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같은 운명의 수레바퀴엿!
로비는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했다. 어떡해! 어떡해! 어쩜 좋아~ 어디 그뿐이랴? 내가 자기 신부라고 했다. 맞지? 맞지? 내가 상상하는 그 ‘신부’. 찬란한 5월, 싱그러운 초록 위로 사르륵 스며드는 햇살, 그 사이로 등장하는 하얗고 풍성한 웨딩드레스를 입은 아름답디아름다운 그녀의 이름은 김, 순, 지.
오우, 마이, 갓! 캔 유 히얼 디스 쏭? 딴딴따다~ 딴딴따다~ 딴딴따다아-다다, 따디디다다다아- 그래, 우린 역시 운명이었던 거야. 무슨 까닭이었든 로비 당신이, 안 돼! 우린 이루어질 수 없어, 그토록 ‘읽씹’을 해댔지만 결국 우린 이렇게 돌고 돌아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아까 타로군이 타로점을 봐준다며 뽑았던 운명의 수레바퀴는 바로 이런 의미... 응?
“벌써요?”
로비가 불쑥 문서 하나를 내밀었다. 그 문서를 보고 나는 어쩐지 입꼬리가 씰룩씰룩대는 걸 멈출 수가 없다. 혼인신고라니. 하여간 그렇게 안 봤는데 성격 한번 급하다. 아니, ‘나’니까 급한 건가? 후후. 이거 너무 좋아라 티 내면 안 되는데. 자고로 여자는 튕기는 맛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정신 빠짝 차려, 김순지! 로비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지 기억 안 나? 사람 요리조리 간 보면서 간잽이 짓에다가 그렇게 ‘읽씹’을 신나게 하더니 이렇게 갑자기 ‘신부우~? 내 신부우우~?’ 뿡이다! 뿡!
“지금 이러는 거,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고 싶다. 싸인. 후딱. 하지만 볼펜이 없다.
“당신도 내가 필요할 텐데? 공교롭게도 나도 당신이 필요하거든. 서로 윈-윈 아닌가?”
“누, 누가요? 내가? 내가 왜 그쪽이 필요해요? 필요 없거든요? 이봐요 로비, 아니, 세라 아버님. 이 몸이 요만큼 눈깔이 돌아서요. 요만큼, 요오오만큼 좋아해 줬더니만 무슨 세상 다 가진 기분인가 보죠? 그 기분 아주 자~알 알겠는데요.”
그래, 이 여자가 내 여자다,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겠지. 그렇다고 이건 아니지. 필요가 뭐야 필요가. 사랑이 무슨 장사치 거래도 아니고.
“사람 우습게 보지 말아요. 나, 순서 따지는 여자예요. 다짜고짜 청혼하더니, 이게 뭐예요? 이게.”
로비 손에서 문서를 확 뺏고는 그의 눈앞에 대고 마구 펄럭펄럭 해댔다.
“계약서입니다만.”
“그렇겠죠. 계약서. 이딴 계약서로 날 묶어둘 생각, 천만의 콩떡 만만의 콩떡이에요!”
천만의 콩떡 만만의 콩떡, 로비 표정을 보니 외국인이라 그런지 못 알아듣는 눈치다.
“그러니까, 천만의 말씀! 연애도, 청혼도, 결혼식도, 제대로 하고나 그때 가서 혼인 신고서 들고 오라고요. 흥!”
나는 기세 좋게 혼인 신고서를 박박 찢었다. 갈기갈기 찢어지는 종이 쪼가리를 보고 있자니 내 마음도 갈기갈기 찢어진다. 하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밀당도 적당히 해야지 적당히를 몰라요. 적당히를. 하지만 자존심이 있지. 미안하단 사과도 아무런 설명도, 변명조차 듣지 못했는데 ‘내 신부’라는 말 한마디에 칠렐레팔렐레 얼씨구나 좋다고 폭삭 안길 수는 없다. 이렇게 나는 사랑이 먼저냐, 자존심이 먼저냐, 바락바락 홀로 싸우고 있는데, 뭐가 우스운지 미친 로비가 푸하하 웃는 게 아닌가? 그것도 푸하하, 푸하하~아?
“당신, 뭐지? 상상력이 지나친 건가? 아니면.”
