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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명교 Dec 19. 2018

중국에 왜 갔느냐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소박하게 살기 어려운 시대에, 거창하고 불확실한 꿈

읽기이 글은 별 정보가 없는, 그냥 '에세이'다. 올해 3월, 나는 베이징에 왔다. 생긴거와 달리 서른다섯이나 됐으면 꽤 많은 나이인데 그 나이 먹고 중국에 왜 가냐(혹은 왜 왔냐)고 묻는 질문을 워낙 많이 듣기 때문에, 꽤 다양한 버젼의 답을 마련해놨다. 어학연수를 하며 만나는 친구들이나 선생님에겐 그저 "중국어를 배워서 나중에 '사업'을 하기 위해 왔다"고 답한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고, 내 꿈도 일종의 사업이라면 사업이랄 수 있다. 한국에서 알고 지내던 지인들에겐 "'동아시아 국제주의'에 대한 전망을 모색하기 위해 간다"고 말했다. 말도 안 되게 거창한 이유인데, 내가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하나같이 "정말 좋은 생각이네!"라고 말해주었다. 참고로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 대부분은 진보적인 연구자나 사회운동 활동가들이니, 당연히도 한국 사회의 생각을 대표한다고 할 순 없다.


며칠 전 베이징 모처에서 만난 모 대학 마르크스주의학회 학생에겐 이렇게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중국이나 한국의 사회운동에는 국제주의라는 개념이 거의 사라졌잖아. 100년 전에 비해 통신이나 교통이 훨씬 발달했지만, 오히려 지금 국제연대를 위한 실천은 더 적어졌어. 나는 그런 걸 다시 한 번 시작해보려고 왔어.” 그렇게 말하면 상대방은, “멋지다. 너 정말 대단해. 나도 동의해!(厉害,厉害!很棒!我也同意啊)”라고 말해준다. 이 역시 엉뚱한 얘기는 아니다. 내겐 그런 꿈이 있긴 하다. 거짓말도 아니고, 항상 고민하던 문제다.


이를테면 20세기 초 꽤 많은 조선의 지식인들은 망한 조국을 되살리기 위해 반도를 떠나 대륙으로 왔다. 간도나 상하이, 베이징으로 가서 그곳에서 활동 공간을 만들고, 중국인들과 교류하며 악전고투했다. 당시 상당수의 독립운동가들이 중국인들과 함께 일제에 맞서 싸웠고, 심지어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수많은 전투에 가담하며 당시 중국 인민 대다수가 지지하던 혁명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바쳤다. 그건 민족이나 국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헌신이었다. 님 웨일즈가 혁명가 김산(본명 '장지락')을 만나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쓴 《아리랑(Song of Ariran)》만 봐도 당시 김산을 비롯한 조선인들이 극도로 어려운 환경에서 얼마나 고군분투하며 살았는지 알 수 있다.



그래, 이건 옛날 얘기다. 그랬었더랬다. 어찌됐든 100년이라는 혼돈의 시간을 거친 지금, 중국에 있는 유학생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나라는 다름 아닌 한국이다. 한국에 온 유학생 중 가장 많은 나라 역시 중국이다. 요컨대 두 나라는 물리적으로나 실제 교류로나 아주 가깝다. 물론 땅의 크기나 인구 규모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서로를 가장 많이 배우고자 하는 나라가 아닐까 싶다. 한데 이토록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에 오고 있음에도 한국인 전반이 중국에 대해 갖는 이해가 그리 깊은 것 같진 않다. (반대로 중국인들의 한국 이해 역시 전혀 깊지 않다.)


요즘 전문가 이외의 사람들이 중국 관련 소식을 가장 많이 접하는 곳은 '네이버 중국'이다. 네이버와 중앙일보가 합작해 만든 '차이나랩'이 운영하는 일종의 온라인 매체로, 대형 플랫폼에 몸을 싣고 있어 급속도로 성장했다. 여기엔 중국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네이버 블로그를 이용하는 유학생, 주재원의 글, 각종 중국 여행기도 실린다. 그런만큼 물량도 많고 깊이도 천차만별이다.


