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한국시리즈가 종료된지 어느 덧 한달이 흘러간다. 그 어느 시즌보다도 가장 싱거운 결말을 맞이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2018 KBO 리그는 정규시즌 2위팀 SK 와이번스의 업셋 우승으로 마무리되었다. 결과도 흥분될 만한 것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업셋의 과정이 극적인 드라마의 연속이었다. SK 와이번스는 넥센과의 플레이오프에서 시즌 종료 직전에 몰렸었다.
그러나 벼랑 끝에서 팀이 가장 내세울 수 있는 필살기(홈런)을 앞세워 역사상 가장 극적으로 한국시리즈 진출을 일구어냈다. 그 여세를 몰아 한국시리즈에서 올 시즌 적수가 없을 것으로 보였던 압도적인 1위팀 두산 베어스를 무너뜨리고 팀의 네 번째 우승을 거머쥐었다.
역대 한국시리즈에서 단일시즌이 시작된 이후 정규시즌 1위팀이 타이틀을 빼앗겼던 적은 다섯손가락에 꼽을 정도이다. 1992년 빙그레 (3위 롯데에게 1승 4패), 2001년 삼성 (3위 두산에게 2승 4패), 2015년 삼성 (3위 두산에게 1승 4패) 가 정규시즌 1위팀이 업셋을 허용한 전례들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나름 사연들이 있었다. 정규시즌 1위팀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치명적인 결함들이 내포되어 있었다. 2001년 한국시리즈 당시 삼성은 1선발 외인 투수 갈베스가 인센티브 계약에 대한 불만을 핑계로 팀을 이탈했고 뒤늦게 합류했지만 정규시즌과는 전혀 다른 투수가 되어 있었다. 2015년 삼성 또한 불법도박 스캔들로 인해 주축 투수 3명 (윤성환, 안지만, 임창용)이 한꺼번에 전력에서 제외되었다.
그나마 1992년 정규시즌 1위팀 빙그레 이글스는 별다른 전력 이탈은 없었다. 그러나 당시 팀 전력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에이스 송진우가 정규시즌에서 보여줬던 투구내용을 전혀 선보이지 못했다. 롯데는 당시 염종석, 박동희라는 강속구 우완투수들을 앞세워 정규시즌과 전혀 다른 성격의 단기전에서 팀 전력 이상의 잠재치를 끌어 올렸다.
이번 한국시리즈 업셋은 오히려 2000년 당시 현대와 두산의 매치업에 비견될 만하다. 당시 현대는 132경기 페넌트레이스에서 무려 91승을 올렸다. 올 시즌 두산이 거둔 144경기 93승보다 질적으로 훨씬 압도적인 수치였다. 하지만 두산은 당시 우즈, 심정수, 김동주라는 가공할만한 괴력의 타선을 앞세워 압도적인 우승팀 현대를 끝까지 괴롭혔다. 3패뒤 3연승이라는 기적을 창출하며 승부를 7차전까지 끌고 갔으나 마지막 뒤집기에서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러나 2000년 한국시리즈에서 발휘한 두산의 괴력은 이듬 해 한국시리즈 업셋 우승의 주춧돌을 놓아줬다. 올 시즌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어우두 (어차피 우승은 두산)'이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번졌다. 리그 최강의 원투펀치 린드블럼-후랭코프에 토종 최다승 투수 이용찬(15승), 그리고 김강률-함덕주로 이어지는 막강 불펜의 투수력에 외인 용병이 없어도 가공할 파워를 과시한 타선의 힘이 뒷받침했다. 무엇보다도 두산을 SK보다 우위에 놓았던 요소는 짜임새있는 수비 조직력이었다.
하지만 한국시리즈가 시작되면서 모든 계산은 어긋났다. 그리고 우리가 간과했던 부분도 잠재하고 있었다.
