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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cht Apr 23. 2023

프리드리히 니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 【작품 해설, 줄거리】

니체의 사진.



* 아래 링크에서 더 편하게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https://m.blog.naver.com/licht_98/222279579369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하여

'참으로, 차라투스트라여, 그대는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책의 화자에 불과하나 그대의 말들을 내가 얼마나 이해하려고 했는지에 대한 어떤 곤경과 고난 그리고 어려움이 있었는지 알게 된다면, 그대는 내가 쏟았던 노력을 어느정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며, 왜 많은 사람들이 그대의 이야기를 읽다가 떠나버렸는지를 위의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 알 수 있으리라.'


 짧은 패러디를 해보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술 구조를 본떠 만든 것인데 위와 같이 눈으로 보고 바로 이해되는 문장 구성이 아니기에 술술 읽히진 않는다. 그래서 그런 걸까?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이해가 안 되고 어려운 책이었다. 각종 전문 도서들을 읽어본 경험은 있었지만 이 책 보다 난해했던 책은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전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고 "까만 것은 글씨요, 하얀 것은 종이다."라는 말만 떠오를 뿐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정리가 안돼서 다시 책에 쓰인 한 문장, 한 문장을 계속 곱씹어 보았다. 그러나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이와 같은 모호함과 난해함은 나에게서만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이 책을 접한 다른 수많은 사람들도 나와 같은 문제를 겪었다.

 

 이 문제의 원인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난해한 서술 방식과 배경지식의 부재였다. 특히 운문적인 비유와 함축 및 당대의 학문적 기류와 유행했던 것에 대한 패러디를 섞어놓은 뒤, 어려운 철학적 용어를 산문이라는 형식 속에 혼합한 니체의 글쓰기 방식이 이해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각 챕터마다 마법사, 예언가, 왕, 교황, 독수리, 뱀 등의 갖가지 인물과 동물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들은 다 의미하는 바가 있는데, 문맥을 통해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버리면 작가가 의도한 내용을 전혀 알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읽으면 읽을수록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쌓이면서 남는 게 없어진다.


 또한 우리에게 익숙한 연역적 사유가 아닌 개념적 사유가 주로 이루어져 있어서 굉장히 추상적이라는 것도 난해함의 큰 이유다. 특히 니체는 성서를 많이 패러디하였는데, 종교적 지식이 갖추어있지 않다면 난해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러한 책의 서술 방식은 결정적으로 책의 가독성을 떨어뜨리고 난이도를 엄청나게 올려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니체 본인이 직접 와서 우리들에게 일일이 설명해주지 않는 이상 이 책의 내용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니체의 철학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니체의 철학을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책을 읽었다. 니체가 한 말이라고는 "신은 죽었다." 밖에 몰랐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대학교 철학 전공 수업에서 집중적으로 다룰 정도로 어려운 책이었고, 심지어는 전문 교수들조차도 쉽사리 다가가기 힘들다고 하는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아무런 지식도 없이 맨 땅에 박치기를 한 셈이니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던 것이었다.

 

 보통 문학을 읽을 때는 작가의 사상이나 철학에 대해서 아는 것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표현론적 관점을 취하기보다는 작품에 집중하여 분석하는 절대적인 관점을 취하는 것이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은 문학의 탈을 쓴 철학서였기에 이러한 접근이 옳지 않았다. 아무리 산문과 이야기 형식을 따라서 서술했다고 해도 궁극적으로 기저에 깔려있는 니체 철학사상의 난해함은 백지상태의 사람들에게는 버겁다. 그래서 많은 것을 참고하기로 했다. 니체 철학 해설서와 네이버 캐스트 니체의 철학 해설 영상을 통해서 말이다. 다만,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은 여전히 남았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적어도 내가 알게 된 점만큼은 포스팅에 적어두어, 조금이나마 이 책을 읽는데 참고할만하고 도움이 될만한 글을 남기고자 한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니체의 사상과 철학을 이해하길 원하지 않는다. 단지,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니체와 이 책에 관심이 생겨 스스로 읽어보고, 자료를 찾아보게끔 하는 그 동기만 만들 수 있다면, 이 글의 의미는 충분하다. 



 

 상술했듯, 우리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잘 이해가 안 된다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차라투스트라를 이해했다는 것. 즉, 이 책을 진정으로 체험했다는 것은 니체 철학을 일반인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까지 올라간 것을 의미한다고 하니까 말이다.


