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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명교 Jan 10. 2019

시간이 멈춘 옛성, 위현고성

허베이성 서쪽 장자커우시 위시엔쩐 (울현고성)

늦가을 산시성 다퉁(大同)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다퉁 날씨는 이미 영하로 떨어져 덜덜 떨면서 돌아다녔더랬다. 버스 안에서 한참을 졸다가 내렸는데 오래된 성 도시였다.


처음엔 어딘지도 모르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여긴 뭘까 싶을 정도로 풍경이 낯설었다. 보이는 건 죄다 노인이고, 풍경은 죄다 수백년 된 성인데다, 20세기 이후의 풍경이래봤자 수십년은 되어보이는 단층 가게들 뿐이었다. 거리엔 30년 된 중국 고물세탁기가 버려져 있었고, 마차도 보였다. 관광용 마차말고 생계용 마차. 설마 이러다 낙타까지? (옛날에 페르시아의 상인들은 낙타를 타고 다퉁까지 왔었다고 한다. 다퉁에서 위현이 그리 먼 건 아니니 여기까지 오지 않았으리란 법은 없다.) 



그곳은 위현고성(蔚县古城)이었다. 蔚은 울산(蔚山)의 그 글자다. 우리 한자 발음으론 울현이고, 중국어 발음으론 “위시엔구청”인데, 县은 행정구역 ‘현’을 뜻하고, 古城은 말 그대로 오래된 성을 뜻하니, 여기선 그냥 ‘위현고성’으로 해두자. 위현고성은 허베이성(河北省) 서쪽에 있는 소도시다. 도시라고 하기도 뭐하다. 그냥 시골동네다. 하지만 옛날엔 꽤 번성한 도시였을 것이다. '주(州)'는 아무데나 갖다붙이진 않으니 말이다. 이 성이 둘러싼 곳이 위저우진(蔚州镇)이다. 현청 소재지이지만 공식인구는 11만 명 밖에 안 된다. 한데 어느 설명에선 8만2천 명이라고 하고, 어디선 4만7천이라고 하니 정확한 숫자를 알 순 없다. 아마 상주인구와 등록인구의 차이 때문일 것 같다. 즉, 대다수 젊은 사람들은 죄다 대도시에 가서 살고 있으니 실제론 11만 명보단 훨씬 적다. 한나절 내내 돌아다닌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4만7천 명이 맞는 숫자가 아닐까 싶다.


위현의 옛 이름은 위주(蔚州)다. 전국시대(B.C.403년~B.C.221년) 조(赵)나라의 속국 대국(代国)의 영토였던 것에서 기원한다. 그후 남북조시대인 580년에 선비족이 세운 북주(北周)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이때 위현고성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곤 800년 후인 명나라 때 중축되었다고 하니 “오랑캐”가 세운 성을 한참 후에 고쳐서 쓴 셈이다. 또 이곳은 연운십육주(燕云十六州) 중 한 곳이라고 한다. 연운십육주는 또 뭔가 해서 바이두로 알아보니, 10세기 쯤 당나라가 망한 다음에 도래했던 5대10국 시절 나라 중 후진(晋; 936년~947년)이란 나라가 있었는데 그때 거란족이 도움을 많이 주어서 보답으로 떼준 땅을 통칭한다고 한다. 어차피 후진은 11년만에 망했으니 중요한 건 아니지만, “소위 오랑캐”라 불리는 북방 유목민족이 남하해서 한족의 나라와 경쟁할 땐 중요한 지역이었던 것 같다.


성 외곽에는 도랑을 파놓았는데 말이 '도랑'이지 깊이가 10미터이고 너비는 20미터란다. 엄청난 요새다. 지금도 강이 흐르는데, 이게 정말 파서 만든 건지, 아니면 원래 강이었는지 헷갈린다. 어쨌든 지금 이 엄청난 요새는 노인들만이 지키고 있는 시골 마을이 됐다. 고성 안은 시간이 멈춰버린 듯하다. 거리엔 베이징, 아니 다퉁에도 흔했던 좋은 차들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전부 작고 낡은 차들 뿐이다. 차는 있지만 교통체계는 자율이다. 남과 북의 망루가 마주보는 중심도로에도 신호등 같은 건 없다.



