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지금까지도 세바스찬의 마지막 시선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 모습은 스크린의 불이 꺼진 후에도 오랫동안 잔상으로 남아있었다.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마치 선택지를 고르듯이 내가 그 때 다른 행동을 했더라면,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런 ‘만약에’ 는 우리 자신이야 말로 가장 사실적으로 상상할 수 있기에 지나치게 잔인하다. 환상 속에서 우리는 다른 여러가지 선택지를 골라 본다. 환상의 초입에서 우리는 굉장히 그럴듯한 현실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선택을 이어갈 근거는 점점 부족하고, 장면들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결국 마지막에는 깨닫게 된다. 그런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고, 그런 일들은 단순히 순간의 선택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는걸.
훌륭한 예술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이 극도로 어려운 것은 그것이 일정 수준의 공감을 받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공감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해 받기를 바란다. 또 그 누구도 자신의 공감이 싸구려가 되는 것을 원치 않고, 설익고 천편일률적인 이해를 바라지도 않는다. 어떤 작품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아주 간략화 한다면 그것은 내가 작품을 공감하고 작품에게서 이해를 받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모든 독자의 경험과 정서는 저마다의 독창성을 가지고 있기에, 공감할 수 있는 범위도 공감하는 정도도 다르기 마련이다. 타인에게 이해를 받을 수 있는 부분과 정도 또한 그러하리라.
라라랜드는 우리에게 그다지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우리는 피아노는 커녕 하모니카 하나도 연주할 줄 모르고 연기는 커녕 무대공포증에 시달리며, 환상적인 탭댄스를 선보일 실력 또한 없지만, 이것은 철저히 우리의 이야기다. 미아와 세바스찬이 만나 연인이 되어가는 과정과 그 속에서의 ‘만약’은 모두 우리의 것과 참으로 닮은 것들이다. 그만큼 보편적인 이야기이며, 공감하지 않고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종종 등장하는 뮤지컬 장면으로 우리의 이해를 구한다. 어쨌거나 이 영화에는 우리가 종종 느끼는 한계들을 초월한 것들에 대한 암묵적인 약속들이 존재한다. ‘환상에 땅에 들어선 이상, 환상에 대해 의구심을 품지 말 것’ 이 바로 그 약속이며, 영화의 첫 장면에서부터 종종 등장하는 뮤지컬 장면들은 그것을 계속해서 환기시켜준다. 만약 몇몇 트집거리들-도요타 프리우스를 단순한 조크 이상의 것으로 받아들인 다거나, 한밤 중의 그리피스 천문대에 어떻게 둘이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 미아의 전 연인에 대한 서사적 미련 등-에 집착한다면 당신은 그 약속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영화는 적절히 감추고, 아끼었다가 드러낸다. 미아의 1인극이 끝나고 순간 확연히 포착되는 장면에서 우리는 미아에게 가장 충격적인 것이 빈 의자에 아직도 붙어있는 ‘Reserved’ 임을 알아채지만 영화는 그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그동안 친절한 한국 영화에만 익숙한 관객이라면, 연극이나 무대의 공연처럼 자연스레 놓여져 있는 미쟝센의 화법에 먼저 적응해야 한다. 이 영화를 단순히 뮤지컬 영화로 취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이 영화는 동시에 우리 삶의 한 부분을 한가득 퍼올려 보여주는 것 같은 정극 또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끝에 이르러, 미아와 세바스찬이 입을 맞추는 그 순간부터 관객들은 마침내 자신들이 가장 보고 싶었던 장면들을 보게 되지만,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우리들은 무너져버리고 만다. 둘이 나누는 키스는 이 지점부터 모든 것이 ‘만약에’ 라는 신호이며, 동시에 영화는 회상인 척 우리가 잊고 있었던 우리 삶에서의 모든 ‘만약에’ 를 불쑥 들이밀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운 환상에 우리는 스스로가 가졌던 수많은 환상을 투영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환상의 순간은 지켜보는 관객들을 무너뜨리지만 당사자인 두 과거의 연인들에게는 어떤 변화도 주지 못한다.
라라랜드를 보며 관객이 흘리는 눈물은 그동안 다른 한국식 신파가 강요한 눈물과는 완전히 다르며, 보다 고차원적인 것이다. 한국식 신파는 영화의 이야기를 영원히 타자의 관점에서 머물게 하고, 그 타자의 사건에 관객이 공감하고 감정을 이입할 것을 강요한다. 마치 그렇지 않으면 사람도 아니라는 듯이. 그것은 예술 작품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공감능력을 십분 활용한 감정팔이에 가깝다. 하지만 라라랜드는 영화가 우리의 삶을 공감하며, 우리가 영화에서 자신의 삶을 찾아내도록 해준다. 우리가 라라랜드로 인해 흘리는 눈물은 결코 일회성의, 누군가를 동정하며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우리가 그동안 살면서 흘려 온 눈물들의 반복이다.
라라랜드는 수많은 만약을 이야기 하면서도 그 이후의 후회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다만 영화는 세바스찬과 미아가 서로를 향해 지어 보이는 마지막 미소를 통해 그 이후로 나아가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그 자세야 말로 지금까지 수많은 ‘만약에’ 에 대한 로맨스 영화와 라라랜드가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다. 라라랜드는 사변을 다루면서도 가볍지 않으며, 부연을 달면서도 구차하지 않다. 라라랜드는 우리에게 후회할 것을 종용하지 않는다. 그렇게 이 영화는 스스로 빠질 수 있는 함정에서 벗어났다.
모든 선택에는 크건 작건 후회가 찾아오는 시기가 있기 마련이다. ‘만약에’ 가 시작되는 것도 바로 그 때이고, 회한과 만약이 만들어 낸 굴곡에 수많은 가정과 환상을 퍼부어 놓고 나서야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잊고 있던 그 굴곡을 우리 앞에 가져다 놓는다. 그 다음은 우리의 차례다.
라라랜드, 선택의 순간과 그 선택을 후회할 시간을 가져 본 사람들에게 귀중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