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

jet lag

by 민주

나, 런던에 가야겠어.

뭐?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숨이 막힌다고. 견딜 만큼 견뎠어.


가지 마. 이 한마디가 뜨거운 커피와 함께 삼켜졌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급하게 들이켠 블랙커피와 뱉지 못한 말이 둔탁하게 식도를 미끄러지며 따끔한 활주 흔적을 남겼다.


딸꾹.


참으면 탈이 되는 건 화 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M은 그 딸꾹질 속에 무엇이 감춰져 있는지, 그러니까 내가 어떤 말을 숨기려 애썼는지 모두 아는 듯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나는 M의 ‘이 미소’를 볼 때마다 심술이 났다. 마치 ‘내 입술 끝에 어떤 말이 걸려 있게?’라며 나를 약을 올리는 듯한 미소처럼 보였으니까. 사람과의 소통을 체스쯤으로 생각하는 내게 M의 미소는 그야말로 쥐약이었다. 체커보드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그 애의 트랩에 걸리지 않기 위해 애쓰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덧 추크츠방*(Zugzwang)에 빠져버린다. 그 비참한 말로는··· ···. 낚싯바늘에 걸린 배스와 똑 닮은 모습으로 M의 입꼬리에 걸려버리고, 체크메이트**. 나의 완패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것 말고는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M의 입꼬리에 걸려 흙 비린내를 풍기며 우스운 모습으로 몸부림치고 있다. 뻐끔거리는 아가미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잘 지내.

커피 덜 마셨는데··· ···.

라테가 내 취향이 아니네. 가볼게.


이마를 짚었다. 그 상황에서 붙잡기 위해 뱉은 말이 고작 ‘커피 덜 마셨는데’라니. 그런 날 앞에 두고는 M이 정제된 동작으로 머플러를 목에 감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룻바닥 위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무자비하게 나를 북북 찢는다. 영화에서는 자리에서 소란스럽게 일어나 떠나려는 사람의 손목을 붙잡고, 가지 마, 라고 하던데. 차마 그러지 못했다. M이 신은 낮은 굽의 로퍼가 마룻바닥과 부딪히며 내는 소리에 맞추어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 톡 두드렸다. 떠나려는 M을 잡기 위해 보내는 구질구질한 모스 부호였다. 어쩌면 M은 이것도 알아챘을지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요란하게 보낸 신호가 무색하게 이내 게임 종료를 알리는 카페의 도어벨이 카랑카랑하게 울렸다. 나는 M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다 마시지 않은 라테의 식은 거품으로 그 애의 형체를 한참이나 만들어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게임에서 진 자가 미련이 많은 법이지.


M이 떠나고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술을 마셔보고 죽을 기세로 지냈다. 내면 가장 깊은 곳에 붙어 있다 떼어낸 M의 자리에는 얼룩이 가득했는데, 이 얼룩을 갖은 종류의 알코올로 닦아내 보려 애쓴 과정이었다. 물때 같은 걸 소독제로 지워내는 것처럼. 그러나 곧 이 방법이 블런더***(Blunder)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억지로 떼어낸 탓에 살점이 함께 뜯겨 나간 데에 알코올을 들이부은 꼴이 된 것이다. 아직 M과의 게임이 끝나지 않은 걸까? 가려운 상처를 긁으며 생각했다.


지난밤의 과오를 떠올리게 만드는 숙취를 속죄처럼 받들며 벽에 걸린 달력을 바라보았다. 새해가 바뀐지 한 달이 훌쩍 넘었지만 방 안의 달력과 내가 묶인 시간은 여전히 작년 겨울이었다. M이 짙은 녹색의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나가던 그 겨울에 시간이 멈춰있다. 어쩌면 그때 머리를 쨍하게 울리던 카페의 도어벨 소리를 기점으로 시간이 멈춰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까치집이 지어진 머리를 털며 몸을 일으켜 집 안을 둘러봤다. 어느덧 읽지 않고 쌓아둔 시집들이 무너져 있다. 방 한쪽에는 형형색색의 빈 술병과 맥주캔이 크리스마스 트리의 오너먼트인 척 집을 장식하고 있다. 어렵게 구해 소중히 여기던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 초판본은 소파 밑에 숨어 끄트머리만 내보이고 있다. 집이 어두웠다. 커튼을 확인했다. 보기 좋게 젖힌 커튼 뒤로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집이 너무 어두웠다.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빛났던 것이 사라졌다. 다시금 떠오른 그날에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돌린 시선의 끝에 랩톱의 전원이 꺼지지 않은 채 입을 벌리고 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침대에서 일어나 랩톱으로 다가갔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의자에 앉아 게슴츠레 뜬 눈으로 화면을 바라봤다.