아니면, 말하며 불쑥 그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나는 미처 몸을 뒤로 빼지 못했고, 서로의 코가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가 돼버렸다. 순간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은 원숭이 엉덩이만큼이나 빨개졌을 것이다. 유치뽕짝 메이드복에, 머리는 산발, 원숭이 궁뎅이 얼굴, 미처 닦지 못한 침 자국까지, 꼴이 말이 아니다. 쪽팔려. 나 이제 시집 다 갔어. 도망가고 싶다. 도망가서 어디 쥐도 새도 모르게 콱 죽어버릴까 보다.
전에는 푸근한 바다처럼 느껴졌던 파랑 눈동자가 지금은 차가운 얼음보다 더 딱딱하게만 보인다. 그 눈동자 안에 내가 있다. 순간 나는 직감했다. 이 냉혹하기 짝이 없는 눈동자 속에, 그는 나를 가둘 것이며 나 또한 벗어나기를 거부하리라. 그의 숨결, 코끝을 스치는 숨결의 온도가 차다. 차고, 서늘하다.
“사랑하는 건가, 지나치리만큼. 나를?”
그의 가슴팍을 밀치려고 자세를 잡았지만, 손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부러지는 수가 있어, 그가 귀에 대고 나지막이 협박했다. 나는 실제로 고분고분하게 굴었지만, 그가 진짜 내 손목을 부러뜨릴 따위에 겁먹어서가 아니었다. 지나치리만큼 사랑한다? 정통으로 맞은 기분이다. 어쩐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더 충격이다. 나를 붙잡은 그의 손이 뜨겁다. 그 뜨거운 열기가 내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들어 차오른다. 차오르고, 차올라 흘러넘친다. 내 온몸을 휘감는다.
“당신, 보이잖아? 아까도 봤고, 그래서 내가 처리했고. 나한테 이럴 입장이 아닐텐데?”
“내가 알아서 해. 이거, 놔...”
“알아서 뭘 할 수 있지? 똑똑히 들어. 머리채 하나로 끝나는 싸움이 아니야. 까딱하다가는 죽는 수가 있어.”
“웃기시네. 사람 모른 척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놓으라니까 좀...”
사람 말이 안 들리는 거야, 원래 성격이 한번 물면 끝장을 보는 타입인 거야. 무슨 도베르만도 아니고 집착도 정도가 있지. 당최 손목을 꽉 잡고는 놓아주질 않는다. 이러다 진짜 손모가지 부러지는 거 아니야? 난 정말 아파죽겠는데 자기 혼자 진지하고 난리다.
“내가 당신을 보호해 주지. 당신은 나 없으면 안 돼. 왜냐고? 그 끔찍한 존재로부터 나만이 당신을 지켜줄 수가 있으니까. 당신 목숨이 내게 달렸다는... 아악!”
있는 힘껏 그의 손등을 깨물었다. 동시에 그가 뒤로 손을 확 뺐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가 도베르만이라면 김순지는 치와와다. 치와와를 만만히 보지 말라고. 고게 쪼그매도 겁나게 야물딱지단 말이야! 나, 김순지도 한번 물면 아무도 못 말린다고!
“듣자, 듣자, 하니까. 귀신 싯나락 까먹는 소리하고 있네. 당신이 뭔데 내 목숨을 달고 말고 해? 사람 간이나 보는 주제에. 이 간잽이 쉐이야!”
운명의 수레바퀴고 자시고, 엿이나 먹어라. 손톱을 바짝 세우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 저 조각 같은 얼굴은 절대 건들지 않기로 한다. 보여? 보이냐고. 손모가지 빨간 거.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 나는 그의 손모가지 대신 모가지를 붙잡았다. 붙잡고 마구 흔들었다. 그는 컥컥댔고 나를 떼어놓으려고 했다. 흥! 어딜? 맛 좀 봐라! 이에 질세라 아예 두 팔은 그의 목을, 펄쩍 뛰어올라 두 다리도 마저 그의 몸통을 휘감았다. 그가 날 떼어내려고 하면 할수록 나는 더더더 꽉 조였다. 마치 고목나무의 매미처럼 딱 달라붙어서는 온몸에 힘을 빡! 숨통을 끊어 놓겠어! 이게 바로 오뉴얼 한 품은 거머리 권법이란 것이다! 음하하하!
“이 여자가 진짜. 컥컥.”
“해 봐. 해 봐. 덤벼보라고!”
“위험하잖아!”
“그럼 구해주시든가. 지켜주신다며! 보호해 준다며!”
