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무쌍 6개월
변화 속에서 살았던 상반기.
바닷속에 들어가 있어도 파도를 느낄 수 있듯이, 변화 속에 있으면서도 나에게 오는 변화를 또렷하게 마주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오랫동안 애정 가득 담아 근무했던 공공그라운드를 떠났고, 이직에 관한 생각과 작은 시도들이 있었다. 풀타임이 아니라 시간 단위로 움직이는 프리랜서로 일하고, 새롭게 시도하는 것과 그만두는 것, 조금 다르게 바꾸어 행동하는 것들이 나를 채우고 있다.
마음 놓고 쉬었던 5, 6월에는 더 느슨하게 지냈다. 친구들이 해준 말 덕분에 그동안 엄청나게 힘을 주고 살았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됐다. 말도 느려지고, 걸음도 느려지며 힘을 계속 빼는 생활이 이어진다. 확실히 조금 더 편안하고 조금 더 유연하다.
전체적으로 ‘이렇게 해봐야지!’하고 결심하는 시도는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애쓰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살았던 6개월. 약간의 카테고리를 두어 정리해보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2020년부터 3년간 공들여 빚었던 북토크 브랜드 <텍스트클럽>. 퇴사 직전까지 BI 정립을 위해 브랜드 가치와 방향성을 새로 정리했고, 디자이너 친구와 디자인 자산도 개발할 수 있었다. 조금 더 정돈된 브랜드로 만들 수 있어서 뿌듯했고, 한편으로는 내 새끼 두고 떠나는 것 같아 싱숭생숭하기도 했다.
올해 1월에는 출판사에서 먼저 행사 제안을 주시기도 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진행할 수는 없어서 아쉬웠다. 이외에도 그동안 파트너사로 참여해주셨던 출판사에 후보 도서 리스트를 요청드렸을 때에도 고심해서 큐레이션 해주셨던 게 기억에 남는다. 출판계 내에서 나름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했던 시점에 그만두게 되어 아쉽다.
만 4년을 근무했기 때문에 업무를 돌아보는 것도 오래 걸렸다. 또렷하던 기억들도 많이 사라졌고, 자료가 없는 것들도 있어서 까먹은 일도 많은 것 같다. 그래도 공공에서의 경험이 나를 엄청나게 달라지게 해 주었으므로 괴롭고 힘들었던 시간도 조금 미화된 것 같다.
퇴사할 무렵에는 그간 인연이 되었던 분들께 감사 메일을 보냈다. 함께 일했던 동료, 코워킹 스페이스의 회사 밖 동료들, 파트너사들... 답장을 기대하거나 예상하지 않았는데 따스함이 담긴 회신이 10% 넘게 돌아와 무척 놀랐다. 메일로, 문자로, 전화로 전해주신 마음 덕분에 무척 충전되었다.
이번 휴식 기간에는 조금 더 정식 프리랜서처럼 일을 받고 있다. 외주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나의 시간에 대한 비용은 어떤 기준으로 책정해야 하는지, 어떤 시스템으로 일해야 하는지 고민해볼 수 있었던 기회. 또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는데, 지난 업무나 사이드 프로젝트를 되짚어보며 ‘역시나 제너럴리스트’라고 정리했다. 경계가 뚜렷하지 않고, 영역을 마구 넘나들며 일해서 또렷한 장르가 없는 것이 특징이자 강점.
[컨설팅] 아주 드문 일이지만 커뮤니티 관련 자문 요청이 올 때가 있다. 올해 초에는 프립의 여러 사업 중 새로 런칭하는 브랜드의 커뮤니티 관점 전략에 대해 말씀드릴 기회가 있었다. 그동안 온, 오프라인 커뮤니티를 모두 경험하며 얻은 인사이트를 탈탈 털어 전해드렸다. 나에게 남은 노하우가 있긴 있을까 걱정했는데 말하고 나니 많아서 스스로 놀람.