1. 정규시즌 93승에 가려진 허수
올 시즌 두산은 정규시즌에서 무려 93승을 거뒀다. 2위 SK와는 역사상 가장 큰 승차인 14.5게임이라는 압도적인 승차로 일찌감치 한국시리즈 티켓을 예약하였다. 그러나 93승을 팀 별 승수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2위 SK (8승) - 3위 한화 (8승) - 4위 넥센 (8승) - 5위 KIA (8승) - 6위 삼성 (12승) - 7위 롯데 (13승) - 8위 LG (15승) - 9위 kt (9승) - 10위 NC (12승) (정규시즌 순위 순)
위의 현황에서 보듯이 두산은 올 시즌 포스트시즌 진출팀을 상대로는 단 한 팀을 상대로도 우위를 기록하지 못했다. 4팀을 상대로 32승 밖에 거두지 못했다. 나머지 61승은 하위권 팀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수 마진을 기록한데서 얻어진 것이었다. 특히 한 지붕 두 가족 LG는 두산 정규시즌 1위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결국 포스트시즌이 펼쳐지면 두산은 어느 팀이 한국시리즈에 올라오더라도 절대 우위를 담보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만약 와일드카드나 준플레이오프부터 거쳐온 팀들을 맞이했다면 체력의 우위를 앞세워 한결 상대하기 우월했을 것이다.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 5차전을 치르고 그마저도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대역전극을 펼치면서 사기가 한껏 달아오른 SK를 한국시리즈에서 맞이한 것은 두산의 통합우승에 불길한 징조였음이 분명하다. 정규시즌 93승에 가려진 허수의 잠재력은 생각보다 파급효과가 더 컸었다.
2. 기싸움에서 한 수 접게 만든 1차전 1회초의 홈런
플레이오프에서 5차전까지 가는 대혈전을 치른 SK는 한국시리즈 1,2차전에서 원투펀치 김광현과 켈리를 내세울 수 없었다. 리그 최강의 원투펀치 린드블럼, 후랭코프를 상대로 박종훈, 문승원으로 상대하기에는 버거워 보였다.
그러나 SK타선은 저력이 있었다. 특히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극적인 끝내기 홈런을 터뜨렸던 한동민은 한국시리즈 1차전 1회초 첫 타석에서 기선을 제압하는 투런홈런을 작렬하면서 팀의 사기를 더욱 끌어올린다. 상대 투수가 올 시즌 가장 압도적인 투구력을 선보인 린드블럼이었다는 점에서 한동민의 홈런은 SK의 자신감을 더욱 끌어올리는 촉매제로 작용하였다.
두산으로선 믿었던 1선발 린드블럼이 상대에게 너무 쉽게 홈런을 허용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을만했다. 특히나 오랜 시간 실전을 쉬었던 야수들이 감각을 찾기도 전에 선제실점을 허용하면서 '어우두'라는 일종의 압박에 시달리던 선수들의 승부에 대한 부담감은 더욱 가중되는 역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3. 4번 타자와 용병 거포의 부재
두산은 올 시즌 빅리그 경험을 보유한 외야수 파레디스와 반 슬라이크를 영입했지만 전력에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용병들의 빈자리는 정규 시즌에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우즈 이후 20년 만에 탄생한 잠실 홈런왕 김재환을 필두로 오재일, 박건우, 최주환, 양의지 등이 맹타를 휘둘렀다. 특히 전역 후 뒤늦게 시즌에 합류한 외야수 정수빈은 용병급 활약을 펼치면서 베어스 타선의 화력을 배가시켰다.
그러나 한국시리즈에서 시즌 내내 도드러지지 않았던 약점들이 대거 악재로 작용하였다. 4번 타자 김재환은 훈련 중 입은 부상으로 인해 3차전부터 전력에서 제외되었다. 치명적인 공백이었다. 용병의 난 자리를 전혀 느껴지지 않게 만들었던 오재일과 박건우는 나란히 깊은 침묵의 늪에 빠져 들었다. 커리어 하이를 기록한 최주환이 타선을 하드캐리했지만 힘에 부쳤다.
반면 SK는 결정적인 순간에 용병타자 로맥과 4번 타자 최정이 승부에 영향을 미치는 홈런으로 승기를 가져오는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 특히 시리즈 내내 부진을 면치 못하던 4번 타자 최정은 승부가 두산 쪽으로 기울던 9회초 2사에서 2연속 삼진으로 한껏 기세를 올리던 상대 에이스 린드블럼을 상대로 극적인 동점홈런을 쏘아 올리면서 우승의 발판을 마련했다.
