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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찌 Jun 16. 2023

4번째 앵콜을 한 조각 가져가고 싶어

Bruce Liu 브루스 리우 피아노 리사이틀 공연 후기

2021년 제18회 쇼팽 피아노 콩쿨 우승자 Bruce Liu의 리사이틀. 피아노 리사이틀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보통은 당일에 바로 기록하는데 이번엔 왠지 후기가 늦어질 것 같아 커튼콜, 악장 사이마다 열심히 메모했다. 다행히 이만큼은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Bruce Liu 브루스 리우 피아노 리사이틀
2023년 3월 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부

Jean-Philippe Rameau
Les Tendres Plaintes
Les Cyclopes
Menuets I & II
Les Sauvages
La Poule
Gavotte et six doubles

Frédéric Chopin
Variations on ‘Là ci darem la mano’ from Mozart’s <Don Giovanni>, Op. 2


2부

Frédéric Chopin
Piano Sonata No. 2 in B♭ minor, Op. 35 ‘Funeral March’

Frédéric Chopin
3 Nouvelles Etudes, Op. Posth.

Franz Liszt
Réminiscences de Don Juan, S. 418


1부 두 번째 곡은 돈 조반니 중 ‘아리아 그대 손을 내게 주오’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 2

사람들이 다들 소리 없는 탄성을 지르는 게 느껴졌다. 유리일까, 다이아일까. 차가운 물이 흐르며 영혼을 씻기는 듯한 느낌이 스쳤다. 아쉽게도 1부는 메모가 이것뿐이다.


2부를 기다리며 조명이 어두워지는 무대를 본다. 공연장은 나를 근본으로 돌려주는 힘이 있다. 숨소리도 낼 수 없어 움직일 수 없고, 폰도 못 보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그저 집중하게 되는 거다. 명상처럼 제자리로 돌리는 힘. 이 안도감은 아무리 오랜만에 왔어도 언제나처럼 이렇게 다가와 주기에 연주가 시작되기 전 찰나의 몇 초, 이 순간이 더없이 좋다.


공연 전에 호다닥 마시는 커피 한 잔이 그렇게 맛있어 :) 언제 봐도 예쁜 콘서트홀 로비 샹들리에


2부 첫 곡은 쇼팽 콩쿠르 3번째 스테이지에서 연주했다는 피아노 소나타 2번 Op. 35


낙엽이 지는 가로수길을 상기된 표정으로 걷는 여자, 그 옆으로 지저귀는 가을의 새. 

장송 행진곡이라는데, 말러 5번도 그렇고 왜 나는 이런 걸 들으며 낭만을 떠올리나..


저음의 건반을 누르는데도 텁텁하지 않은, 맑게 흐르는 초콜릿 같은 느낌. 건반 하나하나 끝까지 꾹꾹 눌러서 치는, 건반의 무게감이 손끝에 느껴질 듯한 소리. 테누토인가 싶었는데 악보에 그렇게 표기돼 있을 것 같진 않다. 전자피아노로 채울 수 없는 피아노 건반의 매력. 이윽고 건반들이 웅성웅성하는 소리(murmur라고 메모했었다.), 이를 만들어내는 완급조절. 건반을 누르는 정도를 조절하는 게 엄청났다. 


그의 공연 후기엔 섬세하다, 부드럽다 따위의 표현을 쓸 수 없다. 그 정도의 단어로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잠든 아기의 보드라운 머리칼을 어루만지는 손길, 그 머리칼의 촉감이 소리로 들리는 듯한 연주. 건반을 누르는 내실 있는 무게감.


2부 마지막 곡은 리스트, 돈 주앙의 회상.

산미 없음, 탄 맛 없음, 중간 바디감. 이런 커피 같은 연주라고 생각하니 문득 mp3를 쓰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이리버에서 삼성 기기로 바꿨을 때, 같은 이어폰이었는데도 소리가 확 달라졌었다. 좋아하는 곡들이 날카로워진 소리로 귀에 꽂혀서 약간 멀미 나는 듯한 거북한 느낌이 들었다. 이왕 샀으니 참고 적응해 보려다, 이어폰을 빼고 지하철 내리자마자 바깥 공기를 마시러 계단을 뛰어 올라갔던 기억이 난다. 서초역이었던 것과 그 장면까지.


산미나 탄 맛 없는 중간 바디감의 커피로 표현한 건, 그만큼 거슬리는 것 없이 바디감이 좋았다는 뜻이다. 1부와 다르게, 곡마다 달라지는 소리에 그사이 피아노를 바꾼 건가 싶을 정도로, 어떻게 같은 피아노에서 이렇게 다른 소리가 나는지 신기할 정도로 놀라웠다. 곡 끝부분의 유려한 연주에 손끝에서 피어난 음들이 날아오르는 듯했다. 건반과 전신, 연주와 함께 찰랑이는 머릿결을 보니 처음에는 왜 이런 사진을 썼나 싶었던 앨범, 프로그램북 사진이 이해되었다. (그래도 사진보다 연주가 천 배쯤 낫다.) 뒷모습에서도 그의 표정이 보이는 듯했다.


