었거든.”
나는 미소 지으며 매튜 왕자의 손을 꼭 잡았다.
앤드루 왕자와 공주의 결혼식이 끝나고 나와 매튜 왕자는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이웃 나라에 남아 피오르드도 탐험하고 오로라도 봤다. 궁금했던 사헬 사막도 보러 갈 계획이다. 매튜 왕자를 할머니와 다섯 언니들, 그리고 바다의 왕에게도 소개해줬다. 인생은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진 않은 것 같다. 내가 꿈꾸던 사람과 맺어지진 않았지만 나를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과 멋진 모험을 함께 하게 되었다. 인생은 계획보다 더 멋지다.
만화영화가 아닌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원작을 읽었을 때 허무하게 죽는 인어공주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목소리를 잃었다고 소통을 할 수 없다는 게 현실적이지 않아 보였다. 인어공주를 단지 수동적인 여성이 아닌 호기심이 많고 모험심이 강한 여성으로 그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