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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명교 Jan 10. 2019

지상의 천국, 만봉림 소수민족 마을에서의 사흘

구이저우성의 숨은 보석 쌰나회이 마을

지난 여름 부모님과 함께 구이저우 여행을 갔었다. 태어나서 처음 하는 효도여행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효도'란 단어를 꺼낸 적은 없다. '효도'는 나와 부모님 사이에선 꽤나 민망할 수밖에 없는 단어다.


본래는 윈난 여행을 하려 했었다. 워낙 관광지로 유명하고, 아름답다고 하니까. 어차피 부모님이 오기 전 윈난에 있을테니 미리 파악을 해놓고 가이드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6월 초 즈음 엄마가 생각을 바꾸었다. 갑자기 구이저우에 가고 싶다고 하시는 게 아닌가. "구이저우요? 들어보긴 했는데..."


일단 알겠다고 했다. 윈난은 수많은 조사를 이미 해놓긴 했지만, 부모님이 가고 싶은 곳에 가는 게 맞으니까. 그래서 두 달 전부터 이것저것 알아보기 시작했다. 어떻게 가는지, 부모님이 서울에서 오려면 어떻게 와야 하고 나는 어디서 마중해야 하는지, 뭘 타야 하고, 어느 곳에 가야 하는지, 유명한 곳은 어디고 평가는 어떤지, 숙소는 어디에 잡을지 등등. 모든 걸 혼자 해보려니까 쉽진 않았다. 그게 6월경이었는데 7개월 전인 그땐 지금보다 중국어 실력도 낮았고, 정보도 없었다. 그래도 무작정 이것저것 찾아봤고, 고민 끝에 어렵사리 몇 곳을 추릴 수 있었다. 구이양, 청암고진, 싱이, 황과수폭포, 천호묘족마을 등등. 그중 싱이는 '만봉림'과 '마령하협곡'으로 유명한 곳이다. 바이두에서 검색을 해봤더니 엄청나게 아름다운 경치로 가득했다.


마지막까지 싱이에 갈지 말지 고민했던 이유는 싱이가 구이저우의 서쪽 끝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멀었고, 교통편은 편하지 않았다. 솔직히 내가 부모님을 모시고 찾아갈 수 있을지 겁나기도 했다. 그래도 사진 속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다.


만봉림. 구글이나 바이두에서 검색하면 이런 사진만 널려있으니. 싱이 포기하긴 어렵다.


부모님이 오는 8월 20일은 내가 이미 윈난 여행을 마쳤을 때였다. 16일까지 쿤밍에 머무르던 나는 쓰촨성 청두로 가서 부모님을 맞이했다. 청두의 저렴하고 괜찮은 호텔에서 하룻밤을 머무르고, 바로 다음날 고속철도를 탔다. 혼자였다면 타지 않았겠지만 60대 중반의 부모님에겐 고속철도가 최선이었다. 구이저우성의 성도인 구이양에 내려 2박3일 간 여기저기 구경을 하고, 다음 행선지인 싱이로 향했다.


한국에서 싱이로 가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인천발 구이양행 대한항공 노선은 2017년 말 사라졌다는 걸 알아야 한다. 사드 여파 때문에 중국 관광이 줄어서다. 그래서 구이저우성에 가려면 청두나 광저우를 거쳐 기차나 비행기를 다시 타야 한다. 만약 바로 싱이에 간다면 인천에서 청두로 가는 비행기를 탄 후, 청두에서 싱이로 가는 비행기를 타면 된다. 노선은 확인해봤다. 청두-싱이 노선은 2시간 걸리고, 8만 원 정도다.


싱이가 그렇게 작은 도시는 아니다. 중국 남방 구이저우성에서도 최서남단에 위치한 작은 도시지만, 인구는 87만 명이고, 도심은 꽤 개발이 되어 있다. 원래 예전부터 관광도시로 알려졌었기 때문에 호텔도 꽤 많다. 구이양에서 싱이에 가려면 비행기로는 50분이고, 버스로는 5시간을 가야 한다. 구이양에서의 마지막 날, 엄마가 걱정돼서 버스말고 비행기를 타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었다. 비행기삯도 우리돈 5만 원 정도로 저렴하다. 하지만 엄마는 비행기는 싫다고 하셨다. 비행기 타는 일이 귀찮기도 하고, 무섭다나. 별 수 없이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려면 구이양의 버스터미널로 가야 한다. 당시 난 표가 없을까봐 걱정이 돼서 하루 전에 사려고 미리 알아봤는데, 지도에 표시된 곳을 찾아갔다가 터미널이 아니라 차고지라서 낭패를 봤었다. 차고지에서 중국인에게 물어보니 그냥 당일 조금 일찍 가면 표는 얼마든지 있다고 했다. 당일 날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갔더니 여유롭게 표를 살 수 있었다. 차표는 1인당 130위안(2만원)이었다.


