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에게

by 최영인 마음여행자
나는 나를 누구라고 알고 살아왔던 걸까 – 빛의 과거/은희경


경에게


너의 이름 두 글자에서 하나를 떼고 나니 70년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름처럼 레트로한 멋이 느껴지지 않니?

몇 년 전 여름 너를 다시 만났던 그 날을 나는 기억하고 있어. 결혼 후 몇 번의 만남 후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멀어졌지. 무엇보다 사는 지역이 달랐고 인생의 가장 드라마틱한 시간을 살아가는 동안 친구도 잠시 밀어놓을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이 통할수만 있다면 말이야.


오랜 시간 잠자던 너의 톡이 다시 울렸을 때 나는 진심으로 기뻤어. 그래서 네가 살고 있는, 그리고 나의 고향이기도 한 도시로 가는 열차를 서둘러 예매했어. 네가 알려준 약속 장소로 가는 동안 가슴이 마구 뛰었어. 오래전 나도 걸었던 길이지만 수십 년의 세월 동안 그 길은 이미 예전에 내가 알던 그 길은 아니었어. 스마트 폰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 찾지 못했을 거야. 거의 20년 만의 만남이라 마치 소개팅을 앞둔 사람처럼 설레더구나. 그리고 네게 잘 보이고 싶더라. 오래만에 한껏 멋을 내고 창가 자리에 앉아서 너를 기다렸어. 많이 늙고, 많이 달라진 내 모습을 보고 네가 실망할까 봐 걱정하면서 말이야. 창 밖으로는 오종종한 꽃이 피어있는 작고 예쁜 정원이 있었어.


어느덧 열일곱 살 여고생으로 돌아간 나는 오래전 분식점에서 쫄면을 시켜놓고 너를 기다렸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더구나. 유난히 낯가림이 심하고 표현이 서툰 데다 친구에 대한 기준(?)마저 엄격했던 탓에 나는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별로 없었어. 그래서인지 위태로운 인연의 끈으로 이어졌던 아이들은 졸업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잊혀졌어. 너만 빼고 말이야. 나에게 고교시절이라 함은 너와 같은 반이었던 1학년 때를 제외하면 기억에 남은 게 별로 없어. 너와 반이 갈라져서 헤어진 나머지 시간은 뿌연 안갯속처럼 모호하기만 해


너랑 나는 닮은 점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 너는 친구가 많았지만 나는 별로 없었고, 너는 수학을 좋아했고 나는 영어를 좋아했어. 너는 형제가 많은 집의 중간이었는데 나는 세 딸 중 맞이였어. 우리에게 유일하게 닮은 점이 있었다면 둘 다 공부하기 싫어했다는 거겠지? 너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큰 언니를 무서워해서 언니한테 혼날까 봐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하는 것처럼 보였어. 나는 누구 때문에 해야 된다는 생각은 안 했지만 학교생활이 답답하고 힘들었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는 학교가 학생들을 통제하기에 여념이 없는 곳이었잖아. 하지만 공부를 한답시고 도서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수다를 떨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라본 하늘의 별은 꽤나 낭만적이었어. 너도 그랬니?


생각나니? 무시무시했던 미술시간 말이야. 변방의 과목이었던 미술과목의 전 학년 평균이 90점 밑으로 내려오는 일이 없는 이유를 우리는 알고 있었잖아. 시험이 다가오면 아이들의 책상 위에는 영어나 수학책 때신 미술책이 올라오곤 했지. 덕분에 수학 담당이었던 담임 선생님의 화를 돋우었어. 그래서 아침 자습 시간에 미술책을 펴다가 걸리는 날이면 무지막지한 등짝 스매싱이 날아오곤 했잖아. 미술시험에서 하나라도 틀릴 경우 어떤 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담임 선생님의 등짝 스매싱 따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어. 우린 그만큼 절박했으니까.


