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흔들리는 사람에게》 베이징 피촌 상영기
이 글은 평등사회노동교육원 기관지 <함께 하는 품> 38호에 기고한 글을 수정한 것이다. 이 잡지는 회원들만 읽을 수 있다. 본래의 글에서 중국 내의 상황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위험해질 수 있는 내용은 삭제했고, 일부는 고쳤다.
베이징 생활 9개월째인 지난 11월, 나는 그리 상태가 좋지 않았다. 내 미래에 대한 불안, 한국 사회운동에 대한 번민, 지금 현재 중국의 학생운동과 노동자운동이 겪고 있는 극심한 탄압에 대한 걱정이 뒤범벅되어 정신적으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연락을 받았다. 피촌의 베이징 노동자의집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된 20대 친구들이었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그들은 피촌의 노동자의집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됐고,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다보니 누군가 나를 소개시켜줬다고 했다. 실은 나도 피촌에 가지 않은지 5개월이 넘은 상태였지만, 안 그래도 조만간 피촌에 다니 찾아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차였다.
우리는 베이징 학원로의 모처에서 만나 피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모인 친구들 중에선 이미 피촌에 여러 차례 다녀온 친구도 있었고, 혼자서 다큐멘터리를 촬영 중인 친구도 있었다. 이 모두가 너무 반가웠고, 굳이 내게 연락해준 친구들에게도 고마웠다. 중국인들의 특별한 장점이 하나 있다면 이렇게 안면 하나 없어도 먼저 적극적으로 제안하고, 함께 무엇을 한다는 것의 진취적 의미를 이미 알고 있다는 점이다. 이곳에 와서 살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그 전에 나는 무척이나 틀을 세우고 타인이나 세계와의 장벽을 쌓아놓고 살아왔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는 점이다. 웃기지 않나? 부족하나마 사회운동 활동가였던 놈이 그토록 폐쇄적이라니!
중국인들은 어디서든 거리낌 없이 모르는 사람과 인사하고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순식간에 친구가 되어 위챗 친구가 되곤 한다. 참고로 위챗은 중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SNS다. 새로운 친구를 만나면 위챗 친구를 맺고, 물 한 병, 노점상에서 파는 귤 하나를 사먹어도 위챗을 통해 지불한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인들의 이런 거리낌 없는 태도가 ‘예의 없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공중과의 매너만 지킨다면 이런 태도는 단점보단 장점이 훨씬 많다.
우리는 11월 중순 함께 피촌에 가기로 했다. 나야 몇 번 가봤으니 익숙했지만 두 중국인 친구들에겐 새로운 곳이었다. 그 즈음 베이징은 이미 엄청 추워지기 시작했다. 베이징은 항상 건조해서 가을이 되면 바람이 많이 불고 날씨도 많이 건조하다. 게다가 ‘5환’ 바깥의 도시 외곽으로 가니 체감온도는 더 낮았다. 피촌 거리엔 먼지바람이 가득했다.
우리는 신노동자박물관(新工人博物馆)에 먼저 갔다. 미리 약속을 했던 터라 이곳을 책임지고 운영하는 분께서 자세하게 설명해줬다. 나는 이미 이 2시간에 가까운 설명을 세 번째 듣는 것이었는데 5개월 전과는 달리 무슨 말인지 자세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중국어 공부를 하면서 과연 내 중국어 실력이 늘고 있긴 한 것인지 의심스럽기도 하고, 어휘력과 독해력은 늘어도 말하기 듣기는 도통 어렵다고 여겨 스트레스를 많이 받곤 했는데, 스스로 내 발전을 검증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언어 학습이 참 너무 어렵다고 느끼다가도 역시 하루하루 인내심을 갖고 꾸준하게 할 일을 하는 것 외엔 왕도가 없다는 진리를 새삼 깨달았다.
박물관 투어를 마치고 나오니 우리처럼 베이징 노동자의집에 방문한 다른 친구들 5~6명도 나타났다. 우린 9명이서 피촌의 한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오후 3시에 있을 영화 상영회에도 참가했다. 이날 상영한 영화는 《이민2대 移民二代》라는 독립 장편영화였다. 아마 그날 상영이 이 영화의 첫 상영이었을텐데, 이곳 책임활동가가 피촌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 시나리오를 쓰고 그들과 함께 촬영한, 피촌에 사는 사람들이 출연하는 ‘피촌 영화’였다. 2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사는 작은 마을에서 찍은 독립영화라니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둔 영화에 대한 열망을 다시 일깨우는 영화였다. 영화의 만듦새가 아주 훌륭하진 않았지만, 영화를 배운 적 없는 활동가가 만든 첫 번째 영화인데다 이곳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었으니 유의미하단 생각이 들었다. ‘이민2대’란 고향인 농촌을 떠나 도시에 온 1세대가 모두 늙고 그 자녀들인 ‘2세대’들의 삶을 그렸기 때문에 지은 제목이라고 한다.
영화 얘기를 하던 전후에 나와 함께 온 친구들이 내 대학 전공이 영화연출이고, 《흔들리는 사람에게》라는 제목의 30분짜리 단편영화를 찍었단 사실을 소개해줬다. 그러자 이곳 활동가가 거침없이 내 졸업 영화도 상영하자고 제안하는 게 아닌가. 얼떨결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나로선 영광이기도 했고, 중국 사람들은 어떻게 볼지 궁금하기도 했다. 지난 9월 한국에서 다른 두 편의 단편영화와 함께 5차례에 걸쳐 영화관에서 상영회를 했었는데, 그때 귀국하지 못해 참 아쉬웠던 터였다.