[라이프컬러링 전시] 브랜드 내부 사정으로 잠정 중단되긴 했지만 즐겁게 진행했던 프로젝트. 얼마 전 런칭한 휴식 보드게임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전시로 구성했었다. 거의 모든 기획이 구체적으로 나와 디자인 작업을 시작할 수 있는 단계였다. 공간 안에 구현된 모습이 궁금했는데 너무 아쉬웠다.
전시 준비하는 동안 ‘요즘 ‘일’이라면 뭐든 싫다’고 말했던 적도 있었는데, 막상 업무를 볼 때는 즐거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얼마나 오프라인(공간)에서의 경험과 아이디어 디벨롭 과정을 좋아하는지 다시 깨달았다. 일이 싫은 게 아니라 다른 게 싫구나, 하는 발견도 있었다. 나에 대한 기대가 부담인데, 그 기대치는 스스로 만든다는 게 함정.
[외주 원고] 좋은 기회로 두 회사와 일하고 있다. 하나는 웹 게시판에 올라가는 기사형 콘텐츠, 하나는 널 위한 문화예술의 영상 스크립트. 널 위한 문화예술과는 공공일호 코워킹 스페이스에서 만나 꾸준히 느슨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내가 쓴 원고 중 '6월 이달의 문화예술'은 한 편 발행되었고, 7월편은 발행 대기 중. 글 쓰는 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게 기분 좋다. 내 원고로도 돈 벌어보고 싶다. '나도 진짜 작가가 되어야지'하는 결심을 하게 된다.
안식월이었던 2월과 퇴사 후 5, 6월에는 거의 매일 평균 2명의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정말 심각하게 많이. 도대체 얼마나 많이 만났는지 궁금해서 한번 세봤다. 압도적으로 약속이 많았던 6월에는 총 38명을 만났다. (38명이라니?!) 일 관련 미팅 제외하고, 5분 이상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을 기준으로 집계했고, '사람'이 기준이라 한 달 동안 여러 번 만난 사람은 1번으로 세었다. 1명을 여러 번 만나기도 했으니 약속 개수로 쳐도 엄청난 숫자다. 모임이 두어 번 있어서 숫자가 크긴 하지만, 그럼 나는 얼마나 바깥으로 돌아다닌 걸까?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들이나 완전히 처음 보는 사람들과의 소셜 다이닝까지 스펙트럼도 무척 넓었다. 다들 하는 일도, 일의 분야도, 직급과 연차도 달라 똑같이 '일'에 대해 말해도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다. 바리스타, 창업가, 컨설턴트, 디자이너, 심사역, 시인, 뮤지션, 마케터, 아나운서,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완전히 새로운 세계도 있었고, 그럴 때 서로의 일과 사고방식을 신기해하며 비교해봤다. 매일이 새로운 자극이라 매일매일이 다이나믹했다. 자극이 심하다고 느낄 때도 있긴 했지만 인풋이 많았던 만큼 나를 다각도에서 발견할 수 있었고, 세상과 사람을 이해하는 폭도 무척 넓어진 것 같다. 사람 공부를 했던 상반기라고 할 수 있겠다.
약속 말고 커피챗도 열심히 다녔다. 상반기 동안 총 6개의 회사와 이야기 나눌 수 있었다. 감사하게도 먼저 연락을 주시거나, 친구가 소개해주어 연결되었다. 커피챗에서도 다양한 일과 회사를 만났다. 덕분에 지금 시점의 내가 어떤 환경에서 어떤 일을 하는 게 좋을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다. 선택과 결정의 순간에는 항상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그런 괴로움은 대체로 잘 넘겨가고 있는 것 같다. 하반기가 기대되는 중.
작년에 만들어 14주 정도 진행했던 커뮤니티. 1월부터 4월까지 시즌 2 멤버를 모집해 <아티스트 웨이>를 한번 더 경험했다. 지난 시즌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멤버들에게 조금 더 유용한 가이드를 줄 수 있었고, 멤버들의 변화도 좀 더 유심히 지켜보며 코멘트했다. 상담사처럼 굴지 않으려고 굉장히 애썼고, 멤버들이 남겨준 후기가 좋아서 그래도 잘 운영했구나, 안도했다.
