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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Sep 10. 2023

녹색이와 푸름이(동화)

  “푸름아, 사람들은 우리를 애벌레라고 부른대. 이름을 지어주려면 좀 멋있게 짓지. 너무 마음에 안 들어.”

  “녹색아, 난 그런 것 하나도 상관하지 않아. 다른 이들이 어떻게 부르건 말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근데, 푸름아. 도대체 우리는 왜 이리 느린 걸까? 아무리 빨리 가려고 해도 갈 수가 없어”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런데 진짜 다리는 이렇게 많은데 아무 소용도 없는 거 같아. 이 많은 다리를 움직여도 가는 거 같지가 않아.”

  “푸름아, 넌 그래도 색깔은 이뻐. 난 완전 녹색이라 멋이 하나도 없어.”

  “녹색아,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넌 진짜 복 받은 거래. 풀잎하고 색깔이 같으니 새들이 너를 찾지도 못할 거래.”

  “근데 새들은 왜 우리만 좋아하는 거야, 털도 있고 다리도 흉측하게 이리 많은데.”

  “그네들도 힘이 없어서 그러지. 우리는 더 힘이 없어서 새들한테 먹히는 거고.”

  “푸름아, 이쪽으로 와. 거기는 조금 있으면 햇빛 때문에 더울 것 같아.”

  “나도 그쪽으로 가고 싶어. 그런데 너무 멀어. 거기까지 건너가려면 한나절 걸리겠어.”

  “야, 목마르지 않니? 난 지금 물이 먹고 싶어.”

  “벌써 이슬이 다 말라 버렸어. 그냥 저녁까지 기다려.”

  “아이고, 죽겠네. 내 팔자야.”

  녹색이와 푸름이는 그늘 아래서 햇볕을 피하며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 

  저녁이 되자 녹색이와 푸름이는 풀잎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먹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커다란 거미가 나타났다. 엉덩이에서 실을 뽑아내며 거미는 능숙하게 집을 짓기 시작했다. 

  “아니, 쟤는 또 왜 여기다 집을 짓는대?”

  “하루종일 새를 피해 숨어있었는데 이제는 거미줄까지 걱정을 해야 하는 거야?”

  “푸름아, 조심해, 저 거미줄에 걸리면 우리는 끝나는 거래. 엄마가 그랬어.”

  “도대체 우리는 예쁘게 생기지도 않았고 이렇게 흉측한 모습인데 왜 우리를 노리는 것들이 많은 거야?”

  “야, 저 거미 우리 보는 것 같아. 빨리 피해, 일단 내려가자.”

  “빨리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어. 아이고, 진짜 힘들어 죽겠네.”

  “진짜 속상해. 이렇게 꼬물꼬물 기어 다니기만 하니 답답해.”

  거미의 엉덩이에서는 한도 끝도 없이 실이 뽑혀 나왔다. 어떻게 저 몸에서 그리 많은 거미줄이 나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보다 수십 배는 큰 집을 지어놓더니 한쪽 구석에 앉아 잠을 자기 시작했다. 아마 집을 짓느라 피곤한 모양이었다. 푸름이가 거미줄과 가까운 거리에서 풀잎을 타고 내려갔다.

  “야, 녹색아, 조심해. 풀잎이 거미줄하고 너무 가까워. 거미줄에 걸리는 순간, 우리는 끝장이야.”

  “길이 여기밖에 없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너도 조심해. 근데 진짜 거미줄하고 너무 가깝다. 잘못했다가는 거미줄에 걸리겠어.”

  “이쪽으로 해서 와. 그게 나을 것 같아. 그나저나 저 거미는 잠을 자는 거야?”

  “아닐 걸, 눈만 감고 있는 것 같아. 먹이가 걸리는 것을 기다리고 있겠지.”

  “맞아, 저번에 보니까 먹이가 거미줄에 걸리니깐 엄청 빠른 속도로 먹이에게 달려들더라. 내가 본 곤충 중에 제일 빨랐어.”