구이저우는 정말 거대하다. 한국의 1.7배인 17만㎢에 달하고, 동서간 길이는 595km다. 우리가 탄 버스는 구이저우 한 가운데에서 출발해 서남쪽으로 향했다. 엄마와 아빠는 버스에서 내내 잠들지 않았다. 피곤할텐데 주무시라고 했더니 피곤하지도 않고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서 잘 수가 없다고 했다. 정말 그랬다. 구이저우는 이른바 '카르스트지형'으로 뒤덥인 고원지대다. 평균 고도는 1천 미터가 넘고, 어디를 가나 카르스트형 산들로 가득하다. 구이저우의 풍경은 그 수만 개의 산의 연속이다. 곳곳에 소수민족의 마을이 보이고, 고개를 돌려 어디를 봐도 아름다웠다.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땅, 천연자연이 가장 빼어난 땅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게다가 구이저우성은 중국에서 유네스코(UNESCO) 지정 세계유산이 가장 많은 성이고, 낙후한 곳이 많아 가장 가난한 성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빠른 속도로 경제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싱이에 도착해 띠디(滴滴,DIDI)를 불러 숙소로 향했다. 일부러 숙소는 시내에 잡지 않고, 만봉림 인근 마을에 민박으로 예약했다. 마을에 도착해서 느낀거지만 그렇게 한 건 정말정말정말 잘 한 일이었다. 만봉림 한 가운데에 있는 마을 자체도 너무 조용하고 아름다웠고, 공기와 물 모든 게 맑았기 때문이다. 이 마을의 이름은 씨아나회이촌(下纳灰村)이었다. 정확한 주소는 구이저우성 첸시난부이족먀오족자치주 싱이시 만봉림 쌰나이회이촌(州省黔西南布依族苗族自治州兴义市万峰林办下纳灰村大寨组)인데, 만봉림이 행정구역은 아니지만 만봉림풍경구 안에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붙이는 것 같다. 오는 길에 썅나회이촌(上纳灰村)을 지나서 오는데 도로만이 아니라, 마을 간 골목으로도 연결되어있다. 우리 숙소는 见山民宿였다. 말 그대로 산이 보이는 민박(게스트하우스)이란 뜻이다.



택시아저씨는 숙소 앞에서 내려주셨다. 표지판을 따라 가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우리 숙소는 정말 산이 보이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입구도 예뻤지만 집 안 정원은 더 아름다웠다. 주인 부부도 이곳에 살고 있는데 정원 꾸미는 게 취미라고 했다.  촌스럽지도 요란하지도 않게 잘 꾸몄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묵은 방은 옥상이었다. 일부러 경치가 훤히 보이는 3인실 방을 잡았었다. 깔끔하기도 했고, 방 바로 앞 루프탑이 너무 좋았다. 사방에 수백 개의 산이 둘러싸고 있었다. 잠시 옥상에서 경치를 감상하다가 마을로 나섰다.



거리엔 관광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죄다 마을 사람들 같았다. 여기가 샤나회이촌의 메인스트리트였는데, 옷가게, 카페, 음식점이 있었지만 하나같이 한산했다. 다음날엔 금요일이라 관광객들이 좀 보이긴 했는데 그리 많진 않았다. 유일한 외국인은 우리 가족과, 중국인 여자친구와 함께 온 한 백인 남성 정도 같았다. 그만큼 유명하지 않기도 하고, 휴가철도 지났고, 워낙 외진 곳이라서 그런 것 같았다. 이곳이 너무 맘에 들었다.


