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에서 1년 살 때 런던을 잠깐 여행하고 온 적이 있다. 프라하에서 런던까지는 비행기로 정확하게 한 시간 걸린다. 저가항공이기는 하지만 비행기 탑승 요금도 4만 원 안짝으로 드니 큰 부담 없이 다녀올 만했다.
단 런던의 유명 관광지 근처에 숙박소를 정하려면, 우리 부부 같이 하루 숙박비를 최대 10만 원 안쪽으로 잡아 놓을 경우, 호텔 등의 숙소에서 묵기는 어려워 부득이 한국인이 하는 민박집으로 숙소를 정하게 됐다.
서유럽 대부분 국가들은 쉥겐 가입 국가이기 때문에 체코에서 이들 나라를 여행할 때, 따로 입국 심사를 받지 않고 자기네 나라 드나들듯이 한다. 이에 반해, 영국은 비쉥겐 국가라서 간단하나마 입국서류도 제출하고 입국 심사를 받아야 했다.
민박집 사장은 이 입국서류를 작성할 때 숙박 장소로 민박집 주소를 절대로 적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공항에서 가끔씩 확인 전화가 와 곤란한 경우를 당한다고 한다. 왜 그것이 곤란한지는 나로서는 그냥 짐작만 해볼 뿐이었다.
그래도 숙소를 거짓말로 쓸 수는 없어 빈칸으로 놔뒀더니, 입국심사관이 아무 데라도 좋으니 반드시 기입하라고 했다. 그래서 관광 안내서를 보고 금방 눈에 들어온 런던 그린파크 옆에 위치한 리츠(Ritz) 호텔을 적어 제출했다.
나중에 런던 시내를 관광하다 보니 그린파크의 리츠호텔은 엄청나게 럭셔리한 호텔이었다. 그럼에도 입국심사관은 더 이상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무심히 입국도장을 찍어줬다. 주워들은 얘기이기는 하지만, 영국은 진짜 ‘형식’을 좋아하는 나라인 것 같기도 했다.
하여튼 민박집주인의 신신당부와는 대조적으로 입국심사관의 태평스럽고 무심한 표정이 대조적이었다. 스탠스태드 공항서는 공항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와서 민박집 근처인 빅토리아 버스터미널에서 내렸다.
민박집서 알려준 주소로 집을 찾는데, 그것이 나에게는 쉽지 않았다. 민박집 전화번호도 있었지만, 체코에서 사용하던 모바일 폰이라 전화 걸기가 어려웠다. 하도 못 찾겠다 싶어 근처 식료품점에 들어가 음료수를 사 먹으면서 가게주인에게 민박집으로 전화를 부탁했다.
그래서 주인과 통화를 하고 간신히 민박집을 찾았다. 이후 그 집을 떠날 때까지 주인장에게 구박을 당해야 했다. 동네 이웃들로부터 민박집으로 많은 민원이 들어오는데 하필 왜 그 식료품 가게에다 전화를 부탁했냐는 것이다. 역시 그 민원의 내용이 뭣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래서 변명 삼아 우리 부부가 젊은이들 같지 않아 집을 잘 못 찾아 할 수 없이 그랬다 하니, 여주인은 그게 무슨 말이냐며 일흔 살 넘은 노인네들도 지도 보고 척척 잘만 찾아온다고 얘기해 줬다. 그러면서 그런 주제에 무슨 자유여행을 다니는지 한심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조금 후 나는 눈치 없이 주인이 화난 것도 모르고 농담 삼아 내 나이가 얼마나 돼 보이냐고 물어보니, 당시 환갑 전인 나를 보고 일흔도 훨씬 넘어 보인다고 했다. 나야 뭐 그렇다 치더라도 나보다 나이가 네 살 아래인 ‘듣는 아내’는 좀 섭섭했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 더 민망했던 것은, 그 집의 민박 손님인 한국 여대생들 틈에 끼여 식사를 하면서 계속 이런 식의 지청구를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래도 한국에서는 명색이 대학 선생인데 제자뻘 되는 학생들 앞에서 런던까지 와서 이런 망신스러운 얘기를 듣고 있자니…
나는 여행 다니면서 우리나라 사람들과 마주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애써 모른 척하고 다니는데 어떤 때는 한국관광객이 우리 부부를 보고 자기들끼리 속삭이면서 “저 사람들 중국사람 같지!”하는 얘기도 들었다.
나는 다른 나라 공항서 입국심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면, 언어를 비롯해 모든 것이 낯설어지면서 내가 이곳에선 아무 존재도 아닌 일종의 투명인간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새롭게 전개될 사태에 대한 불안과 긴장감도 들지만 오히려 그것이 묘한 흥분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한인 민박집으로 들어오면 그런 흥분이 사라지는 게 흠이다. 물론 그곳을 가면 주인으로부터 또는 한국에서 온 여행객들로부터 여행에 필요한 팁, 특히 유명 관광지를 단 시간에 어떻게 효율적으로 구경하고 다닐 수 있는지 하는 꿀 팁을 얻게 마련이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런 팁을 얻어 잘 구경하고 다니다 보면, 나만의 여행을 하지는 못한다는 점이 늘 아쉬웠다. 그냥 민박집 손님들과 내남 없는 똑같은 여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로마 여행을 가장 잘하는 방법은 로마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지금 다시 런던 여행을 한다면 설사 관광명소 몇 군데는 놓칠지라도, 도심의 워털루역서 기차로 좀 떨어진 곳의 싸고 한적한 숙소를 골라 기차를 놓쳐보기도 하면서 여행을 해보고 싶다. 여행 전엔 늘 그렇게 생각하나, 막상 닥치면 이를 실행에 옮겨 본 적은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