  “그런데 이상한 게 하나 있어.”

  “뭔데?”

  “거미줄은 끈끈해서 다 걸리잖아. 그런데 거미 쟤들은 왜 안 걸리는 거지? 거미 발은 뭐가 다른 건가?”

  “아마, 그렇겠지. 다른 이들은 거미줄에 걸리면 끈끈해서 빠져나오지를 못하는데, 거미들은 거미줄 위를 잘 달리는 것을 보면 아마 미끄러운 것을 발바닥에 발랐을걸.”

  “그게 뭐지? 진짜 신기하네.”

  “야, 잔말 말고 일단 빨리 내려가. 거미 쟤, 눈을 살짝 뜨고 있어, 우리 보는 거 같아.”

  “진짜네. 우리가 걸리나 안 걸리나 보는가 보네. 저 게슴츠레한 눈빛, 어쩐지 재수 없어. 야, 빨리 가자.”

  녹색이와 푸름이는 거미줄을 피해 풀잎을 타고 천천히 내려왔다. 그들은 힘이 들었는지 풀잎 중간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이고 힘들다. 푸름아, 하늘 좀 봐. 저 높고 푸른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맨날 이 풀잎 아니면 땅에서 기어 다니기만 하잖아.”

  “게다가 새나 다른 곤충들이 항상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진짜 무서워.”

  “참, 엄마가 얼마 안 있으면 장마철이랬어. 장마철에는 비가 억수로 온대. 잘못하면 비에 떠내려갈 수도 있대.”

  “아이고, 죽겠네. 이놈의 팔자는 왜 이런 건지.”

  “야, 너무 배고프다. 어여 뭐라도 먹자.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부지런히 먹어야 얼른 큰데.”

  “맞아, 우리 아빠도 그랬어. 근데 우린 왜 맨날 똑같은 풀잎만 먹어야 되는 거야? 맛이 하나도 없잖아.”

  “야, 우리가 어디 갈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주위엔 풀밖에 없는 걸 어쩌겠냐? 그게 운명인 거지.”

  “아, 비참한 우리의 운명이다. 왜 애벌레로 태어나서 이 고생을 다 해야 하는 거야? 흉측한 모습에, 자나 깨나 새나 곤충한테 먹힐까 걱정해야 하고, 낮에는 뜨거운 햇빛을 피해야 하고, 비가 오면 쓸려 내려갈까 걱정해야 하고.”

  “야, 신세타령 할 시간에 뭐라도 더 먹자. 난 빨리 먹고 커야겠어. 우리 아빠가 언젠가는 저 푸른 하늘을 원 없이 날아다닐 거라고 그랬다구.”

  “그때 되면 이 흉측한 모습도 사라지려나?”

  “아마 그럴 걸.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그때가 되면 아주 예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대.”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녹색이와 푸름이 쪽으로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푸름아, 새야, 빨리 피해!”

  “아니, 이거 어떻게 하지. 아무래도 떨어질 것 같아!”

  푸름이는 새를 피하려다 그만 풀잎에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녹색이가 푸름이에게로 급하게 가려고 했지만, 빨리 달려갈 수가 없었다. 

  “푸름아, 조금만 기다려. 내가 얼른 갈게.”

  녹색이가 푸름이에게 도착해보니 푸름이는 다리 여러 개가 부러져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푸름아, 괜찮아?”

  “야, 니 눈에는 내가 괜찮아 보이냐? 다리가 이렇게 많이 부러졌는데.”

  “야, 가만히 있어. 움직이면 안 되니까 내가 너를 끌어줄게.”

녹색이는 푸름이를 끌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갔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조금만 잘못했으면 새한테 먹힐 뻔했다고.”

  “엄마가 그러는데 우리가 흉측해야 잡아먹히지 않는 거라는데, 그렇지도 않은 거 같아. 수시로 우리를 먹으려 하잖아.”

