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창고의 위험한 확장
시간이 멈춰 몸을 움직일 수도 없고, 눈을 뜨고 있음에도 볼 수 없었지만 그 짧은 찰나의 순간 속에 그들이 내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어디?"
"봐, 저기 저 아이. 죽은 그 아이의 하나 남은 핏줄이지."
나를 가리키는 것 같다.
'셀리나.. 위험한 인물이야. 그리고 저 모를 누군가도. 지금의 나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하지만 이대로 천성이의 생령방울을 빼앗길 순 없어. 이렇게 그를 잊어버릴 수 없다고,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할까..'
"설마 죽이려는 건 아니지?"
"미안하지만, 나는 창조자가 아니라서. 그래서 그 아이도 공간의 틈에 보내버리려던 것이었고."
"그래, 알겠어. 엘릭서를 얻은 다음엔? 어떻게 할 건데?"
"그 아이를 되살려내야지."
"그건 안돼. 너는 생명의 생과 사에 관여할 수 없어. 알고 있듯, 그 아인 이미 육을 떠난 존재야."
"그럼 다른 방법이 있어? 창조자답게 생각해. 창조자답게 행동하라고! 크리스, 비켜. 너도 공간의 틈으로 보내버리는 수가 있어."
"편집자! 이 이상의 개입은 허하지 않는다. 창조자의 부름에 응하라."
느껴지지는 않지만 무언의 흐름이 바뀐다. 셀리나의 것과는 조금 다른 기운이다. 그 정체 모를 남자임이 틀림없다. 끌어당김의 어떤 것이 이곳저곳 틈타기 시작했다.
그들의 기운이 점점 내게 가까워지는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상황을 면할 수 있을까.
"창조자 크리스, 내가 누군지 잊었어? 이번에는 응할 수 없어. 목숨을 걸어서라도 종말 따위 이 세계에서 거둬내겠어."
셀리나 곁으로 빛이 뿜어져 나온다.
거대한 막이 겹겹이 쌓이며 뿜어 나온다. 마치 심장의 두근거리는 파장 같다.
'따... 듯하다..'
가슴팍의 파우치의 생령방울로부터 두근거리는 기운이 넘친다.
'유천성?'
"내게 오렴, 아이야."
셀리나의 간드러진 목소리에 홀린 듯 천성이의 생령방울이 파우치를 뚫고, 셔츠를 뚫고, 겉옷을 뚫고 유유히 지나간다. 천천히 내게서 벗어나는 천성이의 마지막이었다.
'가지 마... 안돼!'
"셀리나 그만!"
강렬한 셀리나의 따듯한 기운 한편에 그 남자의 기운이 섞여 들기 시작했다. 서로의 자리를 빼앗는 듯이 치고받는 듯한 싸움은 없었지만 그 기운이 매섭다. 셀리나의 흐름이 남자의 흐름에 삼켜지기 시작하며 그녀를 향해 가던 생령방울이 목적지를 잃고 멈춰 섰다.
'뭘 해야 하지... 뭘 할 수 있지? 어떻게...'
갑자기 머릿속에서 무언가 떠오른다. 천성이와 함께했던 날들이 생각났다. 신적 존재들조차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천성이의 죽음이었다면, 내게 무엇인가 힌트 같은 것을 줬을 거야. 기억해내야 해.
"편집자 셀리나, 그만해. 창조자의 부름에 응하지 않는다면 그 대가가 있을 거야. 너도 만들어진 존재라는 걸 잊지 마."
"크리스, 방해할 시간에 전달자나 데려와. 리셋, 상관없어. 이미 망가진 시간선에 무엇을 하든 상관없지 않아?"
천성이는 기억을 봉인당했지. 세계의 진실을 알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어떤 진실이었을까. 이사회가 시간을 덧 씌운다고 했었지. 그렇게 계속 반복해 오면서 세계의 멸망을 막을 시간을 찾는다고 했어. 마침 그 시간선을 찾았지만 이미 도시가 없어진 뒤의 시간이라는 거지.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셀리나는 종말 자체를 지워버리고자 해서는 안될 개입을 해버렸고, 천성이의 죽음으로 변수가 되어 지금의 시간선에서 미래엔 종말을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불확실한 상태가 되었어. 이걸 막기 위해서 저 남자가 나타났다는 거야.
'이러니 저러니 해도 마찬가지야. 이미 일어난 사건을 맞이하는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야. 나는 지금 뭘 할 수 있지? 변수가 되어버린 천성이의 죽음과 생령방울에서 내가 뭘... 어떻게...'
"함부로 말하지 마. 세계는 장난감이 아니야. 그들도 하나의 삶이라는 것이 있다고. 천년이 하루 같은 우리에겐 짧아도 이들에겐 달라. 내가 봐주는 건 여기까지야. 그만하고 돌아가, 셀리나."
'소리?'
내가 각성 아닌 각성을 한 것도 변수에 포함되는 것일까? 셀리나는 내가 소리나 속마음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시간이 멈추었다면, 시간이 다시 흐르게 되었을 때 멈추기 전에서 멈춤이 풀어진 후로 바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 틈 사이의 것은 전혀 기억할 수 없어. 그런데 나는 어떻게 이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거지? 시간과 시간의 사이에서 숨도 쉬어지지 않고, 몸도 움직이지 않고, 눈을 뜨고 있지만 볼 수 없는 상태로 말이야. 이것도 변수인가?
'소리... 소리... 내가 여기서 말을 한다면... 애초 말을 할 수 있나?'