이곳은 고성 도시인만큼 문화유적이 많다. 고성 어디에서나 보이는 32미터 짜리 석탑이 있는데 남안사탑(南安寺塔)이 그것이다. 요나라 때 거란족이 세웠다고 하니 1000년 정도는 된 셈이다. 한데 그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당최 저게 가능한가 싶어진다. 시골 마을에 그냥 이런 천년 쯤 된 석탑이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다. 당시 지도를 보니 위현은 위치상 송나라와 요나라의 최접경이었다. 국경에 왜 이런 걸 세웠을까. 요나라도 한족이 맨날 깔보듯 ‘오랑캐’가 아니라 불교 문명을 수용한 엄연한 국가라고 내세우기 위해서?


남안사탑을 지나 골목을 따라 걸어가면 위현에서 가장 큰 유적인 석가사(释迦寺)가 나타난다. 이곳은 원나라 때 세워졌다고 하니 700년 정도된 오래된 절인데,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관리가 잘 되지 않는 편이다. 내가 갔을 때도 골목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신기하게 쳐다봤었다. “여길 왜 왔지? 여기 뭐 볼 게 있다고.” 대략 그런 표정이랄까. “아저씨... 700년된 절, 1000년된 석탑 같은 게 세상에 흔한 게 아니예요.” 속으로 생각했다.



절 안에 국자처럼 생긴 도구를 드높이 올리고, 어디론가를 향해 나아가자고 하는 것 같은 동상이 있었다. 누굴까. 대체 누구길래 국자를 들고 저렇게 멋있는 표정을 지은걸까. 굳이 알아보진 않았는데, 궁금하네. 물어볼걸 그랬다.



절 안은 모든 게 방치되어 있었다. 심지어 절 건물 안도 먼지로 가득했다. 스님이 없는 절이었다. 동네 애들이 와서 나쁜 짓하기 딱 좋게 생겼다.



밖으로 나오니 다시 삶의 터전이 나타났다. 1400년된 성마을 안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방앗간 앞을 지나치는데 구수한 냄새가 났다.



고구마 장수로 보이는 할아버지는 말을 이용해 장사를 하고 있었다. 저렇게 말을 끌고 장사를 하는 장삿꾼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하긴 말은 기름도, 전기도 안 쓰니까. 여물과 물만 잘 주면 되니까.



중심 거리엔 노점상들이 있었다. 달걀 장수, 두부 장수, 양말 장수, 이불 장수 등등. 두부 장수의 자전거 리어카는 저게 굴러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낡아있었다. 그는 하염없이 길거리만 쳐다봤다. 이불 장수는 껄껄 거리며 물건을 팔고 있었고,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를 구사했다. 예전에는 허베이면 베이징 근처니까 베이징 사투리랑 비슷하겠거니,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허베이에도 지역마다 사투리가 있다고 한다. 참고로 기숙사에서 내 방이 있는 9층을 청소해주시는 노동자도 허베이 출신이다. 나는 처음에 그의 말투가 너무 독특하고 억양도 생경하게 들려서 저 멀리 남쪽 어디선가에서 오지 않을까 했다. 놀랍게도 그의 고향은 허베이였다. 중국 말은 너무 어렵다.



옥수수를 사려는 엄마와 딸을 보면서 나도 하나 사먹을까 한참 고민했다. 사먹을걸. 옥수수 사진보니까 갑자기 배가 고프다.



성 문을 지나 또 하나의 성 문으로 들어갔다. 성이 너무 커서 성의 전체 구조를 알진 못했는데 전체적으로 마을 자체가 온통 거대한 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 같았다. 성문으로는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 사람이 무질서하면서도 질서있게 지나다녔다.



옛 관청 건물로 향했다. 그러니까 위주의 관청. 이곳이 국경의 요새도시였을 땐 꽤 중요한 역할을 했었을 것 같은 곳이었다. 꽤 넓은데다 감옥도 있었고, 이런저런 건물도 많았다. 하지만 생김새로 보건데 최근들어 관광객 유치를 위해 복구한 것 같았다.



다시 거리로 나섰다. 여전히 거리엔 온갖 가판이 있었다. 꽃 장수, 군밤 장수, 고물상, 솜사탕 장수, 모자 장수 등등. 이제 한국에선 시골에서도 잘 마주할 수 없는 풍경들이다.