이번 기회에 아주 혼쭐을 내줘야지. 내 말이라고는 귀 똥구멍으로도 듣지 않기를 하질 않나, 나는 또 무슨 백마 탄 왕자님이라도 왔는 줄? 그럼 멋들어지게 키스라도 해주시던가. 종이 쪼가리 한 장 딸랑딸랑 들고 와서는 염병~. 뻑이 가요, 뻑이 가. 자기만 잘났지. 이제 보니 머리 어디가 고장이 나도 아주 단단히 고장이 났다. 오늘 내가 사랑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겠다! 문 파워~ 크리스타...알?
“움직이지마.”
나를 떨구려던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동시에 나도 멈췄다. 계단 아래 복도 저쪽 끝, 그 존재가 있었다. 한 놈은 아까 로비가 처리했으니 다른 것이겠지. 우리 학교에 귀신이 이렇게 득실득실했던가. 보는 체질이 되고 나니 앞으로 소름 끼칠 일이 한두 번이 아니겠다. 이렇게 한 번이라도 눈이 딱 마주치면 저쪽에서도 알아채고 들러붙으니, 볼 줄만 알지 아무 힘이 없는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재수 없어서 괜한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쩌면 여기서 그냥 못 이기는 척하고 그 ‘필요’인지 뭔지에 진지하게 얘기나 들어볼까? 흠.
“저기... 저기에...”
“쉿. 알아. 가만있어. 당신, 지금 보이지? 아까도 봤잖아.”
어쩌다 보니 우린 서로 부둥켜안은 자세가 돼버렸다. 한쪽은 밀어내고 한쪽은 당기던 힘이 이제는 서로가 끌어당기고 있었다. 드르륵, 운명의 수레바퀴가 다시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하나, 둘, 셋, 한둘이 아니다. 내가 아직은 사람하고 귀신하고 확실하게 구분하는데 에러가 있지만, 저것들은 사람이 아닌 게 분명하다. 저것들이 다 귀신이라니, 좀비는 아니지만 이게 무슨 워킹데드도 아니고 뭐가 저렇게 떼거지야! 꺄아악! 무서워! 온다! 온다!
“로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로비가,
“안 돼, 눈 떠! 잘 들어 순지. 절대 눈을 감으면 안 돼.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말고 모든 걸 눈에 담아.”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그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복도를 따라서, 천장에서, 벽을 긁어대며, 바닥을 기며, 기괴하게 팔다리를 꺾어대는 그것들 하나하나를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무언가에 졸린 듯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굴더니, 커걱, 흔적도 없이 재가 되어 사라진다.
“잘하고 있어. 계속. 그대로.”
말하며, 그가 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큼지막한 손. 이토록 부드럽고 상냥한 손길을 언제 또 느껴볼 수 있을까? 그 손길에 부들부들 떨리던 공포심도, 딱딱하게 굳었던 긴장감도 사르륵 눈 녹듯 사라진다. 이제 나는 굳이 버티듯 매달려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의 품에 몸을 맡겼다. 붙잡고 있던 건 나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가만있어, 시작과 동시에 그가 나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분명했다. 그는 나를 절대 잃지 않겠다는 듯, 숨결까지 얽어오고 있었다.
“마지막 하나, 있을 텐데?”
또 있다고? 어디지? 안 보여. 혹시 뒤? 황급히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계단 저 위에 있었다. 로비가 말 한대로 귀신 하나였다. ‘하나’인 건 알았으면서 나보다 저걸 못 봤다고? 바로 자기 눈앞인데? 그런 의문도 잠시, 그 귀신이 내 눈에 들어오자마자,
“사라져라.”
그가 명령한다. 고작 명령 한번 했을 뿐인데 귀신 몸체 하나가 퍽하고 산산조각이 났다.
“이놈은 다른 놈들과 좀 다르군.”
로비가 혼잣말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기운을 더 썼다는 의미 같은데 겉보기엔 전혀 안 그런 표정이었다. 서로 왼쪽, 오른쪽 뺨을 맞대고 있었기에 지금껏 어떤 표정으로 그것들을 퇴치했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당장은 그래 보였다. 힘든 기색 하나 없는, 눈꺼풀이 축 처진 나른한 얼굴에 가까웠다.
“반한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면 부끄러운데.”
“거, 거짓말하지마!”
당황한 나머지 이상한 소리를 해버렸다. 거짓말이라니. 허허, 참.
“어쨌든 고맙군. 재빨리 저쪽을 봐주지 않았다면 위험했을 거야. 나도 당신도.”
