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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곳

우주시민, 그리고 지구시민

by 라나뜨

위험해 보이는 기기들의 활발한 움직임이 압도하는 듯하다. 소란스럽다기보다는 오히려 편안한 느낌이다.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내가 이런 곳에서 눈을 떴는지, 모든 것을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점은 이런 질문이 내겐 소용없다는 것이다.


"Right."


잔잔하고 평화로운 백색소음 사이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가만히 누워 그 목소리의 주인을 찾으려 시선을 쫓았지만 그저 복잡한 와이어와 전선들이 꼬이고 꼬인 검은 천장뿐이었다.


"Right."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가 똑같은 어조, 똑같은 높낮이, 똑같은 말투로 말을 반복했다.


혹 내가 따라 해야 되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눈동자를 오른쪽으로 굴려본다.


"인지 확인, 다시 Right."

이번에는 조금 다른 단어를 말하는 듯싶더니 또다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그.

"Right."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몸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손이나 발을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뇌에서 온몸 곳곳에 움직이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무언의 것에 가로막혀 움직이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여기서 뭘 어떻게 하나는 거지, 움직일 수 있는 건 눈 밖에는 없는데...'


"Right."

내가 답답한 듯 이전보다는 조금 격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눈이 아니라면 이번에는 입을 움직이려 오밀조밀 반응해 보았지만 미동조차 없는 몸에 이제는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어쩔 수 없네요. 듣고 있다고 답은 해야 되니까 눈이라도...'

방금과 똑같이 시선을 오른쪽으로 옮겨본다.


"동작 확인."

그는 다소 격양된 말투로 내 움직임에 반응했다.

"Left."

이번에는 새로운 단어가 등장했다.


똑같이 눈동자를 왼쪽으로 끌어본다.


"이해 확인."


기- 지잉. 기- 지잉.

날카로운 기계 소리와 함께 천장을 바라고 있는 시야 끝에서 새로운 벽이 등장하고, 어느새 천장은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새로운 공간이 느껴진다.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을 때는 아무것도 몰랐는데, 이렇게 다시 보니 내 주위로 각양각색의 네온사인과 일련의 숫자들, 그리고 방대한 데이터와 함께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래프와 수치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나타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보인다.


"A."

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여전히 그의 시선은 딱딱한 기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A?"

무슨 움직임을 원하는 것인지 고민하고 있던 찰나 내 입에서 소리가 나왔다는 사실에 뒤늦게 놀랐다.

"어? 목소리가..."


"통제 확인."

무언의 것에 가로막혀 미동 없던 몸에 미세한 떨림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힘이 들어가고, 힘이 풀리며 근육이 수축되고 이완되기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내겐 관심 없는 저 사람이 무언가 내게 조작한 것이 틀림없다.


"Right."

처음 들었던 그 단어 그대로 내뱉는 그의 입은 새로운 패턴을 소개했다.


기계에 꽉 붙잡혀 움직일 수 없는 내 앞으로 투명한 막이 내려오더니 오른쪽과 왼쪽, 이렇게 두 개로 나뉘며 갈라진다.


'선택하는 건가 봐. 오른쪽, 왼쪽?'

"오른쪽."

딱히 별다른 고민 없이 그가 말했던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화답했다. 내 움직임을 인식한 것처럼 LED가 파란색으로 빛났다.


"B."

맞는 답을 고른 것 같은데 확인되었다는 말은 없고, 그는 새로운 단어를 꺼낸다. 남자가 몇 가지 버튼을 누르는가 싶더니 투명한 막이 이번엔 A와 B로 나뉘어 갈라진다.


이번에는 반대로 A를 선택했다. 하지만 내 의지와는 달리 고개가 움직여지지 않는다. 혹 말로 하는 것일까 말을 하려 목에 힘을 주고 공기를 뿜어보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A)--."


"어? (A)--. (A)--."

아무리 노력해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입만 오므렸다 벙긋 커지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

심기를 건드린 듯한 얼굴로 그 남자가 날카롭게 나를 쳐다본다. 그의 표정에서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B."

다시 내게 기회를 주는 듯한 남자.


이번에는 B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가 모호한 얼굴로 내게서 기계로 시선을 옮겼다.

_{바디 코어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입력 계수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_{바디 코어 이상, 입력 계수 ;[50%] ...


"이상 있군."

뭔가 잘못된 것 같다. 그가 도출된 결과를 받아 얇은 패드에 이어받는다.


_{ERROR/...


"아쉽군."