7월에는 모닝 페이지반을 새로 만들어 가볍게 운영하고 있다. 모닝 페이지를 혼자 꾸준히 쓰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느껴서 못쓰던 찰나, 지난 시즌 참여했던 고유가 혼자 쓰고 있다는 포스팅을 보고 뚝딱 세팅했다. 백수라 시간이 많아도 나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은 억지로 내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는 무척 도움이 된다.
데드라인 컴퍼니 친구들 덕분에 2018년부터 '나 책 낼 거다!!' 외치기만 했던 그림자책 초안 작업을 시작했다. 사실 중간에 모임이 흐지부지 되면서 마무리를 못했고, 그때부터 작업이 중단되었다. 혼자서 꾸준히 작업하기에는 동기와 에너지가 부족해 아직도 멈춰있는 작업. 이제 다시 작업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씩 생기고 있어서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면 어떨까 싶다. 올해 안에는 꼭 끝내고 싶다.
확진자가 미친 듯이 늘어나던 3월 중순, 열나는 코감기인 줄 알았던 게 코로나였다. 기침은 조금이었지만 축농증 증상으로 발전되려고 해서 식겁했고. 확진 직전 주말에는 내내 열이 많이 나서 혼자 앓느라 고생했다. 격리 기간이 얼마나 답답할지가 제일 걱정이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잘 지냈다. 많이 자고, 약속이 없어서 오히려 행복했던 시간. 대신 이후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몸의 피로감이나 무기력감이 심해 끌어올리는데 애먹고 있다. 나만 롱코비드 앓는 중.
공공그라운드는 3년 이상 재직한 직원을 위해 안식월 제도를 두고 있다. 오래 다닐 줄 몰랐을 때는 남 얘기 같았는데, 막상 안식월 휴가를 쓰니 기분이 묘했다. 아마 그룹사 직원 중에서는 안식월 휴가를 쓴 거의 유일한 직원이 아닐까 싶기도 했고. 약 3주 정도 쉬었는데 이때에도 사람들을 많이 만나 맛있는 것 좋은 것 잔뜩 경험하며 즐겁게 지냈다.
번아웃 때문에 많이 힘들었던 것은 3주 만에 나아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름 쉬는 시간을 잘 챙겨가며 일했는데, 아무래도 작년의 겸직이 너무 힘들었던 것 같다. 한 템포 쉬어간다는 사실이 마음을 느슨하게 해 주어 편안함의 감각을 일깨울 수 있었다. 휴식 너무 소중해.
[IFS 상담] 삶이 달라진 친구의 강력한 추천으로 1월부터 IFS 상담을 시작했다. 아직은 생소한 기법이지만 여태 4가지 이상의 상담 기법을 경험해본 입장에서는 궁극의 상담처럼 느껴진다. 신체화 증상이나 다른 병리적인 어려움이 있어서 받는 게 아니고, 스스로 버전업 하기 위해서 받고 있다. 어떤 상담이든지 궁극적 목적은 셀프 슈퍼비전이 가능한 상태가 되는 것이므로, 개인적으로는 이번 상담이 마지막처럼 느껴진다. 가장 마지막 관문에 와있다고 느낀다. 오래 걸릴 수 있다는 각오로 진행 중인데도 가끔은 매우 초조하다.
[트레바리] 말만 많이 듣던 트레바리도 새로 시작해 7월 기준 2개 시즌 경험 중. 피크닉 김범상 대표님이 리딩 하는 기획 클럽에 들어가 있다. 두 시즌에 서로 다른 직군/분야의 사람들이 멤버로 참여해 이야기가 다채롭다. 함께 읽는 책 목록에 스스로 읽을법한 책이 별로 없는 점도 좋다. 읽을 때는 괴롭지만 바운더리를 깨는 느낌은 좋다.
