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없는 대화,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는 세상

- 노래할까요? 무재씨가 말했다 -

몇 해 전 동생과 함께 떠났던 유럽여행 중의 일이다. 독일에 도착한 우리는 맥주 맛이 궁금했다. 호텔 바에 내려가 여러 종류의 맥주를 시켜놓고 하나씩, 천천히 맛을 음미했다. 질 좋은 독일 맥주를 앞에 두고 이국적인 정취와 여행자의 감흥에 뿍 빠진 동생이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를 허밍으로 살짝 흥얼거렸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옆 테이블의 사람들이 동생의 노래를 이어서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맥주 한잔의 여유를 즐기고 있던 현지인 들이었다. 동양인 특유의 수줍음과 낯선 문화에서 오는 이질감 탓이었는지 옆 테이블에서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곧 우리는 그들과 함께 세레나데를 끝까지 부르며 낯선 땅, 독일에서의 첫날밤을 행복한 기억으로 마무리했다.


일순간이었지만 당시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어떤 깊은 대화보다 더 끈끈하고 강한 메시지가 오고 갔다는 걸 느꼈다. 여행을 마치고 독일을 떠나오고서도 한동안 그날의 낯선 경험이 가슴에 섬처럼 떠 있었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집단에서 배제되어 관계를 차단당하면 극심한 공포를 느끼고 스트레스를 겪게 된다. 관계 속의 나를 증명해 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일상에서 나누는 대화이다. 일상은 대화의 연속이고 가정과 직장, 각종 모임에서 우리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충고와 설득으로 가득한 우리의 대화문화는 대화라기보다는 일방적인 전달에 더 가깝다. 자잘한 일상의 신변잡기에서 시작한 대화는 어느새 도를 넘어서서 결국은 남의 험담으로 막을 내린다. 지인들과의 긴 대화 후에 오히려 깊은 공허와 피로감이 느껴지는 건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너도 나도 목소리를 높이는 험악한 대화문화 때문은 아닐까? 진정한 소통은 말을 할 때 보다 잘 듣는 것에서 시작된다. 미사여구의 유려한 언변으로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것은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실패하고 좌절했을 때 따끔한 충고 대신 말없이 등을 두드려 주던 부모님, 좌충우돌하며 힘겹게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던 사회 초년병 시절 선배교사가 타 주던 차 한 잔이 백 마디 말보다 더 따뜻한 위로로 남아 있다.




"노래할까요 무재 씨가 말했다. 은교 씨는 무슨 노래 좋아하나요. 나는 칠갑산 좋아해요. 나는 그건 부를 수 없어요. 칠갑산을 모르나요? 알지만 부를 수 없어요. 왜요. 콩밭, 에서 목이 메서요. 목이 메나요? 콩밭 매는 아낙이 베적삼이 젖도록 울고 있는 데다, 포기마다 눈물을 심으며 밭을 매고 있다고 하고, 새만 우는 산마루에 홀어머니를 두고 시집와 버렸다고 하고... 그렇군요. 말없이 밤거리를 바라보았다. 전조등을 밝힌 차들이 노랗게 빗줄기를 비추며 지나가고 있었다. 등나무 잎을 삶으면, 하고 무재 씨가 문득 말했다. 삶아서 그 물을 마시면 금이 간 부부 사이의 금실이 좋아진대요. 그렇대요? 언제고 우리 틈에 금이 가면 삶아서 마실까요?라는 말에 당황해서 우리는 부부도 뭣도 아닌데.라고 얼버무리자 무새 씨가 우산 속에서 벙글벙글 웃었다. 나는 흠, 하고 기침을 했다. 금실은 잘 모르겠지만 무재 씨, 이렇게 앉아 있으니 배도 따뜻하고, 좋네요"





황정은의 소설 <백의 그림자> 중 무재와 은교의 대화이다. 특별한 메시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둘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오른다. 소설 속 무교와 은교의 대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대화지만 누군가에게 충고하고 설득하는 일방적인 대화가 아니다.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이들의 대화 속에는 서로를 감싸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있다. 이런 대화는 말이 주는 피로감 없이 감정의 밑바닥에 자연스럽게 도달할 수 있다.