한데 요즘 이곳에 올라오는 글들은 꽤 선정적으로 변했다. 그러니 댓글들도 격론일색이다. 조회수가 많은 글의 댓글 창에서 추천수가 가장 많은 건 '짱깨'라는 단어가 들어간 근거 없는 비난이 대부분이고, 어떤 글에는 조선족에 대한 혐오 표현도 심각하다. 유독 중국이나 조선족을 경멸하는 이들이 더 많이 찾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대다수 한국인들의 중국사회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다거나, 제대로 된 방향을 향하고 있다고 말하긴 어려운 것 같다. 교류 혹은 연대의 기초는 상대에 대한 이해일텐데, 우리는 여전히 그마저도 부족하다.


나는 이 거대하고 복잡다양하며 가깝지만 꽤 멀게 느껴지기도 하는 이 나라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베이징에 왔다. 거기서 좀 더 나아갈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이해도 돕고, 중국인들의 한국에 대한 이해도 돕고 싶어 왔다. 그런데 어학 공부라는 실용적이고 사소한 이유든, 혹은 동아시아 국제연대나 사회운동 같은 거시적이고 거창한 얘기든 진정한 이유를 말했다고 말하긴 어려운 것 같다. 실은 나와 같은 또래라면 누구나 겪는 어려움을 나 역시 비슷하게 겪었고, 그걸 있는 그대로 통과하며 받아들이고 싶어 '정지' 버튼을 누르고 온 것이다.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오고 기분이 더러워지는, 아직 식을 기색을 모르는 그런 어려움 말이다.


나는 남들과는 꽤 다르게 살았다. 소위 명문대학 경영학과에 갔지만 수업은 가지 않고 데모에 참석하거나 "빨갱이들이나 읽는" 책만 읽었고, 심심하면 영화를 보거나, 술을 마셨다. 그러니 10년 쯤 전인 90년대 중반에 이미 망했다는 물결의 끝물에 서서 뭔가를 해보려고 했다. 중간에 꽤 긴 시간을 방황하고, 멈추기도 했지만 결국 나는 다시 '사회운동'에 돌아왔다. 노동조합에서 활동했고 그곳에서 내 또래의 평범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까지 저항하는 것, 재벌 자본이 경찰과 공모해 시신마저 탈취하는 것도 눈 앞에서 목격했다. 분노가 크고 이겨내야만 했으니, 나름대로는 게으른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열심히 살았더랬다. 그 다음엔 좌파 월간 잡지를 만들었고, 두번째로 간 학교를 졸업하기 위해 단편 극영화도 찍었다.


이쯤이면 꽤 특이한 삶 아닌가?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서른이 넘어 겪는 고민이란 게 그렇게 특별하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흔히들 '운동판'이라고 부르는 활동가의 세계 역시 평범한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과 비슷한 고통이 있다. 예컨대 사회운동은 사회의 어느 영역보다 혁신적이어야 하는 곳이지만, 한국의 사회운동에선 '혁신'이란 게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사상은 '혁명'을 지향하지만 행동이나 토론 방식, 의사결정 구조는 매우 보수적이다. 그러니 뚫고 나아가야 하는 어려움이 닥쳤을 때 유례없는 혁신이 있어야만 해결할 수 있는데, 그 안의 여러 이유들 때문에 그런 게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이런 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운동권은 너무 후졌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그건 49퍼센트는 맞는 말이지만, 51퍼센트 정도는 그렇게 쉽게 말하기 어려워요"라고 말한다. 나는 스스로 선입견도 없고 아이디어도 넘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마주한 어려움들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보수적인 선배들이나 노동조합 아저씨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거의 방법을 찾지 못 했다. 선배들에 대해선 어쩌면 거의 포기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물론, 반대로 선배들은 나를 포기했었을 것이다. 듣기론 기업 문화란 것도 이런 아이러니와 갈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특히 보수적인 남성 활동가 혹은 노조 간부들을 지독하게 싫어했었다. 솔직히 말해, 내가 겉으로 표현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마음 속으로 경멸했었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서 목소리만 크게 지를줄 알지 젊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거나 조직의 질서를 좀 더 민주적으로 바꾸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싫어했던 이들 하나하나에게도 자신만의 고뇌가 있고, 그들만의 투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표면과 결과만 이해해줄 뿐, 내면의 고통은 말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몸부림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어떤 조직이든 목소리 큰 사람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어떤 사람이든 그가 내린 결정에 의해 평가된다. 그게 억울하고 부당한 평가일지언정 말이다. 고집만 부리고 목소리만 큰 사람들이 상황을 주도하지 않도록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앞에 나서고, 우리가 다같이 망가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또 별로 적극적이지 않고 "저 사람들과 섞이고 싶지 않아"하면서 떠나버린다.


