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1936)은 고등국어 교과서뿐 아니라, 한때 대학국어 교과서의 총아였다. 이효석 문학은 무욕의 자연에 대한 동경을 드러내고, 이것이 서정적인 문체로 채색돼 독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데, 「메밀꽃 필 무렵」은 바로 이를 대표한다.
그러나 「메밀꽃 필 무렵」은 ‘소설 장르’로서 볼 땐 결함이 많은 소설이다. 주제도 그렇고 특히 구성(플롯)이 빈곤한데 이러한 결함을 기교와 시적인 단일 효과로 카버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소설이라기보다는 낭만적인 동화 한 편을 읽었다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럼에도 ‘교과서적 인습’이라 할까 모든 교과서에는 이효석 하면 「메밀꽃 필 무렵」이 무조건적으로 실린다. 여기서 교과서적 인습이란 교과서가 진취적 연구 결과와 관계없이 이미 잘 알려진 글이나 사실을 모아 놓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메밀꽃 필 무렵」 대신 「산협」(1941)을 이효석의 대표작으로 삼자는 주장도 있다. 「산협」은, 이효석이 서른여섯의 나이로 죽기 바로 일 년 전 발표됐다. 소설로서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산협」이 발표되기 바로 전 해에는 이효석의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그런 탓인지 「산협」은 「메밀꽃 필 무렵」에 비해 작가로서의 원숙기적 면모를 보여 주며 세상살이의 도저한 허무감도 짙게 배어 있다. 나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잘 알려진 「메밀꽃 필 무렵」 대신, 「산협」을 읽고는 했다.
그런데 학생들 반응은 영 시원치 않았다. 학생들은 「메밀꽃 필 무렵」이 역시 괜찮은 작품이라 생각하고, 「산협」에 대해서는 대부분들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특히 이 작품에 드러난 근친상간의 내용을 불쾌해했고, 그래서 ‘막장 드라마’ 같다고 평하기까지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산협」의 주인공 공재도는 평창 산골의 부농으로 그 세가 당당하나, 재산을 물려줄 자식이 없어 애타한다. 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삼고 싶어도 마음이 놓이지 않고, 성이 다른 조카한테 물려주는 것 역시 내키지 않아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자식을 보려고 한다.
문제는 공재도가 생산을 할 수 없는 남자라는 점이다. 재도는 그도 모르고 아내를 둘소(새끼 못 낳는 암소)라고 타박한다. 그는 원주를 가서, 소를 팔아 대장장이의 젊은 색시 ‘원주집’을 아내로 데려 온다. 대장장이는 소를 갖고 싶은 욕심에 아내를 재도에게 팔아넘긴 것이다.
그러나 아들을 낳기 위한 재도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터, 원주집이 아이를 낳지만 그 아이는 전 남편인 대장장이의 애였다. 재도의 아내가 월정사를 가서 백일불공을 드리고 뜻밖에 아기를 갖지만, 그 아이는 아내가 시조카와 관계해서 낳은 자식임을 알게 된다.
「산협」에서 주인공의 세속적 욕망은 결국 허망한 것으로 끝난다. 대충의 줄거리만 들어도 학생들이 시큰둥해할 만도 하다. 그럼에도 「산협」은 인간의 욕망과 대비되는 무욕의 자연으로 독자들을 이끌어, 허망한 욕망 끝에 갖게 되는 묘한 안식과 달콤함을 느끼게도 한다.
문제는 근친상간의 모티프다. 사실 「메밀꽃 필 무렵」에도 봉평 장터의 주모 ‘충주집’을 두고 장돌뱅이 허생원과 그의 아들이 갈등을 벌이는 장면이 살짝 나온다. 이효석의 죽은 어머니의 고향이 ‘충주’라는 얘기도 있으니, 이 역시 작가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투영된 것인가?
이효석의 「개살구」(1937)에서는 아버지의 첩을 두고 부자간 갈등이 일어난다. 학생들에게 「산협」에 나타난 근친상간의 욕망 등 인간 세상의 들끓는 욕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학생들은 인간의 욕망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또는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문학이 욕망에 대한 도덕적 설교를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과도한 욕망은 버리라고 훈계하지만, ‘절제할 수 있는 욕망’은 이미 욕망이 아니다. 문학은 인간의 다양한 욕망, 때론 도덕과 인습의 선을 넘는 욕망을 그리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여러 질문을 던진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파시」(1964)라는 작품에서 욕망이 가장 극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금기를 넘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욕망은 인간의 잔악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의 진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어찌 보면 욕망과 욕망이 가져오는 죄의 비극성은 어쩔 수 없는 인간존재의 비극성을 말해준다. 인간존재의 유한성, 유약성, 오류가능성은 인간의 한계조건이면서 아울러 인간성의 조건이자 행복의 조건이기도 하다. 우리가 윤리나 도덕만이 아닌 문학을 읽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