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그레브에서 슬루니까지 버스로 1시간 40분, 슬루니에서 플리트비체까지는 약 36km에 35분 소요된다.
우리는 9시 10분 버스를 탈 예정이다.
그다음 버스는 오후 1시라니, 플리트비체행 (자다르행 버스가 플리트비체 경유) 버스 정류장 위치 묻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왜냐하면 같은 버스를 기다리는 마을 사람들이 버스터미널이 아닌 다른 장소에 서있기 때문이다.
유럽 관광 소도시 상당수가 그렇듯 크로아티아는 성수기와 비수기 별 운행시간이 다르고, 버스 회사마다 요금은 물론, 정류장이 다르다는 걸 여기서 땀 내며 체험 중이다.
결국 두 장소에 한 사람씩 나눠 서있기로 하였다.
플리트비체로 가는 길
버스에 오르니 급 피곤 해져서, 눈 감고 쉬려는데 버스 유리창에 전개되는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맨 앞자리여서 마치 영화관 스크린으로 감상하는 듯하다.
고도 500여 m 플리트비체로 가는 길은 오르막일 텐데, 완만한 초록 장원 사이를 달린다.
가지마다 흰 꽃 소담하게 달고 있는 과수원 果木 사이에 아기자기한 농가들이 보이고,
그 뒤로 펼쳐진 푸른 평원이 멀리 뻗어나가다,
산 꼭대기에 흰 눈 모자 얹은 산에서 멈춘다.
이웃나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눈 덮인 산과
그 아래 크로아티아 산이 겹쳐서 버스를 줄곧 쫓아온다.
유록의 수목과 들판의 연녹 평원이 영화의 배경화면처럼 스펙터클 하게 다가왔다가는 뒤로 물러서기를 반복하는 새, 35분간 상영이 끝나고 드디어 플리트비체에 당도했다.
플리트비체 숙소 가는 길
정류장엔 건물도 안내판도 없으니 제대로 내린 건지 의아스럽다.
폰의 인터넷 지도를 보니 역방향으로 가다가 길 건너서 직진하게 되어있다.
마을 아닌, 산속으로 들어가는 분위기이다.
지나는 사람도 없으니 지도만 믿고 직진하는데, 한참 가서야 마을 안내판이 나타나고 저 멀리 인가도 보인다.
마을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길 양켠에 집들이 드문드문 늘어서 있다.
숙소로 운영하는 집 앞에는 안내판에 숙소 이름과 숙소 번호가 쓰여 있다. 위치 순서 따라 매겨진 일련번호라 숙소 찾기에 용이하다.
10분 정도 걸어 들어가니 예약 숙소가 나온다.
몇번을 소리친 뒤에서야, 뒤 마구간에서 주인이 나타났다.
마을 입구의 안내판
2층이 배정된 숙소
마을로 들어가는 외길
사방이 풀밭인 동네는 한적하다. 흔히 상상하는 관광지 숙소동네의 개방감과는 분위기가 아주 다르다.
진짜 크로아티아 깊숙히 들어온 느낌이다.
숙소에 짐을 풀고 크로아티아 방문 목적 첫 번째인 플리트비체를 향해 나섰다.
유럽 두 번째 세계문화유산 등록지인 플리트비체
1979년 유네스코에 의해 유럽에서 두 번째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이곳은 면적 296.85 km²의 국립공원이다. 카르스트 지형의 석회성분이 물에 녹아서 내려앉아 생긴 호수와 폭포로 이뤄진 자연경관뿐 아니라, 좋은 기후조건과 사람이 접근하기 힘들었던 환경 덕분에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다양한 종류의 동. 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곳 중 하나라고 한다.
‘악마의 정원’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사람의 접근이 매우 어려운 이곳이 알려진 것은 약 400년 전.
그 전 까지만 해도 공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었다.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터키와 오스트리아 제국의 국경 문제 조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1893년에 이 지역 환경 보호 단체가 생긴 이후, 1896년에 처음으로 근처에 호텔이 지어지면서 관광지역으로서의 잠재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1991년 3월 31일에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에서 처음으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플리트비체 호수에서 크로아티아 경찰과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인이 세운 SAO 크라이나의 무장 반군이 서로 격돌했다. 이때 국립공원의 경찰관이었던 요시프 조비 니체 (Josip Jovic)를 살해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사실상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시작된 곳이다.
SAO 크라이나의 병사들이 호텔을 막사로 삼고 국립공원의 자산을 약탈하며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지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약 4년 후인 1995년 8월에 크로아티아 군대가 다시 이 지역을 되찾았다.
