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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세 Dec 24. 2015

1988년의 되새김(1) - 다이하드

크리스마스에 볼만한 최고의 영화를 꼽으라면 단연 '다이하드'라고 전해라

요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장안의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당시의 풋풋한 추억들이 정교하게 재현된 세트와 배우들의 의상 그리고 당시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OST등이 맞물려 또 다시 '응답하라 신드롬'이 불고 있다.


나에게도 1988년은 늘 좋은 기억으로 자리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중학생이 된 나에게 부모님께서 친구들과 함께 부모님 동행 없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볼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한 첫 해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나의 문화생활의 새로운 패턴이 형성되었다. 그 해 대한민국 사회는 여러모로 새로운 패턴들이 형성되고 있었다. 


1971년 대통령 선거 이후 처음으로 체육관이 아닌 투표소를 통해 선출한 대한민국 최고 통치권자의 임기가 시작되었고,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면서 대통령 선거 패배로 주춤했던 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파워가 부활하고 새로운 '3김 시대'가 개막되었다. 그 동안 인위적으로 파워가 형성되었던 여당의 힘이 국민의 투표를 통해 세력이 주춤해졌고, 국민의 성원을 등에 업은 야권의 힘은 결국 지난 정권에 숨겨졌던 비리들을 파헤치기 위한 5공 청문회 개최로 귀결되었다. 청문회는 유년 시절의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대한민국이 그 동안 얼마나 거대한 통제의 족쇄에 갇혀 있었는지를 TV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었다. 청문회 개최는 대한민국 의회 민주주의 진일보에 가장 큰 지렛대 역할을 했다고 느껴진다. 이 청문회를 통해 변호사 출신의 초선 노무현 의원(통일민주당), 김동주 의원(통일민주당), 김광일 의원(통일민주당) 등이 철저한 준비와 예리한 질문 등을 통해 청문회 스타로 등극하기도 하였다 .


1988년 청문회를 통해 스타로 떠오른 노무현 의원 인터뷰 (1988.11.11 경향신문)


격변기의 1988년, 대한민국 건국이래 최대의 국제 이벤트가 펼쳐진다. 바로 1988년 서울올림픽이다. 분단 국가 대한민국에서 펼쳐진 서울올림픽은 역설적으로 동서 화합의 무대로 펼쳐졌다. 1980년 모스크바, 1984년 LA 올림픽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사건이라는 정치적 요인으로 인해 각각 서방과 동구권의 국가들이 불참한 반쪽짜리 대회로 개최되었다. 그러나 서울올림픽에서는 미국 국기도 소련 국기도 모두 볼 수 있었고, 당시로선 역사상 최대인 161개국이 참가하였다. 서울올림픽을 통해 형성된 동서 화해 모드는 당시 소련 서기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과감한 개혁정책과 맞물려 급기야는 이듬해 베를린 장벽 붕괴라는 역사적 사건에 일종의 촉매제 역할이 되기도 하였다. 


88올림픽 당시 금성 VTR 광고 - VTR은 당시 올림픽 열기와 더불어 최고의 히트 가전상품이었다.


서울올림픽 주제곡 '손에 손잡고'는 유럽에서 활동하던 한인그룹 코리아나가 불렀는데 세계적인 명 작곡가 조르지오 모러더의 웅장한 선율과 더불어 올림픽의 메시지를 가장 명확하게 전달한 역대 최고의 올림픽 주제곡으로 찬사를 받았다. 당시 TV만 켜면 이 노래가 울려퍼졌고 올림픽 이후 2~3년 동안은 송년 특별 프로그램에서 엔딩 부분에 출연자들이 다 함께 이 노래를 단골송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9월 24일 토요일에 펼쳐졌던 남자 육상 100m 결승전이었다. 당시 세기의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던 칼 루이스(미국)와 벤 존슨(캐나다) 중 과연 누가 승자가 될 것인가에 전 세계의 시선이 쏠렸다. 토요일이라 오전 수업만 있어서 수업을 마치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와 TV를 켜 보니 남자 육상 100m 결승 출발선상에 주자들이 출발을 알리는 총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숨죽이던 정적이 지나고 '탕'하는 소리와 함께 마치 경주마처럼 선수들이 온 힘을 다해 결승점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였다. 불과 10초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에 승패의 희비가 엇갈렸다. 결승점에 가장 먼저 골인한 선수는 벤 존슨이었다. 그것도 칼 루이스와 엄청난 격차를 유지하면서 말이다. 9초 79. 당시로선 경악을 금치 못할 세계 신기록이었다. 당시 세계 신기록이 9초 92였으니 벤 존슨의 기록은 가히 센세이션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 센세이션은 주말이 지나고서 약물의 힘을 빌린 것이었음이 밝혀지면서 세기의 맞대결은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스캔들로 마무리되었다. 도망치듯 공항을 빠져 나가던 벤 존슨은 이후 다시는 세계 육상의 중심에 복귀할 수 없었다. 