[피아노] 6월부터는 십몇 년 만에 피아노도 다시 치고 있다. 한참 칠 때는 6년 정도 꾸준히 레슨 받아서 코드도 다 알고 재즈도 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음표 읽는 것부터 챌린지. 내 손이 마음 같지 않아서 자꾸 급하게 움직이고, 제대로 못 치는 내가 답답하다. 그래도 악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너무 즐겁다. 다시 이런 감각을 얻게 되어서 기쁘다.
[PT] 체력을 좀 더 올리고 싶어서 1년 반 정도 했던 필라테스 대신 PT를 시작했다. 30분만 하는 짧은 PT인데도 너무너무너무 힘들다. 그동안 쓰지 않았던 큰 근육과 해보지 않았던 동작으로 내 몸이 얼마나 종잇장 같은지 느끼고 있다. 운동 다녀오면 바로 20-30분 정도 자는데 잠을 못 자고 돌아다닌 날에는 거의 갓 태어난 송아지 수준. 이제 막 5번을 넘겼지만 아직도 힘들다. 다들 웨이트 어떻게 하는 거지.
나에게 중요한 키워드인 #공간, #미식, #예술은 상반기 휴식 기간 동안 꽤 많이 경험했다. 다 적을 수 없어서 올 상반기에 새롭게 만나게 된 것 중 강렬했던 몇 개만 골라 기록해둔다 (그래도 많다.)
- 공간: 내추럴리 내추럴, 국립민속박물관 파주 수장고, 서울식물원, 혜하우스, LCDC, XXPRESS, 포셋
- 숙박: 코사이어티 제주, 양양 욜스테이
- 미식: 황금콩밭, 회현식당, 진작카키, 일쩜오 닭갈비, 키친 갈매기
- 카페: 카페 손, 블루보틀 제주, 데어 스툴, 프로토콜 로스터스
- 바: 마세, 바 키안
- 공연: <소설극장>
-전시: <미지에서 온 소식>, <MMCA 올해의 작가상>, <사울 레이터>, 아라리오 뮤지엄 제주 상설전, <나너의 기억>, <모션 라인>
-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녹색광선>, <헤어질 결심>
상반기 회고를 적으면 '하반기에는 이렇게 살아야지!'가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다. 별생각 없이 사는 게 제일 좋은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계속 건강하게, 나답게 살고 싶으니 그 방향으로 살게 되지 않을까. 내가 나를 더 나은 방향에 갖다둘 수 있도록,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도록 경계하며 잘 살아있어야지.
하반기에는 (아마도) 풀타임 직장에 들어가지 않을까 싶은데, 최대한 나에게 잘 맞는 업무를 최상의 환경에서 해보고 싶다. 나를 갈아 넣지 않고도 풀파워를 내면서 눈부시게 성장하고 싶다. 그래서 다음 직장은 환경과 조직문화, 함께 일할 동료를 기준으로 찾고 있다. 연봉도 물론 중요. 돈기부여와 금융 치료 중요하죠.
하고 싶은 것들을 주저하지 않으면서 하나씩 해나가는 에너지도 조금은 더 돌아왔으면. 백수인 듯 아닌 듯 지내면서 제일 어려운 점은 아무래도 돈에 대한 걱정이다. 돈 생각에 하고 싶은 게 생겨도 주저하거나 포기해버려서 속상했었다. 그래도 투자한다고 마음먹고 결제하면 투자한 만큼 돈이 벌려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조금 하기 싫네요!' 외치고 열심히 일했지. 아직 일이 싫은데 괜찮고 또 하고 싶다가도 다 귀찮다.
하반기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뭐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제일 바라는 건 좋은 사람들과 보내는 행복한 시간이다. 무엇보다도 항상 편안하고 안전했으면 좋겠다. 불편함을 견디거나 맞춰버리기보다는 편안 쪽으로 옮겨올 수 있게 잘 말하고 싶다. 사람들에게 사랑 많이 받고 싶고 내 사랑도 아낌없이 주고 싶다. 회고하면 항상 사랑받고 사랑할 결심뿐이네. 하반기도 잘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