 사실 책의 저자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책을 통해서만 사상을 더듬는 자'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는 위대한 사상가들의 책을 정리하고 주석이나 다는 철학자를 경멸했다. 자신을 이해하려면 우선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철학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의 생각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만드는 것이며, 누구의 삶에 대해 서술하는 것이 아닌 자기 삶을 아름답게 창조하고 서술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누구든 자기 삶을 아름답게 창조하는 자는 니체를 읽지 않은 채 니체의 독자가 될 수 있으며, 니체를 지지하지 않은 채로 니체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니체는 자기의 삶을 아름답게 창조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고자 했다. 휘둘리지 않는 자, 자신의 뜻과 의지로 행동하는 자를 만들고 싶었다. 이것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술 동기의 가장 중요한 맥락이다.


 그렇다면 니체는 왜 제목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 정했을까?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자기 책의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정말 의아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고대 페르시아의 예언자 차라투스트라는 아주 상반된 가르침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로아스터교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으로 유명한 종교다. 유대-기독교를 비롯해 몇몇 종교에 나타나고 있는 선과 악, 신과 악마의 강력한 대립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으로 간주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선과 악이라는 이원론적 도덕적 세계관을 극복할 것을 설파하고 있다. 그렇다면 니체는 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의 의견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고대 페르시아의 예언가를 끌어들인 것일까.


 예언자 차라투스트라는 선과 악의 투쟁을 사물들의 운행에 있어 본래의 톱니바퀴로 본 최초의 사람이었다. 도덕을 힘이나 원인, 목적 그 자체와 같은 형이상학적 영역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그의 과제였고, 죽기 전까지 행했던 일이었다. 즉, 차라투스트라는 도덕을 창조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이러한 도덕적 세계의 붕괴를 원했다. 지금까지 쌓여 왔던 도덕이라는 철학적인 근본을 완전히 부수고,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했다. 이것은 도덕의 몰락이자 극복이었으며 이를 극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도덕을 창조했던 차라투스트라를 차용하여 주인공으로 삼았던 것이다. 즉, 페르시아의 예언자 차라투스트라가 도덕적 세계의 탄생을 의미한다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도덕적 세계의 몰락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의미한다. 따라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페르시아의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이자 자기극복이며, 새로운 변신이다.


 다음으로, 본 책의 구성은 머리말부터 1부, 2부, 3부, 4부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각 부당 20여 개의 독립된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다. 쉽게 말하면 <명탐정 코난>, <짱구는 못 말려>, <도라에몽> 등과 같은 옴니버스의 형식으로 한 가지 큰 주제 밑에 각각의 이야기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구성방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무조건 순서대로 읽어나가야 할 필요는 없다. 자신이 읽고 싶은 곳부터 읽어도 된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이해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하고 싶다면 머리말부터 자세히 읽은 후 1, 2, 3부를 읽고, 그 후에 4부를 보는 것이 좋다는 게 통설이다. 왜냐하면 <머리말>에는 앞으로 할 전할 말의 핵심 요약이고, 마지막 4부는 전의 내용을 다시 한번 서술하는 것이기에, 4부는 이전의 내용들을 제대로 숙지하고 있지 않으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머리말>의 내용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각성한 자, 차라투스트라는 인간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홀로 산에서 내려왔다. 그가 숲 속에 다다랐을 때 한 노인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 노인은 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차라투스트라가 노인에게 숲 속에서 무슨 할 일이 있는지 물어봤는데 짐승들과 어울리며 불완전한 인간을 멀리하고 오직 신을 찬양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노인은 차라투스트라에게 어떤 선물을 가져왔는지 물었다. 이 말을 듣고 차라투스트라는 성자에게 작별 인사를 하며 말했다. "드릴 것이 뭐 있겠소! 당신에게서 그 무엇을 빼앗는 일이나 없었으면 하오. 그러니 나를 빨리 보내주기나 하시오!" 이렇게 그 두 사람은 헤어졌다. 그러나 혼자 있게 되자 차라투스트라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저 늙은 성자는 숲 속에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조차 듣지 못했구나!" (13-15p 요약)]


 여기서 그 유명한 니체의 '신이 죽었다'는 격언이 등장하였다. 과연 신의 죽음이란 어떤 의미일까. 니체는 왜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니체는 당대 기독교의 유일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게 하고자 했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신의 죽음은 만물을 존재하게 해주는 어떤 초월적 실체의 사라짐이자, 선악이나 미추를 판단케 해주는 절대적 가치 기준의 붕괴를 의미했다.