뭔가 할 말 많아 보이는 그의 얼굴에서 아주 희미하지만 분노가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내게 말해줘도 나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너의 임무 코드는 [------]이다."


'코드 [------]...'

내 머릿속으로 작은 정보가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가 기계에서 무언가를 조작해 그 정보가 새로운 나를 정의하도록 만들었다. 작은 데이터 조각이었지만 그저 흰 바탕의 빈 깡통 존재였던 내게 새로운 존재로의 정의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회오리로는 충분했다.


_{접근 완료. ...


"현재 너의 분류는 [예비]다."

그의 눈동자가 붉게 변한다. 옆에 있던 기계를 두들기더니 무언갈 확인하고 뒷 말을 있는다.

"모든 가능성은 확인되었다. 할당된 임무는?"

'눈이 붉게 변했어. 아마도 그는 [인간]이 아니겠지. ...어?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어디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오른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새롭게 정의된 내가 만들어낸 것일지도.

"임무 확인했습니다."


"..."

그가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본다.

'쓸데없이...'

"아니다. 정비소에서 장비를 갖추고 배치된 구역으로 이동하도록."

그의 혼잣말이 들린 것 같다.


"정비소요?"


"다음, -"

그는 내 물음을 듣지 못한 것 같다.

굳어 움직이지 못했던 몸에 활력이 돋아나는 듯 생기를 되찾는다. 기계에 붙잡혀 매달려 있었다는 사실에 부끄러운 감정이 몰려들면서도 아무 생각 없이 마치 하나의 실험체를 대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현실을 직시했다.

'맞아, 난... [인간]이 아니지. 명령에 따르도록 설정된 개체일 뿐이야. 괜한 감정은 위험해.'

새롭게 정의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분명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겉만 번지르르한 속은 깡통뿐인 존재였다.


auto_{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기계에서 내려오자 작은 큐브가 나를 맞이한다.

지지대나 거치대 없이 허공에 홀로 떠있는 작은 큐브를 따라 좁은 복도를 나아간다.

길고 긴 복도,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 속 우리는 걸을 뿐이었다. 지문 자국 하나, 사람 한 점 보이지 않는 작 닦인 유리창 너머로 내가 있었던 곳과 비슷하게 움직이고 작동하는 기계들이 즐비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마어마한 규모에 입이 벌어진다.


'엄청 크네... 이런 시설이 [도시]에 있었나?'

계속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정보들이 떠오른다.

"잠깐.. 혹시, 질문이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낯선 공간에서 나를 안내하던 큐브에 물었다.


auto_{필요한 것이 있습니까? 말씀하세요.

큐브가 내 곁에 아주 살짝 다가온다.


"방금 저 사람은 누구야?"


auto_{죄송합니다, 본 시설에서 활동 중인 개체에 관하여는 제가 답해드릴 수 없습니다. 다른 질문 있습니까?

감정 없이 프로세서에 의해 정해진 것만 답하는 큐브가 이곳에 더욱 나 혼자만 있다는 것을 환기시켜 준다.


'답해 줄 수 없다는 건,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정해져 있다는 거겠지. 이건 아마 윗분들의 의도된 사항일 거고..'

하나하나 생각할 때마다 새로운 정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럴 땐 가장 기초적인 질문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았다.

항상 그랬듯.

"이곳은 뭐 하는 곳이야?"


auto_{이곳은 연방정부의 안전한 도시 운영을 위해 설립된 안전통제협력국입니다.


"아.. 연방정부의 안전통제협력국..."

딱히 내게 중요한 정보는 아니다.

"우리가 지금 가는 곳이 정비소지? 거기는 뭐 하는 곳인데?"


auto_{말 그대로 코드를 지정받은 요원들이 임무를 진행하기 위한 장비를 갖출 수 있는 곳입니다. 아무래도 크리쳐의 공격이 거세지는 이때에 제대로 무장하지 않으면 위험하니까요. 하여튼, 임무에 필요한 무기를 정비할 수 있고, 크리쳐의 공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줄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나처럼 코드를 지정받은 사람들이 임무 진행을 위해 필수적으로 찾는 곳이라는 거네. 내게 필요한 장비가 있을까? 듣기로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 왠지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auto_{듣기로는? 무엇을 들었습니까?


"듣기로는 괴상하고 뾰족한 기계들만 있다고 하던데?"

최대한 이상하게 보이지 않도록 둘러서 답했다.


auto_{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습니까?

사람의 얼굴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손이 있는 것도 아닌 단순한 작은 큐브였지만 불쾌감이 내게도 전해진다.