주위엔 항상 좋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는 내내 외로웠다. 좋아했던 또래 활동가 하나 하나가 떠날 때마다 마음 속으론 더 외롭고 더 냉소적으로 변해갔다. 사회에서 가장 적극적인 기질의 소유자일 것만 같은 직업적 활동가가 냉소적으로 변한다는 건 뭘까? 주위 사람의 죽음이나 시신 탈취, 믿었던 조합원의 배신, 탈퇴 그런 걸 계속 보다보면 어떤 심각한 일이 터져도 충격받지 않을 마음이 필요한데, 냉소와 경멸은 가장 용이한 마음 방어법이다. 나는 그런 쉬운 방법을 택했다. 난 사람들에게 내 냉소가 얼마나 깊숙하게 침투한 것인지 말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베이징에서 돌아보며 생각해보니 "참 병적이었구나" 싶다. 좋게 말하면 고난을 극복할 강심장인 것처럼 굴 수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더 두려웠던 건 내가 내내 이렇게 고민만 하고, 스트레스는 친구들이랑 술마시며 풀며 살다가, 그냥 그대로 나이 들어버릴 것 같다는 점이었다. 혼자서도 세상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처럼 나돌아다녔던 20대엔 없던 공포가 내 가슴 속을 지배했고, 30대 이후 겪은 고단한 일들이 정신의 피로감을 지배했다. 그리고 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생각해보면, 눈에 선히 보이는 모습이 있었다.


물론 국회의원 혹은 대기업 임원 등 출세한 386세대가 득세하는 시대에 "이름도 명예도 없이" 노동운동을 30년씩 한 사람들을 보면 어느땐 별거 아닌 것 같으면서도 어느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존경심도 들었다. 그들 역시 나와 비슷한 고민을 겪었을까? 아니면 세대가 다르니 고민도 달랐을까? 어쨌든 나는 그렇게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모두 내게 '인내'의 위대함과 '분투'의 절박함을 말해주었지만, 지금 어떻게 하면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지, 혹은 번뇌로 가득한 시간을 어떻게 통과해야 하는지 알려주진 않았다. 그건 그들 역시 모르거나 단념한 것이었고, 내 스스로 발견하고 알아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내가 중국에 가야만 하고, 그 다음엔 거대한 어떤 일들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뱉었던 모든 말들은 내가 자신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사후적으로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건 완벽한 진실에 가깝다. 일단은 벗어나야겠으니, 뜸 들이며 근거는 만들어야겠고, 다른 또래들에게 상처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으면서, 내가 뱉은 말들을 배반하고 싶지도 않았다. 맞다,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탈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렇게 생겨먹었는 걸. 어차피 인간은 잘 안 바뀐다. 나도 그렇다. 별볼일 없는 인간성의 소유자이면서도 번민은 많이 하는 피곤한 스타일이라서, 꽤 오랜기간 죄책감을 많이 안고 살기도 했다. 어쨌든 내가 이전에 신문이나 잡지, 회의, 집회 발언, 술자리 등에서 뱉은 말들이 내 발목을 잡으며 사는 건 어찌할 수 없는 사실이고, 그걸 마냥 무시하며 살 뻔뻔함은 없으니 안고 살아야지. 내가 인간에 대해 믿는 건, 노력하면 한 두 번은 바뀔지도 모른다는 점 정도일 뿐이다. 실은 그건 내가 가끔 파렴치하다고 느끼는 스스로를 경멸하지 않기 위해 만든 희망사항이기도 하다.