 형이상학에서의 신의 죽음을 알기 위해선 형이상학을 먼저 알고 갈 필요가 있다. 형이상학이란 가변적이고 유한한 우리의 경험세계(이 세계, 현상계)와는 달리 영원불변하고 순수한 초경험적 세계(저 세계, 실재계)가 있다고 믿으며 참된 진리나 아름다움이 바로 그 세계에 속해 있다고 생각한다. 형이상학 세계에 대한 이러한 이분법적 접근의 예시로는 대표적으로 플라톤의 이데아(초월세계), 칸트의 물자체(物自體)가 있다. 우리가 경험할 수도 없는 그런 세계가 있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초경험적 세계는 항상 경험세계에 대한 어떤 의지나 명령을 담고 있기 때문에 초경험적 세계의 문제도 이 경험세계의 문제인 것이다. 플라톤이 이데아의 세계에 대해서 말할 때, 그는 자신의 여행기를 들려주고 있는 게 아니다. 기독교도가 저 세계에 있는 천국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우리가 죽고 나서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귀띔해 주는 게 아니다. 플라톤은 지금 이 세계가 참된 세계가 아님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며, 기독교는 이 세계가 죄로 타락한 세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초경험적 세계는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없을 때조차 우리에게 하나의 의무를 부여하고 명령을 내린다. 거기에는 항상 무엇이 선하고 옳은지, 어떻게 살아야 바르게 사는 것인지에 대한 명령이 담겨 있다.


 니체는 이러한 부분에 주목하여 형이상학자들이 참된 세계라고 이름 붙인 보이지 않는 저 세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굉장히 평가절하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니체는 신의 죽음을 통해 평가절하의 기준을 없애버리고, 그 영원한 진리나 초월적인 선 따위는 없으며, 참된 세계 자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고를 내린 것이다. 즉, 지금까지 선한 것, 아름다운 것, 정의로운 것이라 사유하고 믿어왔던 모든 것들이 틀렸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아무런 가치도 지니고 있지 않고 단지 무의미한 것이었다. 이렇듯 니체의 일원론적 철학은 기존의 형이상학적 철학을 부수고 새로운 지평으로의 인식의 전환을 이끈 사상사적 대전환, 대전복의 철학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설파했다고 해서 당대 사람들이 니체의 철학에 수긍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종교에 대한 믿음은 강했고, 그들의 신념과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제4부 [나귀축제]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여기서는 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 보다 높은 인간들이(왕, 교황, 마술사, 그림자, 예언자, 지식인, 추악한자) 나귀에 대한 숭배 의식을 진행함으로써 그들의 믿음과 의지가 강하지 않아 전통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그려내 여전히 혼란스럽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결국, 니체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대리인은 차라투스트라였으며, 생전처럼 예언과 설파를 통해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존재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터득시키고자 한다. 그것은 위버멘쉬요, 사람이라는 먹구름을 뚫고 내리치는 번갯불이다.” - <머리말>
“나 너희들에게 위버멘시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는 이 거대한 밀물을 맞이하여 썰물이 되기를 원하며, 사람을 극복하기보다는 오히려 되돌아가려 하는가?”


 니체의 철학은 초인(위버멘쉬)을 가르치는(만드는) 것이었다. "너희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려 하노라"라는 대사에서 초인은 영원회귀의 진리를 체득하고 힘에의 의지를 실현시킬 미래의 인간이라는 뜻으로 표현된다. 또한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과 같은 존재기에 인간은 이렇듯 건너가는 존재이며 동시에 몰락하는 존재임을 의미했다. 니체 철학의 근본을 이루는 '영원회귀, 초인(위버멘쉬), 힘에의 의지' 개념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초인(위버멘쉬)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재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인간존재의 의미)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현실에서 자기 삶의 주인이자 자기극복적 삶을 위해 창조하는 삶, 그 창조가 바로 건강한 인간으로서의 삶이라는 의미다.


