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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냉수 Jul 17. 2020

어른 흉내

호기심 많던 소녀를 기억하며

   그때 저는 '순진한 여고생'이었노라며 글을 시작하려니, 그날 일어났던 사건 자체가 공부하는 학생이 겪게 되는 일들과는 사뭇 달라 주저하게 됩니다. 어찌 됐거나 세상사 모르는 철부지였던 것만은 사실이었습니다.




  귀 밑 2cm 단발이 교칙이었고, 미팅은 날라리들이나 하는 부정한 짓거리로 세뇌되던 그 시절. 피 끓는 청춘들은 어김없이 일탈을 꿈꾸었습니다. 근사하게만 보이던 가수 소방차의 부푼 승마 바지, 학생 주임에게 걸릴까 조마조마했던 핀컬 파마. 거기에 하나 더 성인 영화관이 있었습니다.

 

   삼류 극장, 동시 상영관 등으로 불리던 그곳은 코털 시커먼 남학생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습니다. 또래의 여학생에게도 똑같은 호기심과 궁금증을 불러내는, 한 번쯤은 쳐들어 가보고 싶은 어른들의 소굴이었던 것입니다.

 

   "그래! 좋은 생각이야!"
  의기투합한 여고생 네 명은 경험이 있는 친구를 가이드 삼아 삼류 영화관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심 양은 '여대생처럼 보이겠다'며 찔렀던 핀을 풀어 앞머리를 내렸지만, 제가 보기엔 그게 그거였습니다.

 

   역시나… 포스터부터 달랐습니다. 그 안엔 정말 우리가 모르고 있던 어른들만의 비밀이 꿍쳐 있을 듯싶었습니다. 더불어 그 비밀을 훔쳐보면 단박에 어른이 되고 또래들과는 차원이 다른 숙녀가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가슴이 부풀었습니다.

 

   혹시나 걸릴 것을 대비해 말발이 제일 센 김양이 선봉에 섰습니다. 가슴이 방망이질치고 두려움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나를 믿으라'는 친구의 말대로 아무런 제재 없이 칙칙한 영화관의 귀퉁이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야! 우리 어른처럼 보이나 봐. 여대생인 줄 알았나 봐!.”  

졸아 들었던 가슴이 환호성으로 펴졌습니다. 학교에서 신던 나이키 슬리퍼를 그대로 신고, 도시락 가방까지 든 여고생들은 자기들이 여대생처럼 보였다며 좋아라 했습니다.




   “야, 너 고등학생이지? ”

  불이 꺼지고 광고가 돌아가기 시작했을 때 난데없이 나타난 아저씨가 김 양을 지목했습니다. 돌발 상황에 평소 선생님께 대들던 김 양의 대찬 말발도 콱 막혀버렸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며 끌려가는 친구를 보며, 우리는 그녀의 키가 제일 작았기 때문에 걸렸을 거라고 서로 위로했습니다.


  '달변가' 김 양이 제 실력을 발휘해 위기를 모면하고 무사히 돌아와, 더 이상 파문이 일지 않길 바랐습니다. 잠시 후 비상구 쪽으로 올라오는 그녀가 보였습니다. 고문(?)을 받았는지 몹시 창백한 얼굴이었습니다. “아저씨가 너네들 다 오래. ”


   올 것이 왔습니다. 우리는 파르르 떨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1층 화장실 앞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갔습니다.

 

  가방 안에서 X여고 학생증이 나오자 대학생이라고 우기던 심모 양은 다른 곳을 보는 척했습니다. 겁 많은 저의 머리엔 미친개라 불리는 학생 주임의 얼굴과 교무실에 앉아 흐느끼고 있는 엄마의 얼굴이 교차되고 있었습니다. 경찰서에도 가는 건가, 신문에도 나오는 건가.

「땡땡이친 여고생 4인,  벌건 대낮에 삼류 극장 탈선!」

 

“지금 연락 왔는데 YWCA에서 조사 나온다 하거든, 내일 다시 와라. 첫 프로 10시부터야.” 아저씨는 인자한 손길로 표를 한 장씩 한 장씩 나눠 주셨습니다. 이 표를 받아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아저씨는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단발머리들은 무척 어정쩡한 자세로 몸 둘 곳을 몰라했습니다. ‘걸린 게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보다는 이해할 수 없는,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이 상황을 해석하느라, 머릿속이 엉켜버렸습니다.

 

   그러고 보면 역시 우린 여대생처럼 보였던 게 아니라 삼류 극장의 시스템이 애당초 그렇게 생겨 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알 수 없는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영화관에서 나온 우리는 왠지 서로 머쓱했습니다.

  “경찰서에 고발해야 하는 거 아냐?” 한 친구가 어깃장을 놓았지만, 한동안 대화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모두들 뜻하지 않게 맛 본 어른들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어하는 눈치였습니다.

 

   표를 끊을 때만 해도 분명 미지를 개척하는 당당한 모험가의 기분이었는데, 밖에 나오니 햇살이 너무 밝아 포스터의 여주인공처럼 발가벗은 심정이 됐습니다. 그날 소녀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멈추었습니다.

 

   없는 용돈을 쪼개 커피숍에 앉아 파르페 먹던 짓을 그만뒀으며, 학교 사물함에 넣어 놓았던 엄마 립스틱을 제자리에 갖다 놓았고, '여대생들은 이런 가방을 든다'며 가지고 다니던 가죽 가방 대신, 입학식 날 들었던 책가방을 다시 꺼냈습니다.

  삼류 영화 대신 본 어른들의 세계를 소녀는 더 이상은 흉내 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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