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어느새 아파트 주위에 꽃들이 피기 시작했어. 어제 보니까 하얀 모란이 활짝 피어 있더라구. 노란 개나리도 소식을 알린 지 오래고, 다음 주에는 벚꽃이 만개할 것 같아. 예전에 여의도 윤중로에 너하고 같이 가서 벚꽃 구경하던 생각이 갑자기 났어. 너도 어디에선가 이 봄에 피어나는 예쁜 꽃들을 보고 있겠지?
아침에 일찍 눈이 떠져서 전경린의 <천사는 여기 머문다>를 읽었어. 요즘엔 문득문득 예전에 읽었던 책이 다시 읽고 싶어지고 그래.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천사란 무엇일까? 천사는 구체적인 어떤 존재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 천사라면 나와 너무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의미할 텐데 떠났다고 생각했던 그 천사는 나의 현재 삶에 아직도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일까?
“모경이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경이 곁으로 바싹 다가섰다. 예전처럼 그의 두 눈이 번쩍거렸다. 너무 놀라 발목이 삐끗 꺾이며 몸이 허청 젖혀졌다. 모경은 재빠르게 내 팔을 잡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두 달쯤 전엔 내가 모경의 뒤를 따랐었다. 그때 나는 다가갈까 말까 하는 망설임조차 없었다. 다만 그가 지나가는 것을, 아주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천사는 언제라도 올 수 있지만, 또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 인연이 되어 왔고, 인연이 다 했다면 떠나가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소설 속 주인공의 천사는 왜 떠나지 못하고 아직도 그 곁에 머무르고 있는 것일까?
“모경은 내가 물건을 내던질 정도까지 화를 내면 사흘쯤 집에 나타나지 않았다. 식탁 의자를 들어 올려 내 스스로 액자의 유리들과 거울과 집 안의 창문들을 모두 깬 날, 그 많은 유리 조각을 모두 치운 뒤에 –나는 그 유리를 모경에게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그 유리 조각은 남김없이 내 것이었다. 분명 일생에 단 한 번뿐일 내 사랑의 피투성이 잔해들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많은 유리 조각들은 마치 내가 삼키기라도 한 것처럼 뱃속에서 쨍그렁쨍그렁 소리를 내며 서로를 찔러댔다-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오빠의 집을 떠났다.”
천사가 머물고 있는 것은 혹시 주인공이 내가 아직도 그 천사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붙잡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인연이 다 되었으니 떠나라고 등을 밀었건만, 왜 아직도 떠나보낸 그 존재는 끝없이 주인공의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 것일까?
“팔을 천천히 벌리고 손 안의 것을 확인이라도 하듯 손가락들을 펴보았다. 손 안엔 아무것도 없는데 빛의 방울들은 점점 많아지며 양쪽 손을 둘러싸고 반짝거렸다. 나는 팔을 활짝 벌린 채 빛의 출처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밖엔 폭우가 쏟아지고 빛이 들어올 데라곤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나의 정면에 있는 장식장 위에 모경이 준 반지가 놓여 있었다. 빛 방울들은 반지로부터 스스로 발광하듯 와글와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 몸을 뚫고 방 안 가득 보이지 않는 광파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어둠을 더듬어 침대로 가서 누워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렸다. 내 손에서 떠난 빛 방울들은 벽과 천장으로 가서 희미하게 어리더니 하나, 둘 꺼져 갔다. 귓속에 빗물이 가득 차는 듯했다.”
어떠한 존재건 그 흔적을 남기는 것이 아닐까 싶어. 시간이 지나면 그 흔적도 서서히 사라지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 같아. 밉건 곱건, 마음속에 자리했었던 그 존재, 언젠가 떠날 것으로 생각했건만, 그 존재가 천사였을지도 모르지.
모든 존재는 천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막상 나하고 함께 있을 때는 그러한 사실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천사를 나 스스로 떠나보내게 만들고 있는지도 몰라. 내가 모르는 그 존재의 이면을 볼 수 없기에 우리는 그렇게 천사를 떠나보내고, 시간이 흘러도, 이미 사라지고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 스스로 천사가 아직도 여기 있다는 무의식에 갇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