나는 50분 동안 미술 선생님과 눈을 맞추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어. 재수 없이 걸린 아이들 중에서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해 미술 선생님한테 당하는(?) 아이를 보면서 연민 대신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라는 생각 밖에는 할 수 없었을 정도로 그 시간은 충분히 공포스러웠어. 지위를 이용한 갑의 횡포에 우리는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어. 예나 지금이나 아킬레스 건이었던 ‘성적’을 이용해서 학생들의 목을 잔인하게 죄었던 그 선생님은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무소불휘의 권력을 휘둘렀던 과거를 그리워하며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닌지 문득 궁금해진다. 이 외에도 여고시절 잔혹사를 수놓을 만한 다양한 사건과 이벤트는 늘 있었어.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추억의 소재로 쓰기엔 유효기간이 아직은 넉넉한 것 같아.


다시 만난 너와 나는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라는 상투적인 말로 인사를 주고받았지. 늘어진 피부와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한 흰 머리카락은 서로 모른 채 하고 말이야. 외모만 빼면 정말로 변한 건 없었으니까 상투적인 말도 의미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어. 여전히 놀기 좋아하고 수학을 사랑하는 너는 학창 시절 그대로였으니까 말이야.

너는 말했지. ‘학창 시절에는 고유의 자아가 묻혀서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그래서 내가 책을 내고 작가가 되었다는 걸 알고 무척 놀랐다고’ 말이야. 학교라는 시스템이 나에게는 잘 맞지 않았던 것 같다고도 덧붙였어. 그 말이 왜 그렇게 위로가 되던지. 학창 시절 내내 외로운 섬처럼 홀로 부유했던 기억이 떠올라서였을까? 학교를 생각하면 ‘불안’과 ‘외로움’의 정서가 가장 먼저 떠오를 만큼 나는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어. 친구들은 나와 너무 달랐고, 암기식 공부는 재미가 없는 데다 선생님들은 일방적이었으니까 말이야.


우리는 학부모이자 교사의 입장에서 교육 시스템에 대한 무한 비판까지 수다의 소재로 삼아 2차, 3차까지 자리를 옮겨가며 대화를 이어갔어. 그때 찍은 우리의 셀카는 내 사진첩 속에 고이 모셔 두었단다. 붉게 상기된 얼굴과 함박웃음만큼은 열일곱 살 여고생 부럽지 않더구나. 지금도 가끔 그 사진을 보곤 해. 순수한 기쁨이 담긴 두 여자의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져서 애잔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말이야.


남편 얘기, 자식 얘기 등 우리는 최선을 다해 지나온 세월을 빠르게 요약했지. 너도 나도 그렇게 학교를 싫어했는데 하필이면 둘 다 교사가 되어 다시 학교로 돌아온 아이러니한 상황에 웃음이 났지. 그 날이 다시 그리워지는구나.


이후로도 우리는 몇 번을 더 만났어. 친정을 핑계로 내려갈 때마다 너를 만나곤 했었으니까. 학창 시절 친구는 오랜 시간의 공백이 있어도 금방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있는 비결은 뭘까 늘 궁금했어. 만난 지 10분만 지나도 예전의 허물없는 사이로 순식간에 돌아갈 수 있으니까 마법이라도 불러도 손색은 없을 거야. 시간으로 따지자면 직장동료나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이 훨씬 길지만 심리적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가 않아. 이사를 가거나 직장을 옮기면 너무 쉽게 잊혀지니까 말이야.


한두 잔 술이 들어가면서 너는 말했어. ‘학창 시절에 생각했던 내 모습과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다’고 말이야. 너와 내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서로를 잘 몰랐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서로에 대해 알지 못한 채 오래 시간을 함께 지냈고 지층처럼 차곡차곡 쌓인 시간 덕분에 인연의 끈을 놓기가 아까웠던 아니었을까. 그래도 다행인 건 다시 만난 네가 학창 시절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네 모습보다 훨씬 더 좋다는 거야. 네가 말한 옛날과 ‘완전히 다른 지금의 나’도 네가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다시 얼굴 볼 수 있겠지? 한참을 못 만났으니 우리의 삼겹살 수다는 더 풍성해질 것 같은 즐거운 예감이 드는구나.

살아서 만나자….



** 추신: 인사말이 비장미가 넘치네. ㅋㅋ 건강 잘 챙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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