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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송화

by 지나온 시간들

어릴 적 우리 집 앞마당에는 채송화가 피어 있었습니다. 노랑, 분홍, 빨강, 여러 가지 색깔로 피어난 채송화를 한참이나 바라보곤 했었습니다. 채송화는 화려하지도 않고 키가 크지도 않았습니다. 땅바닥에 바짝 붙어 피어나는 채송화는 눈이 그리 띄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너무 약해 조금만 건드려도 쉽게 부러지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학교에 갔다가 대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오면 앞마당에 나란히 피어 있는 키 작은 채송화가 제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습니다. 너무 약한 채송화의 모습에 마음 아파 수돗가에 가서 물을 떠다 주곤 하였습니다. 새로 피어난 것은 없는지 한참이나 살펴본 후 방으로 들어가곤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강한 것도 존재하지만, 약한 것도 존재합니다. 채송화는 어찌 보면 정말 약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채송화는 운명적으로 약하게 태어났습니다. 약하게 태어나고 싶어서 약하게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운명처럼 그렇게 주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강하고자 하여도 강할 수가 없고, 운명을 벗어나고자 하여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채송화로 태어나 며칠 동안 꽃을 피우고 다시 지고 마는 그런 운명입니다.


강하고자 하여도 강할 수가 없는 것, 운명을 바꾸고자 하여도 바꿀 수 없는 것, 그것이 어찌 보면 삶의 원리일지도 모릅니다. 주어진 자신의 운명을 통째로 바꿀 수 있는 그런 존재는 이 세상에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운명을 어느 정도는 바꿀 수가 있겠지만,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최선의 노력으로 강해지고자 하지만 그것도 정도의 차이에 불과할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약한 것만큼 마음 아픈 것은 없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내가 소중히 여기는 존재가 채송화처럼 약하지 않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보란 듯이 이 세상에서 우뚝 서기를 소망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소원을 더 이상 마음에 품고 있지는 않습니다. 대신 제 자신이 좀 더 강해지려고 합니다. 제가 강해진다면 비록 약하지만 소중한 존재를 지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약하면 약한 대로 그냥 품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강하기를 바라지 않고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 존재에 대한 존중이 아닐까 합니다.


어제는 아버지를 모시고 인지검사를 했습니다. 약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오래전 갓난아기였던 아이들 생각이 났습니다. 세 아이를 다 키우고 났더니 이제 다시 부모님이 아이가 된 듯합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압니다. 약한 존재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 질긴 인연의 숙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뿌듯합니다.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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