샤나회이 마을 거리의 풍경


거리엔 벽화가 가득했다. 벽화도 어쩜 이렇게 다 잘 그렸지?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았다. 이곳은 소수민족인 포의족(布依族) 마을이다. 그래서 벽화 속 사람들의 복장도 모두 포의족이 자주 입는 백색-청색 전통복이었고, 마을을 거니는 주민들 중에서도 전통복을 입은 사람들이 꽤 보였다. 건물들도 죄다 컨셉을 맞춘 것 같았다. 아님 원래 이렇게 예쁘게 칠하고 살았던지... 에이, 설마 아니겠지. 이렇게 마을이 작은데, 설마. 아무튼 예뻤다. 포의족 전통복 가게도 있었는데 나같은 가난뱅이가 사기엔 상당히 비쌌다.



할머니께선 하루가 고단하셨던 모양이다. 길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계셨다. 할머니가 입고 있는 옷이 포의족 전통복이다. 오후 4시쯤 되니 골목으로 하나둘씩 마을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카드놀이를 했고, 아이들은 이리저리 방방 뛰어놀았다. 중국의 여느 마을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이 마을 한 가운데로는 작은 냇물이 흐른다. 그 옆엔 엄청 오래된 고목이 서 있는데, 1천년 정도 됐다고 한다. 포의족 사람들은 이런 고목 앞에서 제사를 지내고, 운을 빈다.



다리 위에는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뭔가를 팔고 있었다. 옥수수, 꿀, 떡, 달걀이 전부였다. 엄마는 한참을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면서 구경하다가 돌아왔다. 중국에서 엄마는 참 재밌다. 뭘 사려고 할 때 거리낌없이 한국말로 말을 건넨다. 그럼 중국인들은 어떻게든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면서 손짓발짓을 다 하고, 그러다가 운 좋게 성공적으로 거래가 이뤄진다. 열흘 간의 구이저우 여행 동안 계속 붙어다니긴 했는데, 사실 내가 같이 있지 않을 때도 뭘 잘도 사오셨다. 이런 걸 인생의 노련미라고 해야 하나.



배가 고파서 식당에 들어갔다. 아무데나 들어가진 않고 메뉴를이리저리 보다가 비교적 깨끗한 곳에 들어갔는데, 막상 메뉴판을 보니 뭘 시켜먹을지 고민이 됐다. 그래도 주문한 음식이 모두 맛있었다. 가격도 너무 저렴했다. 볶음밥 한 그릇에 1500원 수준이었다. 중국 시골 마을의 작은 식당에서 뭐 먹을지 고민될 땐 안정빵으로 계란볶음밥(鸡蛋炒饭) 종류를 먹으면 된다. 우육면(牛肉面)도 나쁘지 않다.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 괜히 아무거나 주문해서 도전했다가 실패하는 것보단 그게 낫다.



샤나회이촌에서 시진핑 주석의 인기는 나쁘지 않나보다. 가게 안을 들여다보면 여지없이 시진핑 사진이 걸려있었다. 흥미로웠다. 베이징이나 상하이, 시안, 청두같은 대도시에선 거의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윈난에서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허베이나 산시(山西)에서는 마오쩌둥 초상은 많이 봤지만 시진핑 초상은 본 적이 없다. 구이저우는 좀 분위기가 달랐다. 워낙 거대한 나라이다보니 지역마다 분위기가 다른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렴한 바이주 한 병을 사서 숙소로 숙소로 돌아와 부모님과 한 잔 했다. 부모님과의 여행이 시작된 후로 이렇게 매일밤 아빠와 바이주를 마셨다. 구이저우는 마오타이주로 유명하지만 동네에서 파는 바이주도 그리 나쁘진 않은 것 같다. 역시 동네빨인가? 얘기를 들어보니 구이저우는 바이주 제조법이 다른 동네랑은 전반적으로 다르다고 한다. 뭐라더라? 잊어버렸다. 아무튼 좋다. 해지는 마을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넋 놓고 쳐다보며 앉아 있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선선한 밤이었다.

