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며 기쁨과 행복도 있었지만, 아픔과 상처가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가슴 시린 일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로 인해 받은 커다란 상처는 너무 깊어서 치유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상처가 치유될 만하면 다시 그런 일이 생겼습니다. 그로 인해 또 다른 마음의 아픔을 겪었고 간신히 그 일을 넘겼습니다. 그로 인한 상처가 아물만하면 또 다른 사람이 힘들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아픔을 잊을만하면 다른 상처가 생기고 하는 일들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인간의 본질에 대해 가슴 깊이 느낀 것은 사실이나 다시는 그러한 일을 경험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일 것입니다. 커다란 아픔이 지나가기를 거듭하니 나중에는 아예 인간에 대한 기대를 버렸습니다. 최선을 다해도 돌아오는 것은 상처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 절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가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미움은 분노로 변했고, 분노는 증오로 되어 인간 그 자체에 대한 환멸까지 느꼈습니다.
사람에 대한 상처도 면역이 생기나 봅니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에게서 받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어떤 일을 나에게 해도 더 이상 상처가 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시간이 흘러 그렇게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떤 이가 나를 힘들게 해도 그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순간적으로 그에 대한 나쁜 마음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나 정말 짧은 시간 안에 다 사라져 버리는 것을 보고 나 스스로도 놀랐습니다. 그리고 차라리 용서를 하자는 마음으로 제 마음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니 사람으로 받는 아픔이나 상처도 별것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진 것 하나 없이 결혼을 했습니다. 자가 주택은커녕 전세조차 꿈을 꿀 수 없었습니다. 방 하나짜리 월세방에서 시작했습니다. 결혼하고 5년이 지나니 2년 터울로 아이들 세 명이 생겼습니다. 밤에 아내와 세 아이가 나란히 누워 자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무거웠습니다. 어떻게 이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할지 앞이 막막했습니다.
고만고만한 이이 셋을 밥 먹이다 보면 내가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헷갈릴 때도 많았습니다. 아이들 입에 밥을 떠 넣다 보면 아이 밥을 내가 먹고 있기도 하고, 내 밥을 아이 입에 넣어주기도 했습니다. 아이들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내가 밥을 입으로 먹는 건지 코로 먹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첫째와 둘째가 남자아이고 막내가 딸아이였습니다. 딸아이가 오빠들 틈에서 조금은 외로워하는 것 같아서 아내에게 막내를 위해 딸 하나 더 낳는 것은 어떻겠냐고 물었다가 아내가 나를 인간도 아니라는 듯이 쳐다보는 눈빛 때문에 두 번 다시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했습니다.
아이들은 쑥쑥 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아이 셋이 먹는 양도 어마어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귤을 한 박스 사면 이틀도 가지 않았습니다. 치킨이건, 피자건, 과자건 아무리 사다가 줘도 언제 사 왔냐는 듯 금세 다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퇴근하면서 먹을 것을 사다 아이들에게 주면 세 녀석이 전쟁을 하듯 먹어 치워 버렸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모든 것을 아이들에게 쏟아부었습니다. 이제는 세 아이 모두 성장해서 더 이상 제가 신경 쓸 일도 없어졌습니다. 아이 셋을 키우느라 정신없이 살았지만 아이 셋 키우는 것도 별것 아니었습니다. 지금 같아서는 넷은 물론 다섯 명도 키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혼하기 전 LA에서 뉴욕주까지 혼자 길을 떠났습니다. 자동차에 짐을 실으니 트렁크는 말할 것도 없고 뒷좌석까지 가득 차 차의 바퀴가 내려앉아 끝까지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5,000km 길을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25년 전이었기에 당시엔 내비게이션은커녕 핸드폰도 없었습니다. 미국엔 아는 사람 하나 없어서 중간에 무슨 일이 생겨도 연락할 곳이 없었습니다. 운전을 하던 중 그 넓은 미국 대륙 한복판에서 제가 만약 강도를 만나거나 저에게 다른 무슨 일이 생겨 사라져 버린다면 저를 찾지도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커다란 미국 지도 하나를 옆 좌석에 놓고 캘리포니아, 네바다, 애리조나, 콜로라도, 네브래스카, 아이오와, 일리노이, 인디애나,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주를 거쳐 뉴욕주까지 일주일 정도 걸려 도착했습니다. 출발할 때는 언제 도착할지 걱정과 근심으로 마음을 졸였으나, 도착해 보고 나니 괜한 염려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후로 미국 대륙 동서 횡단 5,000km를 7~8번 정도 했습니다. 남북은 3,000km 정도 되는 데 그것은 3~4번 정도 했습니다. 미국 대륙 횡단도 해 보고 나니 별것 아니었습니다.
스위스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 누나네 식구 4명이 저를 방문했습니다. 저희 식구 5명과 누나네 4명, 합해서 9명을 데리고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까지 2주일 정도를 다녔습니다. 저도 유럽에서는 스위스를 제외하고는 가본 나라가 없었습니다. 당시엔 인터넷도 그리 발달하지 않아 각 나라별로 묵어야 할 호텔도 전화로 예약을 했습니다. 어떤 전자기기도 없이 지도 하나만 달랑 믿고 길을 떠났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저만 의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엄청난 압박감으로 작용했습니다. 경험도 없이 많은 식구를 데리고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긴장을 놓을 사이도 없이 9명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으로 인해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당시엔 아이들도 어렸기에 일일이 다 챙겨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지나고 나니 별것 아니었습니다.
교통사고로 인해 죽음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직접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사고가 나는 순간 ‘사람이 이렇게 죽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렴풋이 앰뷸런스 소리가 들렸고, 전기톱으로 제 자동차 문을 자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앰뷸런스 안에서 제 몸에 바늘이 꽂히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무언가를 물어보는 데 대답을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 채 깨어나 보니 눈앞에 하얀 형광등이 있는 것을 보고 저승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운이 나빴다면 30년도 살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이런 경험을 임사체험(Near Death Experience)이라고 했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보니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 그 자체도 별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전엔 삶이 엄청난 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거창한 인생의 목표를 세우기도 했고, 그것을 위해 몸부림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많은 것에서 마음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로 인해 삶에 대해 자유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일에 대해서도, 꿈에 대해서도, 내가 지향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제는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오늘이 저에게 주어진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은 사실 별것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잘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