 니체는 이처럼 추상적으로 정립된 세계에 골몰하기보다는 현실적인 삶을 돌봐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칸트가 말한 물자체의 개념이나, 플라톤 이래로 정립되어 온 이데아의 세계는 모두 '현실(현상) 세계'가 '저 세계'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그런데 니체는 이것이 날조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오히려 물자체와 천국이 실재이고 현실 세계가 허구라는 그들의 주장이 '가치의 전도'라며 극구 거부한다. 니체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 세계를 그 자체로 긍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니체가 강조했던 초인은 바로 이러한 현상세계를 긍정하는 인격이라 볼 수 있다. 니체는 이러한 서양철학의 '사기'에서 벗어나고자 특정한 사람들만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위버멘쉬가 되도록 해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일종의 교육철학으로서 '저 세계'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을 계몽하고자 한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 세계는 힘에의 의지다. 그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너희 역시 힘에의 의지다. 그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적을 갖되, 증오할 가치가 있는 적만을 가져야 한다. 경멸스러운 적은 갖지 말도록 하라. 너희들은 적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적의 성공이 곧 너의 성공이 될 것이다.
 - <전쟁과 전사들에 대하여>


 다음으로 살펴볼 개념은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다. 힘에의 의지는  상승적 삶의 의지로써, 항상 상승과 강화의 자기 극복을 하려는 의지작용이라 볼 수 있다. 즉, 아주 쉽게 비유하면 경쟁심이라고도 볼 수 있다. 힘에의 의지는 하나의 중심이 없고 어디에나 있으며, 모든 의지들이 이 관계를 맺는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의지가 세계를 형성하는데, 지배를 추구하는 성격이기에 서로를 지배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개념과 차이가 발생한다. 니체는 스피노자의 계승자로 볼 수 있는데,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개념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지속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코나투스의 증가는 자신의 삶의 기쁨과 유쾌함을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것이므로 삶의 주체들은 이러한 코나투스를 감소시키는 타자와의 연대를 중지하고, 새로운 타자와의 연대를 통해 이를 증진하는 것이 자기 존재 지속의 당면한 과제였다. 그러나 스피노자와 달리 니체는 인간을 언제나 자신의 힘을 강화시키거나 증가시키는 것만을 지향하는 존재로 보았다. 즉, 자기 보존만을 위해 코나투스를 증진하려는 스피노자의 태도는 니체에게 미흡한 개념이었다. 예컨대 살아있는 생명체는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이상이 되기 위해서 행동하고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보존하는데 급급하다면, 독수리 새끼는 창공을 누비는 독수리가 될 수 없고, 갓난아이는 들판을 뛰어다니는 성인이 될 수 없듯, 니체는 인간이 힘에의 의지를 통해 초인으로 거듭나기를 원했다.


 한편, 니체는 만약 상대방이 나보다 더 큰 힘에의 의지를 가진 자라면, 내가 상대방보다 더 큰 힘에의 의지를 가지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즉, 서로가 자극이 되어 더욱 상승하고 발전한다는 것이고 서로를 파괴시키고 굴복시키는 적대적인 관계로서 설정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지배하려 하지만 멸절을 의도하지 않으며 서라고 서로를 계속 긴장하게 만들어 창조를 만들어내는 긍정적인 관계로 보았다. 하나의 win-win관계로서 설명할 수 있다. 진정한 적은 진정한 벗이라는 의미가 여기서 이해된다. 니체의 이런 철학적인 사유를 보아 니체의 철학은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이라 본다. 부정으로 보이는 것이 궁극적으로 긍정의 결과값을 도출해 내기 때문이다.


"나, 저들에게 더없이 경멸스러운 것에 대해 말하련다. 인간 말종이 바로 그것이다. 슬픈 일이다. 사람이 더 이상 그 자신 위로 동경의 화살을 쏘지 못하고, 자신의 활시위를 울릴 줄도 모르는 그런 때가 오고 말 것이니! 사람이 더 이상 별을 분만할 수 없게 될 때가 올 것이다. 자기 자신을 경멸할 줄 모르는, 그리하여 경멸스럽기 짝이 없는 사람의 시대가 올 것이니."
“짐깨나 지는 정신은 이처럼 더없이 무거운 짐 모두를 마다하지 않고 짊어진다. 그러고는 마치 짐을 가득 지고 사막을 향해 서둘러 달리는 낙타처럼 그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그러나 외롭기 짝이 없는 저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낙타는 사자로 변하는 것이다. 사자가 된 낙타는 이제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이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 새로운 가치의 창조. 그러나 사자라도 아직은 그것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말해보라, 형제들이여. 사자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어린아이가 해낼 수 있는가?” 왜 강탈을 일삼는 사자는 이제 어린아이가 되어야만 하는가?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긍정이다. 그렇다,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원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하게 된다.
- <세 변화에 대하여.>