잠시나마 경이로웠던 9월 24일 토요일 오전 종로 3가의 단성사에서는 추석 특선 프로로 20세기 폭스 영화사와 사실상 전속관계를 맺은 태흥영화사가 수입한 헐리웃 영화 '다이하드'가 개봉되었다.


1987년 아놀드 슈왈츠네거 주연의 '프레데터'를  통해 전 세계 박스오피스에 존재감을 알린 존 맥티어난 감독이 연출하고 주연은 당시 국내팬들에게는 생소했던 브루스 윌리스가 맡았다. 하지만 브루스 윌리스는 당시만 하더라도 TV 시리즈 '문라이팅' (국내에서는 '블루문 특급'으로 방영됨)을 통해 미국에선 인지도가 나름 있었는데 '문라이팅'은 로맨틱 코미디 장르였다. 


당시 영화를 함께 보러간 친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으로 따지면 코미디언 이주일이 액션영화를 찍은 것과 같다'라는 것이 이 영화에 대한 유일한 사전 정보였다. 액션영화는 사실상 데뷔작이나 다름 없는 브루스 윌리스가 과연 얼마나 대단한 액션영화를 찍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다보니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거의 기대감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종로 3가 지하철 역 출구를 나와 단성사 앞에 도착하니 당시 평일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어서 적잖이 놀랐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당시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직후라 모처럼 평일 오후 일찍 시간을 내서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것인데, 평일 오후 나름 한가하게 볼 수 있다는 예상을 뛰어넘은 인파를 보고 영화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아내가 근무하는 LA의 나카토미 빌딩을 찾아간 뉴욕 경찰서 강력계 형사 존 맥클레인(브루스 윌리스)이 막상 아내의 근무처를 찾아 갔더니 아내가 맥클레인이란 이름도 사용하지 않고 홀리 제나로라는 이름만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언짢아 하면서 기러기 부부의 전형적인 불화가 극 초반부에 펼쳐진다. 


간략하게 주인공의 개인적인 갈등요소가 공개된 이후 영화는 나카토미 빌딩에 12명의 테러리스트가 잠입하면서 긴박하게 전개된다. 순식간에 빌딩은 아수라장이 되고 거대한 나카토미 빌딩은 순식간에 테러리스트들에게 접수된다. (일본 자본이 급속하게 미국을 잠식하던 1980년대 상황이 고스란히 묘사되고 영화 속에서 은연 중에 일본 자본에 대한 헐리웃으로 대표되는 미국 자본주의의 경계심이 '나카토미 빌딩'이라는 상징적인 공간을 통해 표출된다. 아마 요즘 제작되었다면 영화의 배경은 나카토미 빌딩이 아닌 중국 자본의 웨이 웡 빌딩 정도로 표현되지 않았을까 싶다.)


 홀로 파티장에 가지 않고 남아 있던 존 맥클레인 만이 사건 해결의 유일한 키를 쥐게 되고, 12명의 테러리스트들과의 본격적인 대결이 펼쳐진다. 이 때부터 다이하드는 기존 액션영화와 차별화된 공식 및 표현법을 따르게 된다. 당시만 해도 액션영화 하면 실베스터 스탤론, 아놀드 슈왈츠네거 등의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사내들이 자비없는 표정으로 근엄하게 악당들을 제거해나가는 것이 공식이었는데, 일단 존 맥클레인은 우락부락한 근육질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근엄하기는 커녕 긴박한 상황에서도 유머와 재치를 놓지 않는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 첫 번째 테러리스트를 제압한 다음 테러리스트 집단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 의자에 묶어 놓고 엘리베이터에 태우는 장면인데 거기에 쓰여진 'Ho Ho Ho'라는 메시지가 관객들을 속된 말로 '빵 터지게' 만든다.


혼자만의 힘으로 도저히 테러리스트를 상대하기 버거운지라 존 맥클레인은 우여곡절 끝에 근처를 순찰 다니던 LA 경찰서의 알 포웰과 접선에 성공한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전기가 두 사람을 연결시키고 목숨을 건 위태로운 상황에서 둘은 어느 새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사이로 발전하는데, 오직 액션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닌 남자 간의 우정, 버디 코드 삽입을 통해 영화의 감수성까지 높여주는 효과를 전달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쌓인 우정은 영화 종반부 결정적인 순간에 극적인 반전장치로 승화되면서 영화의 감동및 카타르시스를 두 배로 높여준다.



