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목적

by 지나온 시간들

우리가 철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저서 <논리철학 논고>에서 철학의 목적은 인간의 사고를 논리적으로 명료화하는 것이라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비트겐슈타인은 맨체스터 공과대학에서 항공공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이 분야를 깊이 있게 연구하다 보니 유체 역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고 더 나아가 응용수학과 순수 수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던 중 버트란트 러셀의 <수학 원리>를 읽고는 바로 러셀 밑으로 가서 수학과 논리학을 배운다. 당시 러셀은 수학과 철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1년 후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것도 없으며 이미 자신을 능가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20세기 최고의 철학자가 탄생한 것이다.


“세계는 성립되어 있는 사항들의 총체이다. 세계는 사실의 총체이지, 사물의 총체가 아니다. 세계는 사실을 통해, 그리고 사실 전부라는 점을 통해 규정된다. 왜냐하면 사실의 총체는 무엇이 성립되어 있는지를 규정하고, 또 무엇이 성립되어 있지 않은지도 규정하기 때문이다. 논리 공간 안에 있는 사실이 곧 세계이다. 세계는 사실로 분해된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성립되거나 성립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것은 그대로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사실의 상을 만든다. 상이란 논리 공간 속에 있는 상황, 즉 다양한 사태의 성립과 불성립을 나타낸다. 상은 현실의 모형이다. 상의 요소는 상 속에서 대상에 대응한다. 즉 상의 요소는 상에서 각각의 대상을 대신한다. 상을 상이게 하는 것은 그 요소가 특정한 형식으로 서로 연관되는 것이다. 상도 하나의 사실이다.”


모든 현상들의 집합인 세계는 무엇일까?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는 사실의 총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사실을 정확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는 논리 공간 안에 존재하는 사실을 세계라고 파악한다. 따라서 우리는 논리를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논리 공간 안의 사실은 ‘상’을 만들게 되고 우리는 이러한 상을 정확히 이해해야만 한다.


“사실의 논리상이 사고이다. ‘어떤 사태를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태의 상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참인 사고의 총체가 세계의 상이다. 사고는 사고되는 상황의 가능성을 포함한다. 사고될 수 있다는 것은 또한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비논리적인 것을 사고할 수 없다. 그러려면 비논리적으로 사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신은 만물을 창조할 수 있지만 논리적 법칙에 어긋나는 것만은 창조할 수 없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 ‘비논리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그것이 어떠한지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고란 뜻이 있는 명제이다. 명제의 총체가 언어이다. 우리는 각각의 말이 무엇을 어떻게 지시하는지 일일이 깨닫지 않아도 모든 뜻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 구성력을 지니고 있다. 일상 언어는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일부로서 다른 부분 못지않게 복잡하다. 인간은 일상 언어에서 언어 논리를 끌어낼 수 없다. 사고는 언어로 위장한다. 즉 옷을 걸친 겉모습에서 그 속에 있는 사고 형태를 추측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옷의 겉모양은 신체 모양을 알려주는 것과 전혀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일상 언어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암묵적인 약속은 터무니없이 복잡하다.”


생각한다는 것이란 무엇일까? 비트겐슈타인은 사고란 바로 어떠한 사태의 상을 만들어감으로 이해한다. 그러한 상을 만들어가는 것은 개인 각자의 몫이다. 그 자신의 능력에 의해 상의 형태도 달라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이 논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에 때때로 비논리적인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이러한 것을 배제하기 위해 우리는 사고의 기본이 되는 명제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논리를 세워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세계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세계를 정확히 모른다면 우리의 삶은 그만큼 객관적일 수 없다. 세계의 이해가 우리의 삶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능력이 바로 세계의 이해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논리적인 능력을 키우기 위해 반드시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다.


“모든 철학은 언어 비판이다. 러셀의 공적은 명제의 외관상의 논리형 식이 반드시 실제 논리 형식은 아님을 보여준 점이다. 명제는 현실의 상이다. 명제는 현실에 대한 모형이며, 우리는 그렇게 현실을 상상한다. 얼핏 보기에 명제는 그것이 나타내고 있는 현실의 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악보도 음악의 상으로는 보이지 않으며 표음 기호도 발화 음성의 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러한 기호 언어가 보편적 의미에서 그것이 표현하는 것의 상임은 명백하다.”


사고는 언어로 인해 이루어진다. 여기에 언어의 중요성이 나타난다. 우리가 언어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한 올바른 사고는 불가능하다. 이는 세계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에 관심을 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언어를 논리적으로 오류 없이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세계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밑받침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철학을 언어 비판이라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철학의 목적은 사고를 논리적으로 명료화하는 것이다. 철학은 학설이 아니라 활동이다. 철학 활동의 본질은 해명이다. 철학의 성과는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명제의 명확화이다. 사고 자체는 불투명하고 흐릿하다. 철학은 이런 사고를 명료화하고 뚜렷하게 경계 지어야 한다. 철학은 말할 수 있는 것을 명료하게 묘사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지시하려 한다. 무릇 사고될 수 있는 모든 것은 명백히 사고될 수 있으며, 발언될 수 있는 모든 것은 명백히 발언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은 학설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는 어떤 철학자가 무슨 학설을 주장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철학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논리를 명확히 해야만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우선 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러한 과정이다. 이는 우리가 스스로 철학을 함으로 가능해진다. 언어 비판으로, 논리를 이해함으로 이러한 것을 해낼 수 있다. 철학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내가 주인이 되어 스스로 철학을 할 때 세계를 이해하는 바탕이 마련되는 것이다.


KakaoTalk_20211105_083701653.jpg


keyword
작가의 이전글생명체의 신비로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