[세곗ㅣ간]

세계시간으로 검색한 결과입니다


술 냄새를 풍기는 검색창 밑으로 오랜만에 맞이하는 세계지도가 보인다. 까만 마우스 커서가 제 목적지를 찾아가지 못하고 파리에서 체류하고 있었다. 트랙 패드에 천천히 손을 올려 커서를 왼쪽으로 슬그머니 옮겼다. 이래서 음주 운전이 안 된다는 거야, 네가 가고 싶었던 곳이 이곳이겠지, 하며 마침내 도착한 곳. 런던이었다. 모니터가 뚫어질 듯 그 두 글자를 응시했다. 깜빡, 하더니 숫자가 바뀌었다. 시간이 흐른 것이었다. 눈을 굴려 탁상시계를 바라봤다. 꼬박 여덟 시간의 차이가 난다. 지금 M이 한창 혼자만의 싸움을 할 시간이다. 잠에 들지 못하고 M을 괴롭히는 생각들과 맞서 싸우는 시간 말이다. 짐들도 무거웠을 텐데 ‘그 생각들’까지도 런던에 가지고 갔을까? 혹여나 한국에 두고 갔다가 누구에게 들킬까 가져갔다면? 아니면 런던에 그 생각들을 버리고 오려고 가져갔을까? 아니면 열 다섯시간의 비행 동안 연료처럼 태워버렸을까?


정신이 퍼뜩 들며 술이 깼다. 게슴츠레 떴던 눈에 힘이 들어간다. 요란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떼어냈던 M의 흔적을 다시 찾아와 채 아물지 않은 상처 위에 정성스럽게 붙였다. 한 번 떨어진 탓에 끄트머리가 조금 너덜거렸지만, 입김을 불어 조금이라도 더 단단하게 붙였다. 도마뱀이 일정 시기가 되면 탈피하는 것처럼 어떠한 마음을 먹고 샤워를 했다. 덧붙인 M의 자리가 물에 젖지 않게 하려 꽤 애를 썼다. 옷장에서 아직 태그를 떼지 않은 짙은 녹색의 셔츠를 입었다. 단추를 다 잠갔다가 숨이 막혀 맨 윗단추 하나를 풀었다. 기하학적 패턴으로 널브러져 있던 시집들의 먼지를 털어 보들레르의 시집과 함께 다시 쌓아 두고, 술병과 맥주캔을 한데 모아 현관 앞에 두었다. 크리스마스는 한참 전에 지나갔으니까.


달력을 찢고 이번 달의 1일을 바라봤다. 그리고 M이 있는 곳의 날짜까지 눈으로 뜀박질을 했다. 내가 놓친 M의 시간을 따라가려 바쁘게 움직이느라 발목이 뻐근했다. 내 마음만큼이나 삐뚤어진 안경을 코에 얹고 언젠가 사두었던 편지지 뭉치를 꺼내어 책상에 흩뿌렸다. 한참이나 켜져 있던 랩톱을 닫고 구석으로 밀어놓았다. M에게 닿을 편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M을 위한 편지를 썼다. M을 향해 편지를 쓰는 시간 동안은 오롯이 M만을 생각할 수 있다. M이 살아갈 시간을 먼저 살아가며 다가올 M의 여덟 시간을 정돈하고 싶었다. 어디서 샀는지 좀처럼 기억할 수 없는 편지지를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마법 양탄자 삼아 내가 놓친 M의 시간을 열심히 비행한다. 양탄자가 젖으면 찢어지기 십상이기에 눈물을 양손으로 틀어막을 때도 있었다. 수취인 불명의 혼잣말이라도 서운하지 않았다. 새해가 되면 절에 가 연등을 띄우거나 기왓장에 염원을 쓰는 사람들처럼, M의 하루가 괜찮길 바라길 기도하는 것이었다. 하느님께 고해성사하며 M을 위한 부적을 써 붙이는 순간들. 검지 손가락에 늘 박혀 있던 묵주 반지를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춰두었다.


펜을 든 그 순간부터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혹여나 나의 날카로운 필체가 괜히 M에게 생채기라도 낼까, 호흡이 달리는 긴 문장들이 M의 목을 조르지 않을까 계속해서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그렇게 나는 너의 시간을 살고 있다. 해가 떠도 이어지는 너의 긴긴밤에 보초를 선다. 네가 좋아하는 여름에 먼저 닿아 이름 모를 나무와 들풀에 안부를 건네고 있을 테니까.


*추크츠방(Zugzwang): 독일에서 유래한 체스 용어, 어떤 수를 두어도 불리해지는 강제적인 상태를 의미함.
**체크메이트(Checkmate): 체스 용어, 킹이 공격받아 피할 방법이 없는 상태로, 체스 게임이 종료되는 순간을 의미함.
***블런더(Blunder): 체스 용어, 심각한 실수로 인해 게임의 흐름이 나빠지는 결정적인 실수를 의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