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문규 Dec 08. 2024

홀바인의 ‘에라스뮈스’, 그리고 ‘루터’와 '뮌처'

종교개혁의 삼인행

나 같은 아마추어 미술 감상자들의 경우, 이태리, 프랑스, 스페인 또는 플랑드르 말고도, 독일에도 르네상스 화가가 있었는지는 모르기 십상이다. 이런 점에서 여행 중 둘러봤던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는 유럽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는 입문 교과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내셔널 갤러리는 무료 관람이다. 그래서도 쉽게 가봤다. 시간이 된다면 몇 번이고 가서 찬찬히 둘러볼 수 있었다. 소장 작품들이 유럽의 명화 중심으로 이천 점이나 된다니 런던 사는 이들이 부러워 보였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이가 독일 르네상스화가 한스 홀바인이다. 


측면에서 본 내셔널 갤러리(위), 내셔널 갤러리의 입구


내셔널 갤러리에는 홀바인의 그림들이 많다. 그중 인상 깊게 본 건 그의 초상화 작품 「에라스뮈스」(1523)다. 에라스뮈스는 잘 알다시피 ‘우신예찬’이라는 저서로 유명한 종교 개혁가이다. 그림 속의 에라스뮈스는 침착하면서도 날카롭고 깐깐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든다. 


화가 홀바인의 성격도 그를 닮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북유럽 화가의 강렬한 자의식 같은 게 느껴지는 그림이기도 했다. 내가 당시 에라스뮈스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졌던 건, 유럽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을 때였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유럽의 대학들에는 ‘에라스뮈스 프로그램’이라는 학사제도가 있다. EU 국가 대학생들 간의 일종의 교환학생 프로그램이다. 유럽의 많은 학자, 사상가들이 있을 텐데, 왜 하필 이 프로그램 이름에 ‘에라스뮈스’를 갖다 붙였을까 하는 나름의 궁금함이 있던 차였다. 


홀바인의 <에라스뮈스>(위), <다람쥐와 찌르레기와 함께 있는 여인>(1526~8)



‘에라스뮈스’를 그린 홀바인은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출신이다. 독일 남부에 위치한 이 도시는 당시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유명한 프로테스탄트 도시였다. 홀바인은 이곳 출신이지만 미술 공부를 위해 스위스 바젤로 가는데, 거기서 종교문제로 피신해 왔던 에라스뮈스를 만난다. 


홀바인은 에라스뮈스의 책 ‘우신예찬’의 삽화를 그리기도 하고, 그를 위해 여러 점의 초상을 그린다. 이후 홀바인은 에라스뮈스의 추천장으로 영국을 가서  헨리 8세의 궁정화가가 돼 영국에 정착한다. 내셔널 갤러리에 홀바인의 그림이 비교적 많이 걸린 사연인 듯싶다.  


홀바인이 존경해 마지않았던 에라스뮈스(1466~1536)의 행적과 성격은, 그와 같은 시대를 살다 간 루터(1483~1546)와 뮌처(1489~1525) 등의 다른 종교개혁 운동가들과 비교해 보면 좀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에라스뮈스는 루터에 앞서 종교개혁을 선도한 이다.    


가톨릭진영은 에라스뮈스를 주님의 들판에 죄악의 씨앗을 뿌린 자라고 비난한다. 그가 교회를 조롱해도 된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시작한 자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도 에라스뮈스가 실제론 교회를 열성적으로 무너뜨리는 일에 동참하지 않았다고 비난한다. 


에라스뮈스는 가톨릭과 루터 어느 편에 일방적으로 서지 않고 양측 모두를 겨냥하여 비판하는 입장에 있었다. 예컨대 가톨릭교회가 썩어빠진 건 맞지만, 썩어빠진 교회의 밧줄을 풀어서 전체를 살리려고 하기보다는 이를 끊으려고만 했던 쪽에 대해서는 누구든 비판했다. 


에라스뮈스는 온유한 평화주의자로 로마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쪽의 균열이 수습불가의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루터는 이런 에라스뮈스의 양비론을 가리켜 “뱀장어처럼 달걀 위를 걸으면서 어느 것도 깨지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라고 폄하한다. 


에라스뮈스는 양쪽을 중재하기 위해 노력하나, 결국 향후 100년간 유럽을 휩쓸 피비린내 나는 유혈 사태를 막지는 못한다. 에라스뮈스는 관용적이고 지성이 풍부한 인문학자나, 루터는 독일제후 등 정치세력의 지원을 받았던 열정적 신앙의 수도사였다. 


루터는 에라스뮈스의 우유부단함을 성토하면서 동시에 당시 독일 농민계급을 대변한 뮌처에게도 적대적 자세를 보인다. 루터와 뮌처는 고리대금과 면죄부가 죄악이며, 독일이 로마교황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데는 생각을 같이 했다.  


그런데 당시 농민들이, 루터로 인해 지금까지 신성불가침으로 여긴 교황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걸 목격하고는 영주나 국왕 등 독일 제후의 권위도 우습게 보기 시작한다. 뮌처를 지지한 농민들은 제후를 옹호했던 루터를 조롱하고 위협했다.


이에 루터는 뮌처가 주도한 농민반란을 증오하고, 농민을 미친개와 같이 타살해야 한다며, 심지어 귀족들에게 농민을 학살하면 천당에 갈 것이라고까지 진언한다. 루터가 생각하기엔  에라스뮈스는 너무 온건해서, 뮌처는 너무 과격해서 둘 다 싫었던 셈이다.   


루터가 보기에 당대 최고의 지성인 에라스뮈스는 절충적이며 회의주의자로 보였을 것이다. 굳이 루터의 생각이 아니더라도 지성, 관용, 인문정신은 학자들의 고귀한 덕목들임에도 그것이 현실과 부딪치지 않으면 사념으로 끝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일제 말 최재서라는 문학비평가가 있다. 선구적 영문학자이기도 한 그는 문학이 행동의 도구로 작동해야 한다는 프로문학 비평가들과 달리, 문학은 행동의 구속을 벗어나 지성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비평가의 교양, 지성 같은 인문정신은 세련된 단계를 거쳐 형성되며, 지식인은 행동보단 비판적 합리성을 소유해야 한다고 봤다. 지성은 ‘비행동의 행동’이다. 늘 행동을 부정적으로 보고 지성을 강조하며 현실과 거리를 뒀던 최재서는 결국 파시즘에 투항, 친일의 길을 걷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