두산의 4번 타자와 용병거포의 부재는 양팀 타선 기싸움의 추를 SK쪽으로 기울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4. 돌아온 에이스 김광현
김광현은 신인이던 2007년 정규시즌에서 고작 3승 밖에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 해 한국시리즈 두산과의 4차전에서 선발투수라는 중책을 맡았다. 상대팀 선발은 22승을 올린 MVP 용병 다니엘 리오스. 1승 2패로 밀리고 있던 SK는 4차전을 내줄 경우 시리즈 전체의 흐름을 내줄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김광현은 자신이 왜 역대급 투수인가를 몸소 증명해냈다. 리오스와의 대결에서 전혀 위축되지 않고 시원하게 자신의 공을 뿌렸다. 예상치 못한 대승을 거둔 SK는 그 여세를 몰아 내리 5,6차전까지 따내면서 역대 한국시리즈 사상 처음으로 2패뒤 4연승 리버스 스윕을 달성한다.
11년 뒤 김광현은 UP & DOWN을 모두 겪어내면서 한층 성숙해져 있었다. 선수생명이 끝날 뻔한 위기도 겪었던 그는 팀의 철저한 관리 속에 150km의 강속구를 되찾았다. 13회말 그는 경기를 끝내기 위해 마운드에 올라섰다. 올 시즌 처음으로 이틀 휴식 뒤 마운드에 오른 김광현은 이를 악물고 혼신의 역투를 펼쳤다.
상대 타선 중 가장 위협적인 양의지를 상대로 154km의 강속구를 뿌리는 순간, 온 몸에 전율이 흐를 정도로 김광현의 파워피칭은 보는 이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다. 마지막 타자 박건우를 상대로 특유의 각도 큰 슬라이더로 헛스윙을 유도하는 순간, 그는 마운드 위에서 한껏 포효하였다. 에이스의 귀환을 확실하게 알리는 포효였다.
한물간 투수로 여겨졌던 김광현의 부활은 SK 마운드에 큰 힘을 불어넣었다.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일본 타선을 꽁공 얼려 놓았던 그 위력이 부활하는 모습을 보니 국내 투수의 카리스마 부재에 시달려온 KBO리그에 한줄기 희망이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한편으론 김광현의 뒤를 이를 대형 투수가 여전히 나타나지 않는 점도 여전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5. 숨은 MVP 김태훈
한국시리즈 MVP는 13회초 극적인 역전홈런을 터뜨린 한동민이 차지하였다. 플레이오프의 극적인 끝내기 홈런, 한국시리즈 1차전 첫 타석에서 기선제압 선제포, 그리고 마지막 6차전 역전포까지 많은 팬들의 기억에 오래오래 남을 만한 장면들을 잇달아 만들어낸 한동민은 MVP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이번 한국시리즈의 실질적인 일등공신은 다름 아닌 SK 불펜의 핵심 역할을 맡았던 좌완 투수 김태훈이었다.
90년생으로 2009년 입단 당시 많은 기대를 모았던 김태훈은 그 동안 기대치에 못 미치는 아쉬움을 던져왔다. 그러나 올 시즌을 앞두고 체중감량에 성공한 그는 한층 경쾌한 패턴으로 자신의 공의 위력을 배가시켰다.
직구와 슬라이더를 주로 사용하는 그는 이번 시리즈에서 등판할 때마다 상대 타선을 꽁꽁 묶었다. 특히 6차전 3-0에서 3-3으로 동점을 허용한 7회 구원 등판한 그는 위기 상황에서 상대 타자 박건우를 병살로 잡아내면서 승부의 추가 기울어지는 것을 막아냈다.
6차전에서 실점만 허용하지 않았다면 한국시리즈 MVP는 그의 몫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리즈 내내 확실한 마무리 부재에 시달렸던 SK 마운드에서 김태훈의 활약은 두산과의 마운드 경쟁에서 밀리지 않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였다.
이번 한국시리즈를 통해 자신의 진가를 과시한 김태훈은 신임 염경엽 감독에게 이미 내년시즌 주전 마무리 후보로 낙점받았다. 그의 진가가 얼마나 더 업그레이드 될지 기대된다.
2018 한국시리즈는 역대급 업셋으로 불리울만 하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역시 원인없는 결과는 절대 없음을 증명하였다. 체계적인 선수관리와 계산을 통해 팀의 장점을 극대화시킨 SK 와이번스는 내년 시즌 어떻게 더 업그레이드 될 것인지 관심이 모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