"나도 몰라. 그냥 책에서 본 거야."

'잠깐... 나 실수한 것 같은데?'

모르는 척 내빼려던 것이 오히려 내게 독이 된 것 같다.


auto_{책? 분명 책이라고 들렸습니다만,


"VCP 말하는 거야. 책은 무슨..."

잘 넘어갔기를 바라며 서둘러 다른 주제로 넘어가야 했다.

'이 이상 이 주제로는 대화하기 힘들겠어. 무슨 꼴이 날지 몰라.'

"빨리 가자, 정비소 궁금하다."

나는 걸음의 속도를 높인다.


그 큐브가 내 속도에 맞춰 빠르게 정비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저 창 밖을 바라보는 것뿐이었지만, 정비소의 규모에 압도당했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거대한 규모에 약간 황당한 것 같다.


창을 내려다보며 걸음을 멈춘 내게 큐브가 다가와 말한다.

auto_{문제가 있습니까?


"생각보다 엄청난 것 같아서... 크리쳐라 함은 [우주]적 존재잖아? 나는 지하 벙커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작지만 강한 정비소를 생각했거든. 하지만 이건, 정비소가 아니라 거의 산업 공장이잖아."


하늘을 가리듯 높이 솟아오른 기둥들과 바닥이 보이지 않게 빼곡히 밀집된 공장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사람은 보이지도 않게 공장이 활성화되어 있었고, 복잡하게 연결된 공장들 사이 아주 잠깐씩 로봇들이 보일 뿐이었다.


auto_{정비소는 어떤 정비소여야 합니까?

큐브는 이해할 수 없다 반응했다.


"굳이 어떤 정비소가 진짜 정비소냐가 아니라 그냥 내 예상과는 너무 달랐을 뿐이야. 동시에 임무가 얼마나 위험할까라는 생각도 드네."

대규모 정비소에 시선을 빼앗긴 채 창 밖만 바라보다 다시 앞으로 큐브를 따라간다.


auto_{임무의 위험도는 클래스마다 다르긴 합니다만, 먼저 3차례에 걸친 연방정부의 사전 조사 이후 관여부에서 클래스에 따라 재배치하여 임무 리스트에 추가되는 절차를 가집니다. 이후 요원이 배정됩니다.


"클래스?"

새로운 단어가 등장했다.


auto_{임무 요원의 단계를 뜻하는 말인데, [정예], [일반], [예비]로 총 세 개의 클래스로 나뉘고, 이 중 요원님의 클래스는 감사관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예비] 요원이십니다.


'아까 그 사람이 감사관이었구나. 조금 더 대화하다 보면 내가 알고 싶은 진짜 답도 들을 수 있겠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클래스마다 임무가 다른가? 위험도도 다르겠지?"


auto_{생명의 위협이 있을 정도로 위험하지는 않습니다만, 클래스가 높을수록 생각하고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아진다고 보면 됩니다. 그것이 위험도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뭐야, 그러면 나는 일반적인 임무보다 쉬운 건가?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데...'

침울해진 것도 잠시, 정비소에 도착했다.

"그렇구나. 답 고마워."


| TC-S 광역 보급 정비소

'보급 정비소'라는 이름이 큼지막하게 적혀있어 구역을 나누고 있다. 안내문구를 보니 방금 내가 넘어온 곳은 'TC-M 통합설계 연구소'인 것 같았다.


'통합설계 연구소... 아마 나처럼 요원들이라 불리는 개체를 생산하는 곳이겠지. 감사관의 안내에 정확히 따른 개체는 클래스가 높아지고, 나같이 중간에 삐끗한 개체는 클래스가 낮아지는...'

감히 한눈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규모의 기계들이 정해진 길을 따라 위험하게 동작하고 있었다. 안전구역 없이 그저 산개된 초거대 장비들 사이로 나와 비슷한 처지의 또 다른 사람들이 보인다.

"저 무리도 요원들인가?"


auto_{노란색 작업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은 요원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고 임무로 파견하는 보급 정비소 소속의 헬퍼이고, 초록색, 검은색, 빨간색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임무 클래스 각각의 연방정부 소속의 요원들입니다. 빨간색 유니폼이 요원님과 같은 [예비] 요원입니다.

큐브가 정비소 깊숙이 들어가며 계속 길을 안내하다 어느 비좁은 구석에 내려앉는다.


auto_{먼저 임무를 확인하겠습니다. 요원님께 할당된 임무는 총 1건으로 연방정부 중앙광장에서 일어난 시위대를 진압하는 사회정비 임무로 1시간 대기 이후 바로 임무에 투입됩니다. 바디와 장비, 무기는 옆에서 커스텀하면 되겠습니다.