어머, 나 의외로 소질 있나 봐? 후후. 칭찬을 다 듣다니. 서른다섯에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다니 이번 기회에 나도 이직을... 아니, 그게 아니라,
“당신 뭐야!”
“...”
“뭐 하는 놈이야! 뭐 하는 거야 지금!”
“사람이고, 숨 쉬고 있습니다만.”
“제대로 대답 안 해!”
욱해서 진짜로 뒤통수 한 대를 치고 말았다. 로비 이마에 빠직, 하는 힘줄이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난 퇴마사다.”
“알겠고, 퇴마사인데 왜 귀신을 못 봐? 당신, 마지막 하나는 나보다 먼저 볼 수 있었잖아? 그런데 왜 몰라?”
“그래서 당신이 필요하다는 거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신의 눈이지.”
“뭐?”
그래서 내 눈깔이라도 뽑아가겠다는 거야? 그렇다면 설마 아까 그 종이는 장기 매매 계약서? 그런 거야? 그랬던 거야? 귀신 나부랭이들 가차 없이 없앨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김순지, 이 외모지상주의 같은 년. 사이코패스가 반반한 얼굴 하나 들이밀고 어화둥둥 안아주니까 그게 그렇게 좋았니? 헤벌쭉해서는 잘하는 짓이다. 너, 벌받는 거야. 어디 눈깔만 뽑히겠어? 이빨도 뽑히고, 혀도 뽑히고, 간도 쓸개도 다 빼갈 거야. 그래서 마지막은 뭔지 알아? 마지막에는 내가 귀신이 되잖아? 그것도 병신 중에 병신 귀신이 될 거야. 그러면 이놈은, 이런 저질은 취급 안 합니다만, 이라며 퇴마도 안 해줄 거야? 귀신들도, 병신이랑은 안 놀아, 라며 상대도 안 해줄걸? 그럼 난, 그럼 난! 나는 어떠하라고!
“눈깔 안 뽑아.”
“누, 누가 그렇데!”
“얼굴에 다 티 나. 이상한 상상한 거.”
그렇게 티 나나? 만진다고 아는 건 아니지만 나는 내 얼굴을 더듬었다. 슬쩍슬쩍 괜한 눈치를 보면서. 그런 나를 보고 그가 쿡, 웃는다. 아, 씨, 팍, 이게 아닌데.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돼버렸지? 어쩐지 지는 기분이다.
“당신, 꽤 재밌군.”
“재미없어.”
말하며 고개를 팩! 돌렸다. 꼴도 보기 싫다. 내 기분이 어떤지는 하나도 모르고, 그는 자기 할 말만 한다. 이어,
“우리가 이래서 서로 필요하다는 거다. 이미 알아챘지만, 나는 귀신을 못 본다.”
“퇴마사잖아!”
아야야! 돌리고 있던 고개를 또 팩! 돌렸더니 근육이 놀랐다. 아오- 아파. 늙어서 그래. 늙어서. 그나저나 귀신 못 보는 퇴마사라니, 엄청난 충격이다.
“그러게.”
말하며, 로비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 미소가 별거 아니라는 듯한 얼굴인데, 순간 심장이 조이듯 아팠다. 왜냐고 물으려고 했다가 나는 도로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가 서로 몸이 닿으면...”
닿으면? 그래, 처음 아까도, 지금도, 우리는 서로 닿아있었다. 몸 전체 그게 어느 부분이든 말이다. 그렇게 이어지고 나서야 로비는 비로소 퇴마사로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당신은 내 눈이야.”
그가 이마를 내 이마에 콩, 했다. 아까는 닿을 듯 말 듯했던 코와 코 사이 거리가, 이제는 코끝이 닿는다. 나는 또 꼼짝할 수가 없다. 그가 억지로 꽉 붙들어 맨 것도 아닌데 바보같이 나 혼자서 난리다.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들었을까? 내 귀에도 심장 소리가 이렇게나 큰데 당연히 들리겠지? 싫은데, 안 되는데!
“당신이 보고, 내게 보여주는 것. 그것은 원한다면 점점 더 선명해지지. 이렇게 닿으면 닿을수록...”
입술이, 로비의 입술이... 그래, 조금만 더, 가까이, 가까이, 더 가까이... 라고 할 줄 알았지! 에라이! 있는 힘껏 박치기를 한다. 못된 조동아리 같으니라고. 우리가 사귀지는 않았어도 남녀 사이에 할 건 다 했다지만 그때는 그때고, 이제는 호락호락 안 해준다.