요컨대 나는 내 또래의 다른 사람들도 이런 고민을 하는지 잘 몰랐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아주 특수한 길을 택했어서 유독 나처럼 이런 길을 걷는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이라고 착각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SNS나 요즘 많이 출간되는 독립출판 에세이들을 보면 그게 우리 세대의 보편적인 현상이란 게 느껴진다. '퇴사'에 대한 담론이나 '소확행'이 유행하고, 관련 서적이 쏟아지고, 작은 서점 문화나 여행이 유행하는 것도 그런 고통의 반영일 것이다. 일종의 자기 치유 프로그램 말이다. '소확행'을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는 일엔 별 관심이 없고, 또 그게 일종의 소비 코드가 되는 것과도 거리두고 싶지만, 그런 자기 치유의 노력이 문화적 현상으로 일어나는 것 자체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이전의 소비 문화보다는 훨씬 보편적인 코드가 담겨있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문화란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가 해야할 말, 해야할 고민을 다 했다고 할 수 없는 것 같다. 경제 불황이 장기화되고 개인의 평범한 자유와 욕망도 허락되지 않는 불평등한 시대에 소비의 폭을 줄이고 '나'에 집중하라는 정언명령은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변화 욕망을 거세하는 효과를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 사회의 이런 변화가 '일본화되는 현상'을 반영한다고 하던데, 일본화의 실체가 무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렴풋이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정치는 냉소의 대상이 되고, 이주민이나 동성애자와 같은 '타자'는 적대화하는 가운데, 온전히 나의 '소박한 행복'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는 나 한 사람마저 온전히 행복해질 수 없다. 잠시동안의 행복에서 빠져나와 현실에 돌아오면 마주하기 싫은 연옥 세계가 펼쳐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실은 이야말로 소박한 행복을 위한 사유가 아닐까? 소박한 행복이란 사회의 모순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이 세계에서 '소박한 행복'을 꿈 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사람들, 그런 시간이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이들이 너무 많다는 걸 안다면, 그 소박한 행복의 꿈을 꾸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알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소 거창하고 허무맹랑할지언정 거대한 꿈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고집스럽게, 보다 세계적인 차원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그 세계에서 저항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한국에 돌아가 이전보다는 더 평범하고 보다 '소박한' 일상을 살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머릿속에서 품는 생각과 꿈은 전혀 '소박하지 않'게 가지려 노력하고 싶다. 그래야 내 소박한 일상에서 이뤄지는 일시적인 행복이 이 사회와 동떨어져 있지 않고, 하물며 이 나라를 벗어나 베이징 교외나 광동의 가난한 농민공들의 투쟁, 하노이에서 삼성전자 공장을 짓는 베트남 노동자들의 삶과도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걸 잊지 않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세계의 진실이나 내 행복과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계속 그렇게 고민하며 잊지 않고 살아야, 언젠가 반드시 돌아가야만 할 때, 혹은 어둠 속에서 길을 찾으려 할 때, 통로가 남아있을 것이다.


중국에서 내가 보고, 듣고, 겪고, 느낀 것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잡기가 다양하고 세상 오만가지에 대해 조금씩 알지만, '데모 잘 하는 방법'말고는 어느 하나도 전문성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내 중국 이야기는 겉핥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남들과 다른 시선으로 중국을 보고 살고 있지만, 그것 역시 일종의 겉핥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겉핥기란 것도 때론 진실을 살피고 현상을 관찰하며 미래를 내다보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겉을 잘 들여다보면, 보이지 않던 게 보이기도 하고, 남들이 잘 살피지 않는 것도 볼 수 있다. 나는 그런 겉핥기를 하려고 한다. 남들이 다 얘기하는 중국에 대해선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18세기 조선, 북학파 실학자들도 청나라에 와서 5년 10년씩 머무르진 않았지만 누구보다 탁월한 견문을 기록했다. 내겐 연암 박지원 같은 탁월함은 없지만, 그때의 연암보단 중국어를 잘 하고(푸하...), 연암이 조선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품었던 것만큼의 열망도 내게 있다. 그러니 이건 보편적인 고통을 극복해보려 거창한 꿈을 갖고 중국에 온 내 나름의 견문록이다. 겸손의 미덕은 집어치우고, "적어도 '네이버 중국'보단 낫지 않을까"하는 오만한 생각을 품고 이야기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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