세상은 온통 말들의 잔치다. 회색은 사라지고 흑과 백만이 존재하는 이분법의 세상이 되었다. 내 의견과 다르면 무조건 틀린 것이고 배려와 공감이 끼어들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온갖 주장과 위선이 난무하는 시대에서 ‘보여주되, 말하지 마라’라고 단호하게 얘기하는 작가가 있다. 소설가 김훈이다.


형용사와 부사를 거의 쓰지 않고 글을 쓰는 김훈의 문체는 독특하다. 수사적 장치가 완벽히 배제된 채 주어와 동사라는 뼈대만 가지고 사실을 보도하듯 쓴다. 그를 소설가로 각인시킨 ‘칼의 노래’도 마찬가지다. 소설의 첫 문장은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로 시작된다. 당초 김훈은 ‘꽃이 피었다’와 ‘꽃은 피었다’를 놓고 고심했다고 한다. 전자는 객관적 상황 묘사요, 후자는 주관적 정서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감정이 절제된 건조한 문체와 사실만을 간결하게 보여주는 그의 글은 온갖 미사여구로 포장해서, 그 결과 오히려 감동을 반감시키는 여느 작가들의 글과는 많이 달랐다. 작가 박완서는 이런 김훈의 글을 ‘인정머리 없는 글’이라고 했다.


그는 사석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요즘 글쓰기가 어렵고 신문 저널을 읽기가 고통스럽다.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지 못하고 뒤죽박죽으로 쓴다. 의견을 사실처럼, 사실을 의견처럼 말한다” 그는 우리의 사고체계에 근본적으로 의문을 던진다. 과학적 사고 대신 ’ 내 마음에 드나‘ ’ 내 생각과 맞나 ‘ ’ 내 편인가 ‘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김훈의 글에서 그의 목소리를 찾기는 어렵다. 다만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독자는 그의 글 속에서 묵직한 울림과 감동을 건져 올린다.


다음은 한겨레 기자 시절 김훈이 ‘거리의 칼럼’ 이란 제목으로 연재한 글이다.


<라파엘의 집>
서울 종로구 인사동 술집 골목에는 밤마다 지식인, 예술가, 언론인들이 몰려들어 언어의 해방구를 이룬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논하며 비분강개하는 것은 그들의 오랜 술버릇이다. 그 술집 골목 한복판에 '라파엘의 집'이라는 시설이 있었다. 참혹한 운명을 타고난 어린이 20여 명이 거기에 수용되어 있었다. 시각. 지체. 정신의 장애를 한 몸으로 모두 감당해야 하는 중복장애 어린이들이다. 술 취한 지식인들은 이 '라파엘의 집' 골목을 비틀거리며 지나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동전 한 닢을 기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파엘의 집'은 전세금을 못 이겨 2년 전에 종로구 평동 뒷골목으로 이사 갔다. '라파엘의 집' 한 달 운영비는 1200만 원이다. 착한 마음을 가진 가난한 사람들이 1천 원이나 3천 원씩 꼬박꼬박 기부금을 내서 이 시설을 16년째 운영해오고 있다. 후원자는 800여 명이다. '농부'라는 이름의 2천 원도 있다. 바닷가에서 보낸 젓갈도 있고 산골에서 보낸 사골뼈도 있다. 중복장애 어린이들은 교육이나 재활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안아주면 온 얼굴의 표정을 무너뜨리며 웃는다. 인사동 '라파엘의 집'은 술과 밥을 파는 식당으로 바뀌었다. 밤마다 이 식당에는 인사동 지식인들이 몰려든다.


이 글에서 작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하지 않는다. 지식인의 태도에 대해서, 사회지도층의 허영에 대해서 한 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자들은 글을 읽고 나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분노, 혹은 부끄러움이 올라오는 걸 느낀다. 결코 강요하지 않지만 팩트 속에 숨은 강렬한 메시지가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 인정머리 없는 ‘ 김훈의 글을 사랑한다.


때로 메시지 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는 세상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