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예약 총 4박 중, 3박은 여성전용 도미토리 사용이 가능하지만, 마지막 하루는 혼성 도미토리나 다락방에 묵어 얀다고그가 말했었다.
혼자 쓰는 방이라기에 다락으로 올라가 보니,
천정이 높은 집이라, 리셉션 위로 올라앉아 있어도좁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방 분위기가 꺼려졌다.
예약 차있어 변경이 용이하지 않다기에,
그래도 다락방은 사용하지 않게 해달라고 얘기해 둔 터였다.
수많은 전쟁을 치른 유서깊은 이 건물의 다락에,
혹시 머물지 모를 당시의 인물(원혼)과의 조우는
면제된 셈이니,
OK는 나름 의미롭다.
떠나는 룸 메이트 배웅
숙소에 들어서니, 떠날 채비를 한 룸메이트가 기다리고 있다.
그녀의 쓰다 만 교통카드를 받고, 어제 약속한 금액을 지불했다. (속은 약간 쓰렸...)
그러고도 예의, 뭔가 나눠주고 싶은 맘이 또 발동,
겨우 몇 개 챙겨 온 라테 커피믹스를 주섬주섬 챙겨주니, 무척 좋아한다.
그녀와 찐한 작별의 허그를 풀고,
나는 숙소 문을 열고 서서, 그녀가 계단을 다 내려갈 때까지 지켜보며 배웅해주었다.
홀로 여행길 어느 곳에선, 자신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눈길이 있었음을 기억시키고 싶었다.
그녀가 다시 나를 올려다보며 기인 눈인사를 보내더니, 천천히 돌아서 나간다.
여행길에서의 만남은,
비록 일회성일지라도(혹은 일회성이라서), 찐한 교감을더러 안긴다.
밤의 부다 언덕과 동네 골목길
저녁을 먹고 트램과 버스로 환승해가며 다시 부다 언덕을 올랐다.
어둠에 갇힌 부다 성 지구는 아까 왔던 낮보다 훨씬 느낌이 강하다.
이 거리 문화유산들이 비록1, 2차 대전, 그리고 소련과의 투쟁 후, 대대적인 개•보수를 거쳤을망정,
호젓한 밤 시간이라서,
역사가 쌓인깊은 두께를 뚫고
가공되지 않은 현장감이 왕성하게 올라오는 듯하다.
트램 이용이 편리한 시가지와 관광객들
부다 성 지구로 들어가는 길
밤의 마차시 교회 앞
왼쪽 마치시 교회와 정면의 어부의 요새
33년 전, 마치시 교회 앞에서 들었던 웃음소리
1996년 8월,
30여 명으로 구성된 동유럽 패키지여행 팀은 나보다 대부분 연상이었다.
직업, 개성, 살아온 이력이 각각이었지만
여행을 좋아한단 공통점 하나로 20일 여정은 대체로 유쾌했다.
당시 마차시 교회를 방문했던 날,
가이드의 설명을 받아, 일행 중 나이지긋한 어느 분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마차시 왕)영웅은 여자를 가까이 한다"라고 말해서 큰 웃음 안긴 일이 엊그제 같은데,
33년 까마득한 세월을 거슬러일행들의 웃음소리가 선명하게소환된다.
그때에도 방문지의 사이드 혹은 뒷부분을 더 흥미로워하던 나는,
이 동네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골목길 구비구비가 무척 궁금했었다.
오늘에야 나는,오랜 옛 소원을 풀고 있다.
마차시 왕과 마차시 교회
1443년 헝가리 콜로즈바르(Kolozsvár, 현재의 루마니아 클루지나포카)에서 헝가리의 섭정인 후녀디 야노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마차시 1세(헝가리어: I. Mátyás, 1443년 2월 23일 ~ 1490년 4월 6일)는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재위: 1458년 ~ 1490년)이었다.
그는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면서 중세 헝가리의 전성기를 마련했고, 대외적으로는 오스만 제국, 보헤미아 왕국, 신성 로마 제국에 맞서서 헝가리 왕국의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1469년에는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1479년 보헤미아 올로모우츠에서 체결된 보헤미아와 헝가리 양국 간의 평화 조약에 따라 실레시아, 모라바, 루사티아를 획득했다. 1485년에는 오스트리아 빈을 점령했다. 1490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사망했으며 시신은 헝가리 세케슈페헤르바르 성당에 안치되었다.
문화적인 업적으로는 이탈리아 다음으로 르네상스 문화를 수용했고, 포조니(Pozsony, 현재의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에 대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코르비누스 문고(Bibliotheca Corviniana)로 불리는 수많은 서적들을 수집했다. 헝가리 1,000 포린트 지폐에 마차시 1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마차시의 분수
궁전 뒤, 도서관 쪽에 있는 마차시 파운틴
마차시의 분수는 1899~1901년 완공, 2차 대전 중 손상된 것을 2010년 복원했다.
왕의 사냥 장면으로, 사냥 복장의 석궁 든 중앙의 인물이 마차시 왕이다.