 니체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힘에의 의지는 초인의 충분조건이 아니었다. 니체는 초인이 되기 위해서는 힘에의 의지뿐만 아니라 짐승과 초인 사이의 밧줄을 건너가면서 몰락하는 존재인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한 경멸과 몰락을 경험한 뒤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극복을 해야 하는 것이며, 어떻게 해야 극복을 이룰 수 있는 것인지 의문점이 생긴다.


 니체는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억의 지배를 받는 노예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진단했다. 니체는 낙타를 통해 과거 기억을 자신의 숙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짊어지고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상징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태어나자마자 가족제도나 국가제도에 의해 훈육되고 길들여진다. 물론 훈육은 체제가 개체의 정신과 육체에 기존 질서를 각인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 개체들에게 가장 중시되는 덕목은 '기억'의 능력일 수밖에 없다. 어른을 보면 인사해야 한다는 기억, 선생님께 복종해야 한다는 기억, 국가에 충성해야 한다는 기억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억에 기반을 둔 각종 훈육 과정은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 삶의 규칙을 새로운 개체들의 실존에 낙인찍으려는 과정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음 단계로 니체는 사자를 제시했다. 낙타에게는 짐을 부과할 수 있지만, 사자에게는 짐을 둘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사자에 짐을 두고 싶다면 사자를 먼저 죽여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니체에게 사자란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그리고 일체의 외부적 압력을 거부하는 자유정신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성숙한 인간은 자신들에게 가해진 짐들 혹은 자신의 신체나 정신에 각인된 기억의 상처들을 조금씩 의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짐들이 자신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을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이때 인간은 비로소 낙타에서 사자로 변신하게 된다. 모든 짐들을 몸에서 떼어내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체는 사자의 단계에 머물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자기 변형의 최종 단계로 '어린아이'를 설정하고 있다. 니체에게 망각이란 새로운 창조를 위한 관문이다.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는 자유의 쟁취가 반드시 필요했으며 자유를 얻은 존재들은 이제 새로운 창조를 이끌어 내야만 했다. 그런데 새로운 것이란 기존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는 '기억'이 없는 어린아이의 순수함과 순진무구함을 통해 원초적 상황에 진입하여 새로운 출발과 스스로의 최초의 움직임을 아이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떠한 남에게서부터 억압받지 않고 하는 자율적인 행위, 자신에 대한 거룩한 긍정이자 이러한 행동 자체가 자신의 삶에 대한 극복이 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망각을 통해 어린아이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에만 인간이 자신의 세계를 획득하게 된다고 니체가 역설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한다.


 그러나『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자기 자신을 경멸할 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을 지적한다. 자기 자신을 경멸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인간 말종이라고 여겼는데, 스스로 경멸할 줄 모른다는 것은 자기비판이 안된다는 것이며,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으므로 자기 극복이 안 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곧 초인(위버멘쉬)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함축하는 이야기였다.


 여기까지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주요 내용이라 볼 수 있다. 분명, 모든 것을 다룬 것은 아니고 공부하면서 알게 된 점을 몇 가지 소개한 것뿐이다. 기존 포스팅처럼 문학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철학적으로 내용을 소개하는 데에 더 초점을 맞췄으며, 최대한 쉽게 설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나의 이해도 그렇게 깊은 것은 아니기에, 몇 가지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게다가 조금 아쉬운 점은 이번 포스팅에서 소개하지 못한 내용도 많았는데, 책의 내용도 방대하여 모두 일일이 설명하려면 너무 길어질 듯하였다. 그리하여 핵심적인 내용을 골라 개괄적인 설명을 드렸다. 이 글을 통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니체의 철학을 조금이라도 쉽게 이해했길 바라며, 혹시라도 잘못된 설명이 있다면 언제든지 댓글로 바로 잡아주시길 바란다.




참고문헌

- 고병권,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그린비, 2003.


- 백승영,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지혜의 향연], 2015, https://youtu.be/8iKVmGiKEBM


- 강신주, 『철학 vs 철학』, 오월의 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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