 


다음날 우리는 만봉림 인근을 쉼 없이 걸었다. 실은 만봉림 풍경구 안의 꼭대기 쪽으로 올라가볼까 했었다. 마을에서 전기카트를 빌려 그걸 끌고 매표소까지 갔다. 전기카트는 관광객들이 이곳 만봉림 인근을 구경하기에 좋은 이동 수단이다. 굳이 택시 같은 걸 탈 필요가 없다. 세네 명 정도가 같이 타면 부담스러운 가격도 아니다. 아무튼 그걸 타고 갔는데, 만봉림 풍경구의 셔틀버스 가격이 너무 비쌌다. 고민하다가 타지 않기도 했다. 남들은 죄다 타는 거긴 한데, 이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나 의심이 됐다.


ㅋㅋㅋ 이 사진 왜 이렇게 웃기지. 러리교 앞에서. 여기서 멈춰 내린 후, 다리를 건넜더니 숨겨져 있던 산책길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냥 걸었다. 마을과 마을에 들려 을 따라 걸었다. 그러다가 한 가지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됐는데, 이곳에 비밀스럽게 조성된 산책길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네이버에서 아무리 구이저우 여행이나 만봉림을 검색해도 이 산책길에 대해 소개하는 블로그는 나오지 않는다. 그냥 걸어가다보니까 일부러 엄청 긴 산책길을 조성했다는 걸 알게 됐다.



산책길을 따라가다보면 계속 표지판이 나온다. 쐉성(双生)은 뭐고, 러리(乐立)는 뭔지 알 수 없지만 둘 다 이름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지도 모르고 그냥 걸었다. 나무로 끝없이 바닥을 깔아놨는데, 확실히 관광객들을 위해 설치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놀라운 점은 이 긴 산책길이 너무 단촐하고 깨끗할 뿐만 아니라, 거창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따리고성이나 리장, 구이린, 쑤저우, 시안 같은 유명 관광지에 가면 이와 다르다. 뭔가 장식을 덧붙였다던지, 거대한 뭔가를 만들어놓고 그걸로 스펙타클을 만들려고 시도한 기색이 역력하다. 싱이는 다르다. 모든 게 심플하다. 싱이의 관광개발을 설계한 누군가의 실력 발휘인지, 아니면 이 지역의 특색인지 모르겠다.  



엄마는 이 산책길을 너무 마음에 들어했다. 내가 중학생일 때 엄마는 혼자서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로 두 달 동안 여행을 간 적 있었다. 지금이야 엄청 유행이고, 한국 사람들이 많이 가고 있지만 그땐 아무도 그곳에 대해 모를 때였다. 엄만 <나는 걷는다>라는 두꺼운 책을 읽곤 바로 마음 먹었다. "난 순례자의 길을 걸을 거야." 그건 엄마에게 엄청난 모험이었다. 영어도 스페인어도 안 되는 아시안 중년 여성이 두 달 동안 스페인에서 도보순례를 한다는 건 1990년대를 통과한 누구에게나 무모한 모험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갔다. 난 엄마의 여행에 대해 많은 얘길 들었지만 구체적인 건 죄다 기억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엄마가 그런 결심을 했고, 몇 달 동안 걷기 훈련을 하더니, 이내 그걸 주저없이 했다는 사실이다. 엄마는 싱이의 산책길이 카탈로니아보다 더 좋다고 했다. 한 달 동안 스페인 남부 여행을 했었던 아빠도 이 길이 너무 좋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그리고 부모님이 이 여행을 너무 좋아해서 행복했다.



마을을 벗어나 샹나회이촌과 완푸촌(万福村) 등 그밖의 다른 마을들도 돌아다녔다. 완푸촌은 샤나회이촌에서 남쪽으로 한참 걸어가면 나오는 말이다. 거기서 더 내려가면 만복사라는 작은 절이 있고, 더 내려가면 계속 산과 들이다. 셋이서 무슨 생각으로 온종일 걸어다녔는지 모르겠다. 그냥 걸어가며 보이는 풍경이 좋았고, 그 아름다움에 한참 취해있었던 것 같다.



