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고 취준

졸업 후 7개월 동안의 흐름과 변화

by mill

지난 2월 겨울 졸업 이후, 어느덧 가을이 찾아왔다. 26살이 되기 전까지 직업적 고민을 하지 말라던 아빠의 말 따라 나는 '취준'이 아닌 '자아 탐구'의 시간을 가졌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림을 실컷 그렸다. 하지만 지난 8월부터 본격적인 구직 상태인데 쉽지 않다. 이 글을 통해 그 변화의 맥락을 잡고, 이야기를 공유해보고 싶다.



디지털콘텐츠학과를 전공한 나는 그래픽 디자인으로 포스터도 만들고 한두 번 외주 일도 해가며 학부 시절을 나름 알차게 보냈지만, 정작 졸업 작품은 2D 애니메이션을 했었다. 역시 '졸작 = 취준'으로 사고하지 않은 덕분에 할 수 있던 일이었다. 서툴지만 2분가량의 필름을 만든다는 게 참으로 설렜고, 졸업 이후에도 계속 공부해 보고 싶어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고 작품을 기획하며 봄을 지났다.


38.png 2025년 여성의 날을 기념하여


절대적 시간을 그림에 많이 쓰니, 없던 그림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눈을 뜨는 게 설렐 정도로 몰입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지원한 공모 사업은 줄줄이 떨어지고 자신감은 낮아져 갔다. 결국엔 내가 그리는 그림이 내 그림 같지 않다고 느꼈다. 개성이 없고, 남들이 좋아할 거 같은 - 팔릴 것 같은 그림들을 그리고 있는 거 같았다.

제목_없는_아트워크.png 멈추기 직전의 그림. 스타일의 큰 변화가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저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그림으로 무언가를 '성취'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나를 위한 그림'이 아닌 '남들이 좋아할 그림'을 그려야 했다. 더 귀엽고 아기자기하고 아리송한 그런 그림들.. 물론 그런 그림을 그려 사랑을 받으면 행복하지만, 스스로 개성을 쌓고 있진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림', '애니메이션'으로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은 너무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림으로 당장 대학원을 갈건 아니었고, 애니메이션 산업에 종사하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아니었기에 나는 무작정 갤러리 채용 공고창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경기 아트센터 뉴미디어 방송국 계약직 공고문을 보게 되었고, 그곳에 지원하면서 본격적인 취준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곳에 지원하면서-'인 이유는 면접까지 갔지만, 최종적으로 불합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졸업 후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에 대해 치열히 고민하며 하나둘씩 조잡한 잔가지들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만약 그러한 좌절이 없었더라면, 내가 무얼 하고 싶은지 어느 곳에 가고 싶은지 머리 싸매고 고민할 이유도 없었겠지? 참 감사하다.


'그래픽 디자인'이란 넓은 판에서 획을 그었다. 뷰티 업계 BX, 제품, 웹 디자인 쪽으로. 마케팅 포지션도 간간히 찔러보고 있는 건 꼭 디자인으로 커리어를 쌓진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이다. 개인 프로젝트, 외주 작업을 쫌 쫌 따리 한다면 마케팅 인턴이나 계약직으로 시작하는 것도 디자인 업무에 긍정적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개인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프리랜서 등록도 해야 한다.


ㅈㄷ.png 어제 마무리한 그림
취준생도 그림을 그린다.


사실 오는 27일 작은 행사장에 내 그림을 굿즈로 팔 기회가 주어져 그려야 했다. 하지만 두 달 정도를 부지런히 그리지 않았기에 다시 시작하는 건 진-짜 어려운 일이었다. 무뎌진 손과 떠오르지 않는 영감 때문에 패드 앞에 몇 시간씩 앉아 있어도, 도통 마음에 드는 그림은 안 나오고 계속 옛날 그림을 보며 감탄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어제 드디어 굿즈 하나 그림을 마무리하고 발주를 넣었다. 아직 하나의 남은 굿즈가 있지만, 그건 제작 기간이 다소 짧은 편이라 그래도 마음이 조금 놓인다. 지금은 뷰티 업계의 디자이너로 취업하고 싶지만 우선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러면서 다시,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가시화하는 고통스럽지만 재미있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9월 27일 하자센터에서 진행하는 '최초 공개' 플리 마켓 혹 시간이 된다면 참여해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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