이후 정부는 이곳의 아름다움을 보존하려는 정책들을 실현하고 있다.
플리트비체 호수 사건 중 사망한 첫 번째 크로아티아인 사망자로 알려진 요시프 조비니체 기념비.(위키피디아)
카르스트 지형 침식으로 생긴 플리트비체
플리트비체의 호수는 카르스트 지형의 석회성분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산맥의 표면을 따라 내려오던 물에 의해 녹아서 밑으로 내려앉아 생긴 것이다.
가장 큰 두 호수 Proscansko jezero와 Kozjak이 공원 면적 약 80%의 면적을 차지하며, 깊이도 각각 37m와 47m로 가장 깊다.
Kozjak 호수에서는 관광객 이동을 환경 친화적인 전기 배로 운영한다.
다른 호수들 깊이는 25m이며, 호수들 간의 지형적인 높이 차이는 약 133m에 달한다.
가장 높은 폭포의 길이는 78m이다.
16개의 호수 중, 12개는 상류(Gornja jezera), 4개는 하류(Donja jezera)에 위치한다.
상류 호수들은 색깔과 주변의 울창한 숲과의 조화가 볼 만하고, 하류의 호수와 계곡들은 크기가 더 작고 얕으며, 덤불숲으로 성글게 둘러싸여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총 18km 길이의 인도교는 물의 수량 따라 다리가 균형을 잡도록 비고정적이며 땅 보다 약간 떠있어서 흐르는 물이 방해받지 않도록 만들어졌다.
물에 포함된 마그네슘과 탄산염들의 광물, 무기물과 유기물의 종류, 그 양에 따라 물빛이 각기 다르다.
특히 봄철에는 풍부한 수량으로 폭포의 웅장함을 볼 수 있는 계절이라기에 우리는 기대를 안고 북쪽 1출구로 들어갔다. 여러 팀의 한국인 관광객들이 각자의 가이드 설명을 듣고 있다.
우리는 내일도 다시 올 예정이므로 오늘은 C 코스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제일 아래쪽 칼 루데 로바츠 호수를 가로지르는 나무다리가 통행 불가 기간이다.
칼루데로바츠 호수와 케스케이드
호수를 가로지르며 걷는 다리
호수를 내려다보며 15분여를 걸어가니 큰 바위 가운데가 뚫려서 계단으로 만들어진 곳을 통해 10여 m 아래쪽으로 내려가게 되어있다.
내려서면 보행로가 호숫가 水邊길과 거의 같은 높이가 된다.
발치에 호숫물이 닿을 정도의 나지막한 길 위로는 나무들이 만들어 주는 푸른 터널이 이어진다. 멀리서 보던 그 아름다운 물색을 직접 손바닥 안에 담아볼 수 있을 정도로 물가는 이제 낮고 가깝다.
가다 보면 폭포가 생겨 물이 떨어지고 비탈길을 오르다 보면 나무판넬로 만든 다리가 곡선을 만들며 길을 이어간다. 나무다리가 무려 18km라고 하니 이 길을 만들기 위해 한 장씩 나무를 깎아 엮어 만든 이들의 노력이 새삼 경이롭다. 나무 대신 시멘트나 철근 다리로 관광객들의 편의성이나 대규모 인원의 수용만을 고려했다면 지금처럼 경외감으로 바라보는 호수의 면모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게 분명하다. 우리나라 석가탑 마당이 시멘트로 도배질된 것이 떠올라 잠시 우울해진다.
영상을 통해 보던 호수를 직접 왔다는 현실감으로 감동은 배가 된다. 이제 가바노바츠 호수에 다다른다.그런데 애석하게도 같이 걸어 들어온 그 많던 패키지 여행자들은 어느새 버스로 되돌아가버려서 이 좋은 풍광을 못 보고 떠났다. 플리트비체의 비경을 입구 근처에서 보고 서둘러 인증숏만 찍고 가는 2~3시간 체류 패키지 상품 단점이 플리트비체에서야말로 가장 크게 부각되는 듯하다.
패키지로 다녀온 주변 지인들은 그것으로도 만족한 듯하긴 했지만.
선착장 P1 코츠야즈카 드라가에서 점심을 먹다.
호숫가를 걷다 보니 코츠야즈카 드라가(Kozjačka Draga)에 다다른다.
넓은 잔디밭에는 의자, 탁자들이 놓여 있어서 누구라도 가져온 점심을 풀어놓거나 옆 식당의 음식을 가져다 놓고 먹을 수 있게 되어있다.