“진짜, 이 여자가!”
“흥!”
“말했지만, 당신도 나 없으면 안 돼. 계속 보게 될 거야, 오늘은 잔챙이들뿐이었지만 앞으론 더 센 놈들이 들러붙을 거라고. 미치거나 죽거나 그렇게 되고 싶진 않겠지?”
“완전은 아니어도 나는 원래 살짝 미친 체질이었고, 인간은 어차피 다 죽는 거거든!”
“끝까지 삐딱하게 나오시겠다?”
흥! 내가 누구 때문에 왜 이러는데?
“앞으로 내 몸에 털끝 하나라도 대기만 해봐.”
“그래서 협조하기 싫다?”
“싫어, 싫어, 싫다고!”
“싫으면 이제 좀 떨어져 주시지?”
생각도 못 했다. 내가 아직까지 그에게 안겨있는 줄은. 얼른 그를 감았던 다리를 풀었다. 허둥지둥 제대로 두 발을 딛고 서서는 괜히 머리카락을 만지작만지작했다.
“팔 아파죽는 줄.”
“누가 계속 안고 있으랬나!”
“안 놔준 건 그쪽인데.”
그쪽인데, 말하면서 그가 검지로 내 다리를 가리켰다. 망할 다리. 발정이 났나. 임무를 완수했으면 제때 물러날 줄도 알아야지 아무거나 휘감고 난리야. 확 분질러 버릴까 보다. 아우 짜증나.
“어디 가나?”
“집에 간다. 왜! 나도 퇴근이란 걸 해야 할 거 아니야!”
“성가시군. 더는 말 안 한다. 너의 눈은 내 것이다. 나의 신부여.”
순식간이었다. 내가 갈기갈기 찢어버렸던 계약서가 조각들, 그것들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였다. 어디서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닌데, 파르르 떨더니 빙글빙글 허공으로 솟구쳤다. 내가 저항할 틈도 없이 내게 달려들었다. 내 몸 주위를 회오리치며 그것들은 퍼즐을 맞추듯 찢어진 단면을 하나하나 맞춰나갔다. 복구. 계약서는 내가 아는 혼인 신고서도, 장기 매매도 아니었다. 그것은 ‘영안 공유 및 반혼(伴魂) 신부 계약서’였다.
“이거 완전 눈깔 강탈 아니야! 순 사기꾼 같으니라고.”
발악해 봤자 소용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나는 손가락 하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를 보니 빙그레 웃고 있다. 뒤꼭지가 돌아버릴 만큼 얄밉다. 그가 내 오른팔을 낚아챘다.
“아까 내 손등 깨물었지?”
말하며 그가 내 검지를 그의 입술로 가져갔다. 이제 그는 포식자의 눈을 하고 있었다. 각오하라는 듯한 눈빛이 칼날보다도 날카롭다. 검지가 그의 입술에 닿자, 파랬던 그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변했다. 그 핏빛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되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로비의 얼굴은 희고 입술은 차갑다. 로비가 입술에서 검지를 떼자, 손끝에 붉은 인장 같은 빛이 감돌았다. 그는 거침없이 내 손을 계약서 하단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종이에 대고 꾹 누른다.
“뜨거워!”
치익, 소리가 났다. 시커먼 연기도 피어올랐다. 동시에 왼쪽 팔목에 문신이 새겨진다. 팔찌 형태의 그것은 고대 퇴마 글자가 얇은 실선으로 이어져 있었고, 지금 로비의 눈동자처럼 핏빛이었으며, 똬리를 튼 뱀처럼 내 손목을 죄어왔다. 불기운이 몸 전체 혈관을 타고 퍼져나가는 기분이다. 당장에라도 손을 떼고 싶었지만,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계약서에 찍힌 붉은 지문은 소름 끼칠 만큼 선명했다. 왠지 빼도 박도 못할 것 같은 묘한 기분에 속이 다 울렁거린다. 돌돌 말린 붉은 지문이 금빛 실선으로 변했다. 실선은 길고 길게 자라 거미줄처럼 퍼져나갔다. 계약서에 적힌 글자들이 붕 떠올랐다. 그 글자들을 금빛 실선들이 옭아맸다. 그렇게 우리의 계약은 시작되었다.
“축하해. 김순지. 인간은 다 죽지만, 당신은 아니야. 오늘부터 당신 눈은 공식 허가 없이는 감지도 못하게 될 테니까. 내가 허락하지 않아. 절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