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개다리소반Ⅰ
한국을 떠나온 지 18년이 되었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왔는데 살다 보니 이리되었습니다. 딸을 떠나보낸 엄마에게 그 시간은 소포를 싸고 부치고, 또 싸고 부치고… 딸에게 보내고픈 무언가를 쉬지 않고 그러모은 시간들이었을 것 같습니다.
맛난 것을 입에 넣어 드려도 모자랄 판에 늘 손이 가는 못난 딸입니다. 엄마의 소포 상자 안에는 없는 게 없습니다. 정성껏 말린 시래기, 된장에 박아 놓았던 장아찌, 태양초를 빻아 만든 고춧가루, 거기에… 널찍하게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박하지. 염치도 없이 침이 고입니다.
간밤 꿈이 뒤숭숭해 전화 한번 해 보려다 그만두었다. 꿈 얘기를 늘어놓으면 미신이라며 피식 웃겠지만 ‘자식 걱정 끝이 없다’는 옛 말 그른 게 하나 없더구나. 바람 불면 바람이 불어서, 맑으면 언제 흐릴까 싶어서.
매사에 노심초사하게 되는 게, 엄마도 별 수 없이 늙어가나 보다.
권서방도 아이들도 모두 잘 있는 거지? 코로나로 이런 세상이 올 줄 누가 알았겠냐만 어쩌겠니.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수밖에. 물 좋은 박하지를 고대하며 역 앞 새벽 시장을 몇 번 다녀왔는지 모른다. 추적추적 비 내리던 날도 그다음 날도 허탕을 쳤는데, 오늘 겁 없이 덤벼드는 팔팔한 박하지를 만났지 뭐니. 단단하고 묵직한 놈들로 쟁여 왔단다
모든 먹거리가 그렇지만 박하지 역시 신선함이 생명이지. 요 녀석을 손질할 때는 애를 좀 먹는단다. 성격이 난폭해서 한번 물리면 아픈 건 둘째 치고, 떼어 놓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거든. 이제는 요령이 생겨서 목장갑 두 장을 끼고 닦지.
등껍질과 다리가 이어지는 부분은 뻘이 많아서 솔로 하나하나 깨끗이 씻어야 해. 한바탕 씨름을 하고 나서 마늘, 청양고추, 매실 엑기스, 간장을 한데 넣어 팔팔 끓인 후 식혀 박하지에 부어 놓고 까무룩 잠이 들었어.
박하지가 없어서 빈 손으로 돌아올 때는 힘이 쭉 빠지는 게 피곤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녀석들이 고맙기만 하다. 옹기종기 모여서 박하지를 들고 쪽쪽 빨아댈 우리 똥강아지들을 생각하니 함께 밥을 먹는 듯 금세 배가 불러온다. 게딱지를 따내 그 속 내장에 밥을 넣어 슥슥 비벼 먹으면, 고소롬한 것이 지리한 여름도 어찌어찌 견딜 만할 거다.
집게발은 칼등으로 두드려 먹어야 하는 거 알지? 지난번처럼 귀찮다고 이로 씹어서는 안 돼. 큰일 날 뻔했잖니. 펜치나 망치도 좋으니 꼭 깨서 먹도록 하거라. 너무 딱딱하고 크기가 작아서 먹기 불편하기도 하겠다만, 젓가락으로 쏙쏙 파내서 버리는 살 없이 잘 발라 먹어. 남은 간장에도 밥 넣어 싹싹 비벼 먹는다는 나영이를 생각하면 만들면서도 자꾸 웃음만 나와. 그 어린 게 무슨 맛을 안다고….
코로나 때문에 소포를 보낼 수 없다는 우체국 직원 말에 맥이 탁 풀려 버렸다. 한국 일본을 오가는 EMS가 이렇게 막혀 버릴 줄 누가 알았겠니. 지금 보내야 맞춤하게 익어 맛있을 텐데, 시간 지나면 짜져서 맛이 없는데… 안에 있는 마늘이랑 호박, 참외는 어쩌고. 속상했던 그때 마음을 말로 풀어낼 재간이 없구나.
우리 딸은 처음 박하지 먹던 날을 기억하고 있을까.
겨울 방학이 끝날 즈음 친척 집에 머물다 온 네가 먹고 싶다는 음식이 있었지. 비싸기도 비싼 꽃게인 데다가 여덟 살 조무래기가 하는 소리라 그냥 귓등으로 흘렸는데, 며칠을 조르는 통에 꽃게 대신 박하지를 저녁 상에 올렸어.
‘살 거 아니면 그만 가든지’ 꽃게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엄마를 보다 못한 가게 아저씨가 퉁을 놓더구나. 그제야 엄마는 박하지를 집었단다. 헌데 살을 발라 수저 위에 올려 줘도, 게딱지에 밥을 비벼 줘도, 먹었던 거랑 다르다며 너는 꿈쩍도 하지 않았어. “이게 아니야! 더 크고 살도 더 많고, 색깔도 더 예뻐”
옆에 있던 오빠가 다 먹어버릴 기세로 세 번째 박하지를 들었을 때 포기한 듯 젓가락을 들었지. 꽃게를 사주기 힘든 형편이기도 했지만, 샀다 손 쳐도 작은 아빠네처럼 배불리 먹기는 힘들었을 거야. 박하지는 사시사철 나는 덕분에 가격이 넉넉해서 먹다 아쉬울 일은 없잖니.
엄마 손에 스친 그릇이 엎어져 네가 아껴 입던 블라우스가 간장 범벅이 된 적도 있었지. 그때 넌 다시 사놓으라며 악을 썼어. 박하지를 만들 때면 서럽게 울던 네가 떠올라. 오빠에게 물려받지 않은 예쁜 옷이 입고 싶었을 텐데, 왜 그렇게까지 억척스럽게 살아야 했을까 가끔 후회도 해 본다.
씻다가 떨어진 다리 하나 맛보고는 전부 얼려 놓았어. 오늘 부치려 한다.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이야기 하렴. 몸에 좋은 마른 나물이랑 고추 부각, 도토리묵 가루, 여름에 먹기 좋은 미숫가루도 함께 보내 줄게.
네가 젖을 빨 때… 옆에서 오빠는 안아 달라고 칭얼대지, 뱃속에는 민규가 있어서 시도 때도 없이 토악질이 나지. 나도 모르게 주르르 눈물이 흐르던 때도 꽤나 있었는데, 돌이켜 보니 모든 게 그립다.
올 초에 다녀갔으니 내년이나 되어야 오겠구나. 일본도 코로나가 좀 진정돼 다행이야. 권서방도 출근하고, 아이들도 이제는 학교에 간다고 했지. 3개월 동안 고생 많았다. 혼자 있다고 끼니 거르면 안 돼. 박하지, 크고 알 배긴 놈으로 골라서 같이 먹어. 언제든 또 보내 줄테니까 아끼지 말고.
보고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