만복촌 입구엔 커다란 게시판이 있다. 이 마을의 당원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중국공산당의 자보를 붙이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이 마을에 평생 살면서 자신의 할 일을 최선을 다 하며 사는 평범한 시골 당원일 것이다. 어쩌면 시골에 있는 대다수 평당원들을 그렇게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비판적 생각이 들어도 침묵하고, 때론 조용히 목소리도 내면서 말이다. 그를 보고 있으니 예전에 봤던 어떤 시가 떠올랐다. <뗏목지기는 당원이었네>라는 시였는데, 한 곳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언젠가 필요할 자신의 역할을 기다리고, 사람들과의 약속을 지키려 했던 어떤 뗏목지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다. 그냥 지어낸 시겠지만, 한 때 그런 묵묵한 책임감의 무게에 대해 아주 진지하고 무겁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한데 그 묵묵함과 인내, 자긍심도 내가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믿음직해야 지킬 수 있는 것일텐데, 선배들을 못 미더워하고 의심이 많은 난 안 되겠거니, 싶다. 걷다가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참 웃기다.



마을에서 산쪽으로 올라가면 집들이 다 돌로 지은 모습이었다. 아마 포의족 전통건축은 이런 형태가 아니었을까 싶다. 어떤 집은 그럴듯한 민박집으로 꾸며져 있었고, 어떤 집은 그냥 사람사는 집이었다. 이런 옛집들을 보니 좀 의문이 풀리는 것 같았다. 여긴 뭐든지 심플함의 미덕으로 살아온 게 아니었을까 싶다. 산책길이 그렇게 심플했던 것도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한참을 걷다가 방앗간을 만났다. 그 안에선 주민들이 모여서 뭔가 하고 있었다. 곡식을 빻고, 가는 일이었다. 그 안의 도구들이 죄다 옛날식이었다. 그냥 옛날이 아니라 옛날옛날먼옛날~ 신기해서 돌려봐도 되냐고 물어보고 따라해봤다. 저걸 저렇게 돌리면 뭐가 빻아지나보다. 운동도 되고 곡식도 빻고 아주 좋아보였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 모든 걸 이렇게 직접 한다.



화장실도 너무 예뻤다. 돌을 둥그렇게 쌓아 만든 화장실이었는데, 세면대도 돌로 된 걸 구해와서 인테리어해놨다. 어쩜 이렇게 컨셉을 죄다 어울리게 통일시켜놨지?



한참을 걸어 다시 샤나회이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 아이들이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떠서 장난치고 있었다. 나도 엄청 어릴 땐 의왕시 내손리에서 저러고 놀았었는데... 옛날 생각이 났다. 또 다른 아이들은 마을에서 파놓은 아주 작은 외부 목욕탕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엄마가 뜬금없이 애들에게 물을 뿌리면서 장난을 쳤다. 황당~


얼마나 걸었나 봤더니 2만5천보. 여행 중에 그렇게 많이 걸은 적이 없었는데 37일 간의 서남부 여행 중 이날이 최고로 많이 걸은 날이었다.



엄마는 여기 와서 살고 싶다고 했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언어 문제가 아니라면 정말 그러려 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여기에 작은 집을 짓는다면 겨울이나 여름엔 와서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윈난만큼 1년 내내 봄 날씨는아니지만, 구이저우 싱이도 여름엔 별로 덥지 않고, 겨울엔 그리 춥지 않다. 나는 계속 엄마가 씩씩하게 걷는 모습을 찍었다. 일부러 씩씩하게 걷는거라고 했다. 그래야 건강해진다고. 엄마는 서울에서도 매일 저렇게 걷는다. 나중에 아프면 돈도 들고 고생하니까 편안하게 늙어죽는 게 엄마의 소원이라고 했다. 참 소박한 소원이다. 난 언제쯤 저런 소박한 소원을 갖게 될까? 아직은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엄마는 결국 마을 앞 다리 위에서 옥수수와 꿀을 샀다. 꿀은 걷다가 봤던 양잠 농장에서 직접 딴 것일 게다. 2병을 사서 한 병은 내가 갖고, 한 병은 부모님이 가져가셨다. 나중에 베이징에 와서 자주 꿀을 타마셨는데 정말 좋은 꿀이었다. 아마 한국에서 샀다면 아주 비싸게 주고 샀을만한 그런 꿀이었다. 옥수수 팔던 할머니, 꿀 따와서 팔던 할아버지께 감사드린다.


아름다운 샤나회이촌. 나중에 꼭 다시 갈 거다. 그땐 한 일주일 비워서 가야겠다. 일주일 동안 유유자적하며 걷고, 저녁엔 지는 해와 만봉림을 보면서 구이저우 특색 돼지고기 절여서 말린 안주에 바이주 마시면서 수다떨기. 크...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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