그 후 이어지는 장면. 형형색색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어린이들이 가득한 학교 앞. 고만고만한 작은 키의 초등학생들이 꺄르르 웃으며 걸어가는 밝은 등교길의 느낌.


CD를 살까 싶어도 어떤 스피커로도 이 소리는 담기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 참.

건반을 어떻게 저만큼 누르지 싶은 섬세한 조절. 저 피아노 자체에서 나는 소린가? 피아노가 어떤 건지 궁금해진 건 처음이었다. 타악기라 낼 수 있는 소리다.


오늘의 앙코르 - 6곡으로 세었는데 7곡이었단 말이야..?


앵콜에서도 곡마다 악기가 바뀌는 듯했다. 어떻게 같은 피아노로 이렇게 다른 소리를 내지. 


3번째 앵콜에선 몸에 전율이 흐르며 소름이 쫙. 건반의 높은, 낮은음도 좋지만, 그의 연주는 가운데 건반들로 내는 소리가 정말 엄청나다. 고음이나 저음을 쾅쾅 치거나 속주를 하는 걸로는 이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 (물론 그런 걸 들을 땐 우와..! 싶긴 하지만) 어떻게 중간 건반들로 이만한 감동을.. 


본 공연 때 꾹꾹 숨겨둔 내적 탄성을 조금이나마 꺼내둘 수 있는 앵콜이라, 사람들의 찐 행복이 공연장을 가득 메우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커튼콜 때 함박웃음을 짓는 브루스 리우, 다같이 녹아내리는 관객들. 꽃봉오리가 활짝 피는 듯한 그 순간, 이천여 명의 기쁨을 함께 공유할 수 있어 더 기뻤다. 관객들의 옆모습, 뒷모습에서도 반짝이는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4번째 앵콜이 시작할 때는 얼마나 좋았던지 그 순간을 손으로 뚝, 힘있게 한 조각 떼어내서 가져가고 싶었다. 2층 B블럭에서 보이는 풍경, 들리는 소리 그대로. 너무나도 완벽했다. 연주를 따라가다 보니 공간을 떼어내 가져가는 걸 상상했던 것과는 또 다른 모험으로, 낯선 음 속에 어느새 다른 시공간에 놓여있는 듯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5번째 앵콜, 만약 공연장에서 춤을 출 수 있게 해줬더라면 다들 일어나서 춤을 췄을 거다. 언젠가 유튜브에서 봤던, 락페같은 무대에서 펼쳐지는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신나게 춤을 추는 사람들과 이를 보며 기쁘게 연주하던 캐주얼한 복장의 단원들이 떠올랐다. 


6번째 앵콜, 세상에 앵콜을 이렇게 많이 해주다니. 연주자가 무대를 향해 눈을 맞출 때, 관객과의 아이컨텍에서 서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순간의 교감이 멀리서도 벅차게 기뻤다. 연주 중에 잠시 오른손 검지가 허공으로 올라갔다 내려가는데, 마치 말을 거는 듯했다. 


사인회가 있었는데 줄이 길어서 엄두가 안 났다. 그래도 가까이서 한번 보고 싶어 문 앞에서 잠시 기다려서 보고 왔다. 1부 후반에서 아기의 머리칼을 떠올렸는데, 그의 머릿결도 좋아 보이더라. 이 기억은 사인 대신 콩쿨 실황 앨범으로 채우기로 하고 씨디를 샀다. 실황만 못할 테니 아쉽다고 생각한 지 1시간도 채 되지 않은 구매 결정 ㅎㅎ



(사인은 못 받았지만) 친절한 사인회 풍경 & 씨디는 다시 들어도 좋았다


연주를 보며 악기를 궁금해한 건 처음이었다. 오늘의 악기를 기록해두고 싶다. Steinway Concertgrand D-274, 개별번호 617336. 피아노까지 궁금하게 만든 이 순간은 결국 기록에 담을 수 없어 이 소리와 현장감을 잊겠지만, 서글프기보다는 그래서 더 소중해지는 것 같다. 공연 후 주고받은 메시지에서, 쇼팽 콩쿠르 갓 수상자들이 볼륨은 적을지언정 리리시즘*을 표현하는 데 있어 참 잘하는 것 같다는 얘기. 곧 만나서 더 많은 얘길 도란도란 나누며 기쁨을 공유해야지.


*리리시즘(Lyricism) - 예술적 표현의 서정성. 주관적인 정서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서정적 표현 기법



+ 공연 후기에 남겨진 후기:

4번째 앵콜 이야기가 난 좋네. 익숙하지만 낯선 모험이라는 단어. transported emotionally. 오디오가 담길 수 있는 한 장의 풍경 등등. 그래 곧 만나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해보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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