우리의 점심 메뉴는 즉석밥과 보온병에 넣어 간 뜨거운 육개장이다.
준비해 간 마른 표고와 특제 양념을 베이스로 슬루니에서 산 값싼 쇠고기 듬뿍, 굵은 파, 양파를 넣어 제대로 끓여낸 육개장이다. 아름다운 경관에 둘러싸여 먹는 점심은 말 그대로 '꿀맛'이다.
이런 식사를 할 때마다 우리의 '자유여행 예찬'은 점점 고조된다.
코츠야즈카 호수 앞 야외 식사 장소
코츠야즈카 P3선착장
Kozjak 호수 P3 선착장
코츠야즈카 호수
P3에서 P2로 이동 중
전기보트를 타고 P3 선착장에서 P2 선착장으로 이동한다.
이 코츠야즈카 호수에서만 유일하게 전동 보트를 운영하는 것은 자연 보존 때문이다.
공원 내부의 모든 인도교, 쓰레기통, 안내표지판 등을 나무로 만들었고, 수영, 취사, 채집, 낚시가 금지되어 있으며 애완동물의 출입도 막고 있다. 그러고보니 유럽 공원 어디서나 자주 볼수 있는 반려 견공 동반자가 없다.
호수다운 잔잔함과 주변 수목들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며 보트는 조용히 미끄러진다.
이 호수에 슈테파니아라는 작은 섬이 있다고 한다. 1888년 9월 5일에 플리트비체 호수를 방문한 슈테파니아 여왕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명명되었다고.
P2 선착장에 내려 상류 호수로 들어가는 길로 접어든다.
오르는 길에 잠시 벤치에 앉아 쉬는데 야생 오리들이 사람을 겁내지 않고 가까이 다가와 서성인다.
먹이를 주지 말라는데도 일부 사람들로부터 얻어먹은 학습의 결과인 듯하다.
낚시 금지인 호수에는 먹이가 지천일 텐데...
다시 위쪽으로 1시간쯤 걷다 보니 한국인 여행자 커플들을 몇 쌍 만나게 되었다. 호수를 배경으로 두 사람이 셀카봉으로 찍는 커플도 있고 준비 안 된 커플들은 혼자씩 사진을 찍는다. 사진을 찍어 주겠노라고 자청하니 찍자마자 말없이 돌아서 가는 커플도 있고, 짧게나마 감사를 표하는 커플도 있다.
어떤 커플은 기어이 자기들도 우리를 찍어주겠노라고 한다.
위로 오를수록 깊어 보이는 호수들이 나타난다. 나무들도 점차 울창해진다.
몇 시간째 보는 데도 계속 새로운 모양으로 나타나는 호수와 폭포들!
물속에 죽은 나뭇가지, 둥치가 가라앉아 있고 그사이를 누비는 물고기들이 그대로 내비치는 투명함!
호수와 호수를 연결하는 나무다리가 물길을 방해하지 않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곡선미!
물빛이 저마다 다른 호수와 그 위로 그늘 드리우는 울창한 나무의 가지들! 처음 보는 다양한 야생화들!
이 경탄을 부르는 풍경은,
나무 하나도 잘린 그대로 남겨두고, 자연적으로 쓰러진 나무만을 이용해 산책로를 조성할 정도로 환경을 보호하려는 크로아티아 정책가들의 현명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터이다.
자연의 손상을 최소화하여 지켜낸 이 풍경은, 또한 관광 정책입안자들의 혜안이 탁월하게 느껴지는 나라, 크로아티아이다.
몇 시간을 걸었어도 피곤하지 않다. 흰 명주실로 짜서 흔들리는 바람에 나부끼는 비단 폭포도 배경이 다르니 같은 모습 없이 모두가 새롭고 신비하다. 호수 색깔도 더없이 아름답다.
썪은 나무들이 물속에 잠긴 모습
이 곳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받았을 감동의 크기는 과연 어떠했을까?
어떤 수식어도 오히려 폐가 될 아름다움, 그 자체인 플리트비체에는 단지 침묵만이 가장 큰 헌사일 것 같다.
“직접 봐야 한다”가 가장 적절하다.
이래저래 해가 설핏 기울 무렵 선착장 P2으로 돌아와서 배를 타고 건너편 선착장 P1으로 건너간다. 조금 걸어 올라가면 파노라마(공원 내 운행 셔틀)가 서는 ST2가 있다. 북쪽 ST1으로 가는 파노라마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