  “그래도 이 흉측한 모습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를 만지지는 않지. 새나 곤충보다 사람들이 더 무섭다잖아. 사람들은 새는 물론 온 산에 있는 모든 것을 잡아 죽인대.”

  “맞아. 우리가 이런 모습을 가지게 된 것도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일 거야.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우리에게도 좋은 날이 올 거야.”

  “아이구, 다리 부러지더니 뭔가 깨달은 것이 있나 보네. 아프지는 않냐?”

  “야, 너는 아까부터 이 모습을 보고도 자꾸 아프지 않냐고 물어보냐? 너도 다리 좀 부러져 봐. 안 아픈가?”

  “일단, 뭐 좀 먹어. 그래야 얼른 낫지.”

  녹색이는 푸름이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다. 

  “내일 만나. 잘 자고.”

  “그래 너도 좋은 꿈 꿔.”

  녹색이와 푸름이는 그렇게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녹색이는 눈을 뜨자마자 푸름이에게로 갔다. 푸름이의 다리가 어떤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푸름아, 이제 좀 괜찮아?”

  “녹색이 왔니? 많이 좋아졌어. 그런데 몸이 좀 이상해.”

  “왜? 어디가 또 아파?”

  “아니, 아픈 게 아니라 간지러워. 몸에 뭐가 막 나는 것 같아.”

  “그래? 나도 사실 아침에 일어나니까 몸이 근질근질하긴 했어.”

  “너도 그랬어? 뭐지? 우리 몸에 뭐가 나려고 그러나? 난 다리 아픈 것도 다 사라져버렸어.”

  “그래? 야, 녹색아. 그런데, 너, 네 몸이 이상해지고 있어.”

  “아니 뭐라고? 내 몸이 이상해지고 있다고?”

녹색이는 잠시 자신의 몸을 바라본 후, 다시 푸름이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녹색이는 푸름이의 몸도 이상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야, 푸름아, 네 몸도 그래. 네 몸이….”

  “녹색아, 우리 몸이, 우리 몸이 변하고 있어.”

  “어, 정말이네. 이게 무슨 일이지?”

잠시 후 두 마리의 나비가 풀잎 끝에서 날아올랐다. 너무나 예쁜 나비였다. 두 마리의 아름다운 나비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나풀나풀 날아가고 있었다. 그 오래도록 지냈던 풀잎이 그들의 눈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녹색이가 날아가면서 푸름이에게 말했다.

  “야, 푸름아, 너 정말 멋져! 내가 이제까지 본 그 어느 것보다 멋있어.”

  “녹색아, 너도 그래. 정말 네 모습 아름다워. 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예뻐.”

  “우리가 그동안 우리 자신에 대해 너무 불평하고 투덜거린 건가? 이렇게 멋있게 변하는 것도 모르고.”

  “아마도, 그런 것 같아. 푸름아, 저 하늘 높이 훨훨 날아가 보자.”

  “그래, 누가 먼저 더 높이 날 수 있나 내기할까?”

  “좋지, 근데 푸름아. 저 아래 좀 봐. 거미줄이 아예 보이지도 않아. 거미는 우리처럼 날지도 못하겠지?”

  “당연하지. 거미는 매일 거미줄만 타겠지.”

  “와, 진짜 이 위에서 아래를 보니 너무 멋있는데. 이게 다 우리 세상인가 봐. 그동안 힘들고 고생한 것이 보람이 있네.”

  “맞아, 그런 것 같아. 비가 오면 피하고, 바람이 불면 나뭇잎을 꽉 붙잡고, 햇빛이 따가우면 그늘을 찾고, 매일 똑같지만 풀잎을 부지런히 먹고, 우리를 괴롭히는 새나 곤충들을 피해 다녔는데. 아마 그 힘든 것을 이겨내지 못했으면 오늘 같은 날이 없었을 거야. 야, 푸름아. 실컷 날아오르자.”

  “그래, 저 하늘 끝까지 한번 날아 보자구!”

  녹색이와 푸름이는 하얀 구름이 있는 푸른 하늘 위로 훨훨훨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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