고성 북쪽의 망루로 올라갔다. 안개인지 미세먼지 모를 공기가 고성 안팎에 가득 깔려 있었다. 원래 이곳엔 안개가 자주 낀다고 한다. 성을 둘러싼 강과 지대 때문인 것 같았다. 높게 쌓인 고성이 넓은 면적을 두르고 있지만, 이곳은 관광도시가 아니다. 대다수가 농업으로 먹고 사는데다 번듯해 보이는 식당도 없었다. 도시의 모든 게 가라앉아있는 것만 같았다. 젊은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거리엔 수십년 된 물건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안개 속에 가라앉아있는 이곳에 역사의 깊고 짙은 기운도 함께 깔려있는 것 같았다. 망루에 오르니 도시 전체가 보였다.


북쪽 망루에서 북동쪽을 보았을 때의 울현진 전경
북쪽 망루에서 북쪽 거리를 봤을 때의 전경


망루 위엔 작은 박물관이 있었다. 이곳 위현의 역사를 다루는 박물관이다. 이곳에 걸린 어떤 사진을 봤는데 1951년 바로 이곳 위현에서 치뤄진 노동절 집회 사진이었다. 아마도 그때 이곳에 살던 모든 주민들이 거리로 나왔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땐 모든 이들이 혁명적 열정, 중국 해방의 흥분과 기대감으로 넘쳐날 때였겠지? 놀라운 점은 68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곳 위현의 모습은 거의 변한 게 없다는 점이었다. 2~3층 짜리 건물 몇 개가 생긴 게 전부다.



북쪽망루에서 내려와 중심거리를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한참을 걸어가니 거리는 온통 새 장수들과 새 구경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새에 대해 뭐 그리 진지하게 토론할 게 있는 걸까? 사투리 때문에 알아듣지 못했지만 굉장히 열띤 토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상상해본다. 새란 무엇인지, 새를 기른다는 것의 책임, 새와 인간의 관계, 새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게 옳은가, 새의 생존을 위해 기르는 게 옳은가.



새 구경을 하다보니 어느덧 북쪽 외성에 닿았다. 그렇구나. 이곳은 내성과 외성이 둘러싸고 있고, 각 꼭지마다 성루가 있었다. 외성엔 누각이 없고 문이 작았고, 내성은 누각도 크고 문도 컸다. 북쪽 외성 안쪽에 작고 오래된 사당이 있었는데 기둥과 현판을 보니 몇 백년은 된 것 같았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700년이 됐다고 했다. 그 정도는 여기선 그리 대단치 않은 사실이다.


시간이 멈춘 이 옛성을 찾는 이는 거의 없다. 외국인은 당연히 찾아보기 힘들고, 중국인 관광객도 없다. 중국인들도 유명한 곳을 가지, 이런 곳을 오는 사람은 없다. 이따금 역사에 흥미가 많은 사람들이나, 학자들이 찾을 뿐이다.


지극히 낡고 젊은 사람들은 죄다 떠났지만, 이 도시가 여전히 위대해보이는 이유는 이 성이 역사의 풍파와 함께 지켜졌고, 여전히 이곳 고성 바깥에서 내리깔리는 석양으로 빛나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게다. 나는 내 이런 감격을 마을의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 했다. 내 중국어 회화의 여러 목표 중 하나는 이것이어야 할 것 같다. 위현고성의 노인들에게 오늘 내가 느낀 경의와 부러움을 말하고 싶었다. 당신들께서 당연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곳의 모든 풍경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사실 단순하게야 말할 수야 있었지만, 돌아보니 그런 생각을 하지도 못할 정도로 내 느낌에 취해있었던 것 같다.


이곳을 찾아가는 게 엄청 어렵진 않다. 베이징서남쪽 서남환남로(Xisanhuannanlu, 西三环南路) 바깥변에 육리교(Liuliqiao, 六里桥) 버스터미널이 있는데, 여기서 위현고성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 아침 7시반, 9시, 10시, 11시, 12시, 13시, 14시, 15시, 18시. 이렇게 9편이 있고, 반대로 돌아오는 편은 훨씬 많다. 거기서 65위안(11000원) 짜리 버스를 타고 3시간반 동안 280km를 달리면 이곳에 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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