2주가 지나 상영일이 왔다. 그 사이 나와 함께 피촌에 갔던 친구들은 내 영화의 중국어 자막을 만들어줬다. 본래 영어 자막만 있었는데, 이 친구들이 영어를 중국어로 번역했고, 내가 함께 그 번역본을 검토해서 완성했다. 내 영화 상영 때문에 이렇게 고생해준다는 점이 너무 고마웠다. 나는 개인적으로 영화 상영이 끝난 후 있을 ‘감독과의 대화’를 준비했다. 이미 영화를 본 친구들에게 9개의 예상 질문을 들은 후, 그에 대한 답변을 미리 적고, 그걸 다시 중국어로 적었다.
상영일인 12월 초, 다시 피촌을 찾았다. 날씨는 어느덧 영하 밑으로 떨어졌고, 바람은 더 심해졌다. 상영회는 북경노동자의집 영화관에서 열렸는데, 50여 석 규모의 이곳은 이곳 활동가들이 영화관 의자를 어디선가 구해 오고, 한쪽 벽엔 커다란 스크린을 설치해서 직접 만든 작은 영화관이다. 피촌 마을 주민들은 주말 저녁마다 이곳에 모여 영화를 본다. 주민들이 볼 수 있는 대중영화를 상영하기도 하고, 어린아이들이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도 상영한다. 그리고 매주 일요일 오후엔 주로 중국의 현실을 담고 있는 다큐멘터리나 예술영화를 상영한다. 내 졸업 영화는 이때 상영했다. 그래서 피촌 주민들은 몇 명밖에 오진 않았고, 관객 중 대부분은 피촌 바깥에서 찾아온 청년들이었다. 관객수는 총 20명 정도였다.
30분짜리 상영은 순식간에 끝났다. 내 영화를 볼 때마다 항상 느낌이 다른데, 이날 기분은 꽤 좋았다. 어느땐 쥐구멍으로 숨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날은 ‘이 정도면 그럭저럭 재밌는 영화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 그런 날이었다. 문제는 상영이 끝나고 예상 질문이 나왔는데도 준비한 답변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때도 되는대로 대답했다. 막상 대화가 시작되니 더 긴장이 돼서 평소보다 말이 더 안 나왔다. 별 수 없이 억지로 이 말 저 말 써서 대답했더니 다들 알아들어주었고, 주최자가 이걸 더 유려한 말로 풀어서 설명해주니 훨씬 좋았다.
중국에 오기 반년 전에 한국에서도 작은 상영회를 연 적 있었다. 졸업영화제 이후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영화를 보여주는 자리였는데 지인과 영화 주연배우 팬들을 포함해서 50여 명이 왔던, 내가 느끼기엔 꽤 감지덕지하고 성대한 자리였다. 한데 기분 탓인지, 아니면 중국인들이 예의로 좋게 반응해준 건진 몰라도 한국에서의 반응보다 여기서의 반응이 훨씬 좋게 느껴졌다. 너무 고마웠다. 이날 상영회는 바닥을 기며 꾸역꾸역 살던 내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었다.
이날 이후 나는 더 적극적으로 진보적 고민을 하는 청년들을 만났다. 한국 사회가 중국의 시민사회와 국제 연대를 활발하게 하는 방법은 지금부터 차근차근 민간 교류를 넓히는 것뿐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건 시민사회든, 문화예술계든 마찬가지다. 사회운동을 예로 들어볼까. 그간 우리는 단지 사회운동에 대한 중국 정부의 통제가 강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런 교류를 꺼려왔다. 그래서 중국이 좀 바뀔 때까지 기다린다는 식의 태도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이는 중국 사회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잘못된 생각이다. 단지 기다려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 사회운동과의 교류에 비해 지나치게 협소한 중국 사회운동과의 교류를 확대해야 동아시아라는 권역 내에서의 국제연대가 자기 위치를 찾을 수 있다.
한국의 시민사회, 혹은 노동자운동이 보다 진취적으로 투자하고 교류를 확대했으면 좋겠다. 그건 단지 ‘교류’, 하면 좋고 안 하면 별 수 없는 부수적인 사업의 의미를 넘어선다. 한국의 사회운동에도 새로운 활력과 고민꺼리를 던져줄 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 행동하거나 이론‧이념 따위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폭도 더 넓어진다. 즉, 권역적인 사유, 사유와 실천의 참조를 통해 작은 반도에선 미쳐 찾지 못하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더군다나 지난 100년, 아시아에서의 사회주의 운동 경험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반추해볼 수 있다. 서구에 대한 맹목에 갇혀서는 진정으로 우리의 역사를 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동과 통신은 이토록 자유로워졌는데, 100년 전의 사회운동가들보다 더 협소하고 소극적인 교류를 하고 있는 게 지금의 우리가 아닌가.
고민이 깊어질수록 앞으로의 할 일 목록은 쌓여만 간다. 어쩔 땐 무섭기도 하고, 어쩔 땐 들뜨기도 한다. 그런 나날을 보내며 몇날며칠 고민하던 귀국 날짜를 좀 더 뒤로 미루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