영화 '다이하드'의 매력은 이른바 가진 자들의 위선과 속물정신을 통렬하게 조롱하고 비판하는 코드이다. 상황 판단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힘만 믿고 무조건 빌딩으로 돌진하다가 테러리스트들에게 무참하게 역습을 당하는 무능한 FBI 요원들, 테러리스트들을 분석하기 위해 게스트로 등장한 심리전문가는 '스톡홀름 신드롬'을 아예 '헬싱키 신드롬'이라 얘기하고, 한술 더 떠 뉴스앵커는 헬싱키를 스웨덴의 수도라고 질문하다가 진행하던 PD에게 지적을 받는다. 이 장면에서 벌어지는 해프닝들은 관객들이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특종 잡기에 혈안이 되어있던 기자는 존 맥클레인 집에 거주하는 가정부의 약점(불법 취업비자)을 폭로하겠다는 비열함으로 맥클레인 집에 임의로 잠입하려 그의 딸과 인터뷰를 전국에 내보내는 바람에 테러리스트들에게 빌미를 제공한다. 결국 그 기자는 마지막 장면에서 홀리 제나로에게 회심의 카운터 펀치를 맞으면서 다운되는데 이 장면 또한 통쾌함을 극대화시킨다. 


위선과 속물정신의 백미는 다름 아닌 테러리스트들이다. 구 서독 테러집단 출신의 한스 그루버(앨런 릭맨)는 협상조건으로 복역 중인 자신의 동료 석방을 내건다. 그러나 이는 단지 나카토미 빌딩의 금고를 털기 위한 시간벌이용 연막 술수였음이 드러난다. 기존의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악역이라 할 수 있는데, 테러리스트라는 간판만 내걸었을 뿐 실은 금고를 털기 위한 좀도둑 집단이었다는 사실이 영화의 또 다른 반전 포인트이다.


죽도로 고생한 존 맥클레인은 결국 불가능해 보이던 1대 12의 싸움을 이기고 아내와 뜨거운 포옹을 하게 된다. 둘이 서로 담요를 덮고 호송차에 탑승하고 사연 많은 나카토미 빌딩을 떠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리는데 그 엔딩 크레딧에서 흘러나오는 캐롤송 'Let it snow'는 그 어떤 영화의 캐롤송보다 달콤하게 전달된다.


당시 영화를 보던 상영관에서 관객들은 존 맥클레인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소방호스를 묶고 빠져 나오는 기지를 발휘하는 장면과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열렬한 환호와 박수를 내보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순간 새로운 세계를 접한 희열이 온몸을 휘감았다. 당연히 영화의 입소문은 그 어떤 바이러스보다 훨씬 빠르게 퍼져 나갔고, 9월 24일 추석 특선 프로로 개봉한 '다이하드'는 그 해 연말을 관통하여 3월까지 상영되며 서울에서만 70만 관객을 모았다. (지금으로 따지면 전국 1,000만명 가까이 동원한 것과 비슷한 어마어마한 수치이다. 당시 서울관객 최고 기록이 1979년 '취권'이 기록한 89만명이었다.)


그 해 겨울 단성사 맞은 편 피카디리 극장에서 겨울방학 특선 프로로 당시로선 사상 최고의 수입금액 (200만불)을 들여 수입한 실베스터 스탤론 주연의 '람보3'로 맞불을 놓았으나 '다이하드' 열풍을 이겨내지 못하고 먼저 간판을 내렸다. 뒤를 이어 아놀드 슈왈츠네거 주연의 '레드히트'가 개봉했지만 역시나 '다이하드' 앞에서 꼬리를 내렸다. 1988년 겨울 극장가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당시 액션의 아이콘이었던 실베스터 스탤론과 아놀드 슈왈츠네거를 차례로 제압하는 이변이 일어나면서 이후 액션영화 패러다임의 대변환을 예고하였다.


'다이하드'의 선풍적인 인기에 힘입어 브루스 윌리스는 대한민국의 국민스타에 등극하였고, 이후 그가 출연한 영화들은 대부분 헐리웃보다 더 좋은 흥행성적을 기록하게 되는데, 그 배경에는 1988년 '다이하드'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그가 출연했던 TV 시리즈물 '문라이팅'은 이듬해 KBS 2TV에서 매주 월요일 밤 '블루문특급'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어 많은 인기를 모은다. Al Jarreau가 부른 감미로운 목소리의 주제곡 'Moonlighting'이 귓가를 맴돈다.


흔히들 크리스마스에 떠오르는 대표적인 영화로 2003년에 개봉했던 '러브 액츄얼리'를 떠올린다. 하지만 나는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다. "크리스마스의 기분을 제대로 만끽하고 싶다면 다이하드를 보라고 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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