왼쪽, 다리 꼬고 앉은 이는 마차시 왕 시절, 왕궁에 살았던 이탈리아 역사가 Galeotto Marzio이다.
오른쪽, 길들인 새끼 사슴을 보호하며 왕을 바라보는 여성은, 사냥 중 마차시와 사랑에 빠졌으나, 후에 왕임을 알고 불가능한 사랑에 마음의 상처를 얻어 사망한다는, 19세기 발라드 소재의 여주인공이라고.
마차시 교회
성모 마리아의 교회라는 이름을 지녔던 원래의 성당은 1255~1269 년에 건축된 이래 여러 번 개, 증축을 거치다가, 19세기 말 재건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그 중 교회 외관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Matthias Tower는 1470 년 마차시 왕의 지시 하에 88미터의 첨탑으로 증축했었기에 교회 이름으로 마차시 왕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마차시왕은 두번의 결혼식을 이곳에서 올렸고 사후 그의 머리칼이 성당 남쪽탑에 보관되어 있으며 왕의 왕관 문장이 탑의 벽에 놓여있다.
마차시 교회는
부다페스트 시민들의 신앙과 믿음의 상징적 위상을 지닌다.
오스만과의 전쟁으로 부다페스트가 위기에 처했을 때, 대포 공격을 받은 성당 한쪽 벽이 무너졌는데, 그 벽에 성모 마리아 상이 서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본 오스만은 두려움으로 사기가 떨어져 결국 헝가리가 승리하게 되었다는 믿음과 함께.
그러나 결국 오스만에 의해 점령되었던 16세기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면서 성당 내벽에 프레스코화가 그려졌다.
17세기에 다시 가톨릭 성당으로 환원되면서 모스크를 비롯한 이슬람의 장식과 그림들을 모두 철거, 당시 유행하던 바로크 양식으로 개축했다.
19세기 말에는 건축가 프리제시 슐렉이 다시 원래의 모습인 고딕 양식으로 복원했다.
헝가리 전통 양식과 아르누보 양식까지 혼합된 예배당에는 벨러 4세와 왕비의 석관이 안치돼 있으며, 성 유물실에는 역대 국왕과 사제들의 귀중한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탑으로 들어가는 ‘성모 마리아 문’은 중세의 유산으로 지정되어있다.
교회는 마차시 왕과 카알 4 세 등 헝가리 역대 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되던 곳이며,
1867년(헝가리가 합스부르크의 통치하에 있었던 시절),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그의 황후 에르제베트의 대관식이 이곳에서 치러졌는데,
헝가리 대표 작곡가 리스트는 <헝가리 대관 미사곡>을 작곡하여, 대관식 날에 직접 지휘하며 곡은 처음으로 세상에 선보였다고 한다.
낮시간, 여행객으로 붐비는 교회 앞 광장
19세기 고딕 양식으로 복원된 마차시 교회
마차시 타워와 교회 입장문
어부의 요새 쪽에서 바라본 마차시 교회
마차시 교회 앞, 흑사병의 종결을 감사하는 성 삼위 상
화려한 교회의타일 지붕과 화면 중앙 탑 꼭대기의 까마귀 상:마차시의 독일식발음이 까마귀와 비슷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마차시 교회 앞의 성 이슈트반 왕의 동상
어부의 요새
1895년부터 1902년 사이에 건축된 네오 로마네스크와 네오고딕 양식 혼합건축물이다.
중세 어시장 가까이 있던 이곳을, 어부 길드 조직원들이 보호하기 위해 방어에 나섰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마차시 교회를 건축한 건축가 슐렉이 건축물의 연계성을 위해 지은 곳으로, 이전에 어시장으로 쓰였던 장소의 명칭을 살려 어부의 요새라고 지었을 뿐 실제 요새의 역할을 하던 건축물은 아니라고 한다.
새하얀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뾰족한 고깔 모양의 일곱 개 탑은,
896년경 카파르티아 평원에 정착했던 일곱 개의 마자르 부족이 사용하던 천막의 모습을 상징한다.
198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요새는, 헝가리 건축가 프리제스 슐르크가 건축했는데, 그는 바로 옆 마차시 교회를 보수하고 재건축한 사람이다.
천막 모양의 원추형 탑
마자르족의 천막을 형상화한 어부의 요새
어부의 요새 앞 광장
도시의 야경을 구경하기 좋은 곳이기도 하디
벽면에 새겨진 마자르 족장들의 모습
부다지구로 이 계단을 통해 올라올수 있다.
관광객들이 요새에 걸터앉아 야경을 바라보고 있다.
어부의 요새에서 내려다 본 페스트 지역
180m 길이의 성채는,
167m 높이 언덕에 자리해서,
건너편 국회의사당과 페스트 지역을 내려다 보기에 좋은 전망대 역할을 한다.
부다와 페스트를 연결하는 7개의 다리도 모두 볼수 있다. 많은 관광객들이 걸터앉아 야경을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