"가서 책임자에게 전해. 더 이상의 리셋은 없다고. 어차피 리셋을 해왔던 것도 이들의 삶 따윈 안중에도 없는 거 아녔어? 특이점이 없다면 리셋을 반복하던 모습은 어디 갔나? 위선은 너도 마찬가지야. 가식 떨지 마, 크리스."
당연히 가능할 리가 없었다. 시간이 멈추었다면 상식의 모든 것이 멈추었다는 거다. 하지만 시간과 시간의 틈에 그들이 대화를 듣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있는 힘껏 소리를 내보려 노력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목에 어떤 감각도 없다. 마치 충전되지 않은 배터리가 전원을 켜려 노력하는 것 같다.
'하지만 해야 해. 또 다른 변수를 만들어 내려면 반드시 뭐든 해야만 해.'
"뭐? 더 이상 할 말이 없군. 이도저도 아닌 모양새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여기서 그만하자. 그만 끝내자. 주체 못 할 내 힘 어디 한 번 감당해 봐. 소멸할 수 있으니 조심해. 차라리 내 부름에 응하는 것이 나았을지도."
"영원의 금제에 강제되는 것보다 소멸당하는 게 낫지. 내 마지막을 이곳에서 마무리하게 되다니... 이상한 기분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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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돼. 불가능해... 아니야, 할 수 있어.'
"역시 신은 달라."
또 다른 목소리가 등장한다.
"하마터면 늦을 뻔했어. 신과 신이 싸운다는 소식에 얼른 왔지. 창조자 크리스, 편집자 셀리나. 그만해."
"카밀라, 여긴 어떻게 왔어?"
맹렬했던 그들의 힘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둘 다 그만해. 일 끝났으니까. 셀리나가 이곳저곳 건드려 놓은 시간선이 어마어마해서 치우느라 애 좀 먹었지만, 다 했어. 그 아이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정리했어. 그 아이를 기억하고 있는 모든 존재의 기억에서 사라질 거야. 리셋은 면한 것 같아. 하지만 종말의 유무는 책임자와 이야기를 해봐야겠지. 셀리나, 그만하고 돌아가자."
"뭐? 어차피 결국엔 내가 하려던 일과 똑같잖아. 크리스, 카밀라. 너희끼리 팀이고, 나는 적이야? 결국엔, 결국엔 바뀐 게 없잖아. 내가, 내가, 한 일이 그건데. 그 아이가 변수였던 거라고. 내가 말했던 거잖아!! 종말의 유무라고 해봤자 종말의 미래가 발견되면 어차피 리셋할 거면서..."
"... 하지만 개입은 안 돼."
"기억 조작도 개입이야. 마치 너희가 한 것은 정당한 일이고, 내가 한 일은 정당하지 않다는 것처럼 들리네. 나는 돌아가지 않아. 책임자에게 가서 말해. 나는 끝까지 개입하겠어. 너희끼리 돌아가. 나는... 너희 팀이 아니니까. 아니, 너희 팀이고 싶지 않으니까."
'뭐라고? 내 기억에 천성이가 사라진다는 건가? 천성이를 기억하는 모든 존재의 기억 속에서 그가 사라진다고? 내 기억도...'
천성이와 함께했던 시간은 짧았지만, 지금까지 잘 간직해 온 시간들인데 이렇게 사라지는 건가. 아냐, 절대로 그럴 수 없어. 절대로!
'절대 안 돼. 안돼안돼안돼안돼, 안돼, 안돼안돼!!'
분명 소리가 났다. 분명 소리가 들렸어. 내 목소리였어.
'조금만 더, 크게. 더 크게!'
"잠깐만, 기억 조작을 방해하는 존재가 있어."
"책임자?"
"아니야, 조금 달라. 우리와 같은 존재는 아닌 것 같아."
"누구지?"
"자연스럽게 잊어버리는 것이 정상인데, 의도적으로 기억하려고 해. 이렇게 강한 저항은 처음이야. 기억의 농도와는 달리 존재가 너무 희미해. 더 강한 힘을 썼다가는 부서져버릴지 몰라. 어떡하지?"
'안돼! 안돼!'
"그러면 남겨 놓을 수는 없어? 존재가 희미하다면 남겨 놓는 것쯤은 상관없을 것 같은데?"
"기억을 하는 것과 기억을 조작해서 남기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야. 기억을 조작해서 남기는 건 모두 자연스러운 망각에 의한 조작이야. 옛날에 그랬던 것 같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기도 한 범위 안에서 조작이 가능해. 하지만 의도적으로 기억을 하는 것은 확실한 기억이야. 셀리나가 말했던 것처럼 변수가 될 수도 있어. 시간선의 개입으로 끝나지만은 않을 거야. 종말이 아니라 애초 우리가 통제하지 못할 수도 있어. 이건 책임자와 반드시 이야기해야 해. 일단 시간을 멈춰두자. 우리가 예상 가능한 선을 넘어 세계 전체가 위험하게 확장될 수도 있어. 확장에 휘말리게 되면 그동안 우리가 선택해 온 기억의 창고가 세계를 잠식해 버릴 거야. 우리도 삼켜지겠지. 그땐 누구도 막을 수 없어. 우리라도 해도 말이야."
"... 어쩔 수 없나.."
"셀리나, 돌아가자."
"그래. 이 정도로 상황이 심각할 줄은 몰랐어.. 일단 돌아가는 게 맞겠지."
'안돼, 이대로 돌아가면 천성이는? 영원히 사라지잖아...'
"안돼!"
몸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간다. 그게 아니라 목소리에 내 힘이 모두 휩쓸려 나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