바디부터 장비, 무기 모든 것을 커스텀해도 된다는 말에 내 모습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감사관과 함께 있었던, 내가 생성되던 그때부터 나는 온전한 몸이랄 것이 없었다. 오직 정신만 깨어있어 이 작은 큐브를 따라가던 때도, 복도를 지날 때도, 창 너머 정비소를 바라볼 때도, 정비소에 들어올 때도, 나는 큐브와 같이 허공을 유랑하며 존재하고 있었음을 느꼈다.


'아, 맞다. 난 [인간]이 아니지... 애초 그럴 목적도 없었는 걸. 어쩌면 다행인가? 이전의 나였다면 내 모습을 보고 미쳐버렸을지도 몰라.'


auto_{예비 클래스는 바디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성인-체형으로 고정됩니다.

작은 큐브가 수많은 수치와 데이터 사이에서 체형을 선택했다.


"체형이 성인 말고도 더 있어?"

홀로그램 속 빠른 속도로 생성되고 더 빠른 속도로 소모되는 데이터들을 바라본다.


auto_{체형은 임무의 복잡도와 연결되어 있으며 체형이 어려질수록 임무에 대한 높은 데이터를 동반하기에 연방정부는 클래스가 높을수록 청소년-체형을 가급적 추천드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클래스보다 비교적 정신과 육체의 수준 차이가 있는 [예비] 요원들에겐 성인-체형이 더 안전합니다.


'뭐가 어떻든 내가 일반 요원보다 못하다는 거잖아. 정신과 육체의 수준 차이? 결국엔 정예 요원이 더 월등하고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에 선택의 자유도 더 좋다는 말이겠지. 역시 연방정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다소 과격한 나의 생각에 흠칫 놀랐다. 딱히 듣고 싶었던 말은 아니었지만, 감정을 이해할리 없는 큐브 따위가 뭘 알겠느냐 마음만 상했다.

'좋게 생각해야지 뭐.. 뭘 어쩌겠어...'


auto_{다음으로는 무기를 선택하겠습니다. 딱히 제한되는 조건은 없으므로 준비된 것들 중에서 선택 혹은 커스텀 가능합니다. 레이딩 컨트롤의 경우 요원님은 대상자가 아니기에 지원해 드릴 수 없습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고정이 아니라 선택할 수 있었다.


"다 비슷비슷하게 총 아니면 칼이네. 커스텀이라는 건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는 것이겠지."


auto_{맞습니다. 총은 원거리 공격이 쉽지만, 세심한 컨트롤이 필요함과 동시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어려움이 있습니다. 칼은 단거리 공격임에도 세심한 컨트롤이 필요하지 않고 다수의 적에도 비교적 상대하기 편합니다. 커스텀의 경우 원하시는 그 어떤 종류의 무기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이전에 만들어지지 않았던 무기라면 설계도 없이 생각대로의 퀄리티를 보장할 수 없고, 공격 데이터 또한 존재하지 않아 정확한 지표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총으로 할게. 레이딩 컨트롤이 없는 마당에 커스텀은 도박인 것 같아서."

총이 편할 것 같다. 장전 시간이 조금 길다는 것만 빼면 내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는 적들이 다가오기 전에 쏘면 되니까.

나는 큐브의 안내와 홀로그램의 지시에 따라 제작되는 바디와 무기에 접속했다. 감사관의 목소리만 들려오던 그곳에서처럼 낯선 곳에서 눈을 뜬다. 이번엔 제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직접 다리를 움직여 발로 걷고, 팔을 들어 손을 움직이는 등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볼 수 있었다.

천천히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발을 내딛어 본다.


auto_{모든 정비가 끝났습니다. 이제 인기어로 임무 리스트를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임무 실황과 다른 요원들과 연결되어 있으니 참고가 될 겁니다. 임무 투입까지 40분 남았습니다. 자세한 임무 리스트를 확인하여 중앙광장으로 이동하세요.

큐브가 따라오라며 나를 인도한다.

인기어를 통해 본 임무 지역은 안개로 자욱해진 중앙광장을 비추고 있었다. 안개라는 특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연방정부의 투명한 실태를 바라며 시위하고 있었다.


auto_{첫 임무를 위한 기초 교육을 실시하겠습니다. 임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요원의 책임입니다. 범죄자를 감시하고 처단하는 것부터 시민을 안전하게 지키고 보호하기까지 전부 요원의 선택과 행동입니다.


