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인은 우리나라 현대 문학의 가장 대표적인 시인이라 할 것이다. 그는 1915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마을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한 후 1935년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을 한다. 이듬해인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라는 시로 당선이 되어 본격적인 시인의 길을 걷는다. 1941년 첫 시집 ‘화사집’을 출간한 이래 시인으로서 확실히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 글에서는 서정주의 가장 대표적인 시를 바탕으로 그의 시에 나타나는 삶의 단면을 살펴볼까 한다.
<꽃밭의 독백(娑蘇의 斷章)>
노래가 낫기는 그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
활로 잡은 산돼지, 매로 잡은 산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 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사소(娑蘇)는 길을 나섰다. 구도자가 되어 영원한 절대 세계를 열망하여 그 길을 나섰다. 그녀는 인간, 그 인간의 한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한계를 넘어서고 싶었다. 그녀가 바라는 마음속의 세계는 무궁하건만, 인간의 유한성 그 한계 안에 갇혀 그것을 넘어서고자 그저 길을 나섰다.
커다랗게 노래를 불러보아도 멀리 가는 듯 하나 구름 너머를 벗어날 수가 없고 아무리 빠른 말을 타고 달려도 바닷가에 이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산에 가서 잡은 멧돼지, 금방 날던 새를 잡아먹어 보아도 새로움이 없었다. 사소는 이제 인간의 유한성에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았다.
아침마다 피어나는 꽃을 보니 자연은 영원하건만 어찌하여 인간은 이리도 유한하단 말인 것일까? 그 자연과 하나가 되어 인간의 한계를 넘고 싶건만 왜 이리도 힘이 든단 말인 것일까?
결국 사소는 그저 문에 기대어 서서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영원에 대한 갈망은 멈출 수 없어 소리 내어 울부짖었다. 그 한계를 막고 있는 문을 열어달라고. 그녀의 열망을 꽃은 알아듣기나 하는 것일까? 사소의 그 열망은 그녀가 낳은 박혁거세에 이르러 이루어졌을까?
삶은 어쩌면 한계를 느끼고 그 한계를 깨려 노력하는 과정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사소는 그것을 알았던 것이 아닐까?
<동천>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살아가면서 우리가 쏟아붓는 수많은 시간의 노력은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일까? 낮이건 밤이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던 우리의 인생은 어느 정도의 의미가 있는 것일까? 살아오는 순간마다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애를 썼고 그 선택으로 인한 책임으로 나의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살아왔건만 우리의 그러한 삶의 시간들은 우리 자신에게 무엇을 돌려주었을까?
삶의 많은 것들을 위해, 그것이 사랑이건, 자신만의 궁극적 목표이건 나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름대로의 그러한 노력은 어느 정도의 보람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일까?
이제는 우리의 그러한 삶의 노력들을 하늘에 맡길 때가 된 것은 아닐까? 주어진 시간이 많이 남지 않기에, 앞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그리 많지 않기에, 이제는 그동안 노력의 결실을 보고 싶을 때도 된 것은 아닐까?
다만 바라는 것은 지나온 시간들의 그 많은 노력과 애씀을 하늘도 어느 정도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만약 그것마저 없다면 그동안의 모든 선택과 최선이 너무 허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힘이 센 운명이라도 우리의 남은 시간을 위해 어느 정도 비껴갔으면 한다. 이제는 그러한 것에 맞설 수 있을 만한 여력이 없는 것 같다. 삶은 나의 힘과 능력에 비해 너무나 크다.
<귀촉도>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 리
신이나 삼아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하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너무나 울고 싶은 날이 있다. 가슴이 미어터지도록 울고 싶은 날이 있다. 나의 울음은 소쩍새의 그것과 공명이 되는 것 같다. 너무나 서글픈 울음이다.
한밤중 산속에서 들리는 소쩍새의 울음은 무슨 사연일까? 나처럼 소쩍새도 그리 슬픈 일이 있는 것일까? 울어서 지칠 때까지 끝없는 그 아픔은 왜 그리도 잔인한 것일까?
나의 모든 것을 잃었기에, 다시 돌이킬 수 없기에 나의 슬픔은 극한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며, 그 누구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그래서 절대적인 슬픔인 것 같다.
그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서역으로 삼만 리, 파촉으로 삼만 리,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아무리 소리쳐도 대답도 없고, 아무리 손을 흔들어도 반응조차 없다. 그저 그렇게 떠나가 버렸다. 그래서 삶은 비극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먼 길을 갈 줄 알았으면 초라한 신발 한 켤레라도 마련해 줄 것을 그마저 해주지 못했다. 머리카락 한 번만이라도 더 만져나 볼 걸 그것도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어쩌랴, 다 부질없는걸. 희망조차 품을 수 없고 그리움도 사치에 불과한 것을. 나는 그저 그렇게 밤새워 목놓아 우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소쩍새가 밤새 우는 것처럼.
<신부>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앞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습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오해는 우리의 인생에 있어 비극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그 오해를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오해를 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자아가 너무 강할수록 오해의 소지가 커질 수 있다. 자아가 강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옳고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해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오해가 사소해서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고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 잘 풀리면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경우에는 그 오해가 생각대로 해결되지 않고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 우리 인생의 커다란 문제를 일으키고 전혀 생각지도 않은 비극으로 끝날 수도 있다.
사소한 오해가 커다란 문제로 증폭될 수 있는 것은 우리 삶에 있어서 수많은 변수가 곳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리학에 보면 나비효과라는 것이 있다. 아마존 강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수많은 변수로 인해 중국의 만리장성을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가능할까? 충분히 가능하다. 카오스 이론이 이를 분명히 증명하고 있으며 우리 현실에서 언제든 일어나고 있다.
삶의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 사람들 주에 어떤 사람과의 오해의 시작은 별것이 아니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혀 예상치 않은 변수를 만나 엄청나게 커다란 문제로 비화되기도 한다. 그 오해가 일어났을 때 얼른 풀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돌이킬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는 왜 그때 오해를 풀지 않았을까 후회를 하는 것이다.
신랑의 작은 오해는 평생을 같이 살아가야 할 부부관계의 파멸을 불렀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으니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을 것을 그렇게 40~50년이 지나가 버린 것이다. 그 많은 세월의 한을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의 삶은 돌이킬 수 없다. 한번 지나간 세월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화려한 삶을 꿈꾸는 것보다는 실수가 없는 삶이 더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오해는 삶의 커다란 아픔을 불러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