큐브의 말을 천천히 듣는다.


auto_{무기를 사용하고 싶을 땐 사용하세요. 하지만 타깃이 아닌 시민일 경우 연방정부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클래스에 따른 차별 없이 모두 똑같이 시민을 안전하게 지키고 보호하지 못했다면 모든 책임은 요원에게 돌아갈 겁니다.


괜스레 임무가 걱정된다. 연방정부에서 정해주는 임무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과 선택이 요원의 책임이라는 건 연방정부는 요원들의 행동에서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고 손을 떼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무슨 상황이 생겨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거나 사망해도 연방정부는 모르는 일이라는 것이다.


"위험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었나?"


auto_{맞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어깨가 무겁다. 부담을 주는 말인지, 걱정돼서 하는 말인지 연방정부의 속내를 모르겠다. 하지만 바뀌지 않는 진실은 연방정부는 여전하다는 것이다.


"또 주의해야 할 것이 있을까?"


auto_{없습니다. 교육은 여기까지입니다. 임무의 완벽과 시민들의 안전한 세상, 그리고 크리쳐로부터의 세계 탈환까지 최선을 다해주세요.

큐브는 교육을 종료하고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간다.


정말 이제는 나 혼자 남았다. 다른 요원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그들 나름의 임무가 있고, 그들 나름의 활동과 지키고자 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임무 투입까지 20분 정도 남았네. 연방정부 중앙광장이라면, 하필 사람도 많은 곳에서 시민들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시위를 벌이고 있을까?'

인기어로 확인한 임무 리스트로 세부 사항을 알 수 있었다.

'인권 단체와 반정부시민집회가 예정되어 있었구나. 이것을 허가한 연방정부도 대단해. 어차피 요원들을 동원해 진압할 생각이었다면 굳이 허가할 이유가 있었나? 250만여 명의 시민 밀집을 예상했었고, 한정된 공간에서 시민의 안전과 질서 유지를 위해 요원들을 투입하지만 원래 목적은 시위 무력화, 시위 강력진압이라는 걸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임무 투입을 위한 이동까지 시간이 남아 주위를 돌아보기로 했다.





나는 과거 정거장을 향해 꿈을 키웠다. 그곳에 가고 싶어서 연방정부에 지원한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기억을 잃고, 이렇게 요원이 되어 아직도 지구에 남아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쩌면 연방정부에서 조작했을지, 아니면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새롭게 정의된 내가 만들어낸 허상일지도 모르겠다. 천천히 기억이 돌아오고는 있다지만 아직 정확한 건 없다.


"서류 심사에서 아쉽게 떨어졌고, 수술하면 갈 수 있다는 말에 기뻤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 하지만 그 뒤로..."


마지막 최종 서류 심사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정거장은 물론이거니와 엘리베이터는 꿈도 못 꾸게 되었다. 언젠가 갈 수 있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에 검은 하늘 위 태양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거대한 우주 정거장에서 꿈을 이루고 돌아다니는 상상 했었다.


우주-시민은 지구-시민과 때깔부터가 달랐다. 노화는커녕 탱탱하고 매끈한 피부에 아무리 달려도 지치지 않는 체력과 무서울 정도로 튼튼한 체격까지. 하지만 수술은 불법이었다. 연방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미개한 집도라 일컬어지는 불법 수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수술을 남모르게 받았다고 하더라도 연방정부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주-시민권자가 되기 위해서는 말은 간단하지만 전혀 간단하지 않은 아주 간단한 면접이 하나 있다.

바로 자신이 우주-시민이라는 것을 증명하면 된다. 즉, 우주에서 태어난 사람들만, 우주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후손들만 우주-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지구에서 나고 자란 지구-시민은 전혀 신경 쓰지 않겠다는 연방정부의 실태다.


나는 조용히 정비소 한쪽 길게 줄을 지은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본다.

검은 하늘과 저 넓은 하늘 끝,

'가고 싶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저 넓은 우주로.. 나도, '


갑자기 정거장의 캐치프레이즈가 생각난다.


아무도 없는 곳, 느껴봐. 검은 우주.

Nothing, Feel it!


어느새 내 시야에서 정거장이 사라져 버린다.

"이젠 진짜 아무것도 없네, 갈 수 없는 그곳."

조용히 하늘을 보며 나만의 세계에 빠져든다.


탕!

갑자기 들려오는 총소리에 비명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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