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저와 사람 취향이 같으세요?

by minmin



"어서 오세요."

카페를 들어서자 주인이 말한다.

"뭘 드릴까요?"

"따뜻한 아메리카노 주세요."

"3,500원입니다."



대화는 끝이 난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과 필요한 언어만을 구사한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유는 나와의 연결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두어 번째 카페를 가면 이런 이야기 정도는 할 수 있다.



"글 쓰시나 봐요."

"네, 직업이라서요."

"작가세요?"

"아니요. 작가는 아니고요, 생계형 글쟁이예요."

"먹고사는 게 가장 중요하죠. (웃음)"

"그렇죠, 뭐. 사장님은 카페 한 지 오래되셨어요?"

"아니요. 얼마 안 됐어요. 먹고살려고 하는 거예요."



나도 관찰을 하지만 카페 사장도 나처럼 관찰했을 것이다. 얼굴을 아는 사이에는 탐색의 대화가 오간다. 이후로 대화는 날개를 달게 된다. 다음에 만나면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결혼은 하셨어요?"

"네. 아이가 하나 있어요. 사장님은요?"

"저는 둘이요."

"힘드시겠어요. 하나도 이렇게 힘든데.."



공통분모를 찾았기 때문에 나와 사장님 사이에는 유대감이 생겼다. 다음 만남부터는 선택의 문제다. 더 말하지 않거나 더 깊은 이야기를 하거나. 우리는 대외적으로 알려도 좋은 개인 정보의 가이드가 있다. 아주 가벼운 팩트를 기준으로 이름, 나이, 커피 취향, 직업, 결혼 여부 정도가 노출 가능한 개인 정보 틀 안에 있다. 더 알고 싶다면 다른 계기가 필요하다. 모르는 사람이 아는 사람이 되는 과정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1대 1 대화의 시간이다. 이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깊은 사이로 나아가기 힘들다.



내 주변인들의 관계를 단계로 나눠보면,

1단계, 얼굴은 알지만 말하지 않는 사람

2단계, 얼굴을 알고 있으며, 가벼운 인사만 나누는 사람

3단계, 얼굴을 알고, 가벼운 인사와 근황을 묻는 사람

4단계, 얼굴을 알고, 가벼운 인사와 근황, 그리고 내 가족들의 안부를 묻는 사람

5단계, 관심사에 대한 대화와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

6단계, 고민을 상담하는 사람

7단계, 내 작업물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사람

8단계, 살아있는지 여부를 묻는 사람

9단계, 무소식이 희소식인 사람

10단계, 잊혀진 사람



쓰다 보니 10단계나 되었다. 내 인간관계의 대부분은 4단계에 있다. 더 나아가기 힘든 임계 단계, 그 이상이 되려면 충분한 데이터와 친분이 쌓여야 하므로 벽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5단계로 들어서는 것이 힘든 일은 아니다. 어떤 사람과는 많은 단계를 건너뛰기도 하는데, 그중 대부분이 비슷한 사람 취향을 가졌다. 조용히 자기 일에 몰두하고 능숙하게 처리하며 작은 일에 깊이를 가진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비교적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소극적이다. (좋아하지 않는다.) 이름 없이 유능한 소시민인 것이다.



어쩌면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 끼리끼리 노는 것과 같다. 이름 없이 유능한 소시민은 내 인생의 결승점이다. 이름 없는 것, 소시민인 것은 이루었지만 아직 유능해지지 못해 그 결승점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사실 얼마나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유능에 대한 정의가 아직 명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무의식적으로 나는 허생을 꿈꾸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모든 세상 이치를 깨닫고 조용히 사는 사람, 어떻게 하면 부를 쉽게 얻는지 알지만 하지 않는 사람 말이다. 요즘 세상에 가만 앉아서 세상의 이치를 깨달으려는 것이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유능이란 이런 것이다. (그런데 정말 무얼 해서 먹고살지?)



그래서 정말 무엇을 해서 먹고살 수 있을까. 어쩌면 현재의 무력함은 마흔에도 계속되는 이 풀지 못한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오는 것인지 모르겠다. 지금 가진 것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동경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무엇이든 해보지 못하는 덜 떨어진 실행력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매번 세상과 타협하기 위해 반복하는 문장은 '넌 예술을 하는 게 아니야.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는 게 아니야. 먹고사는 일을 하는 것뿐이야.'이다. 어지간히 되뇌지 않으면 듣질 않기 때문에 청탁 원고를 작성하는 내내 나는 이 문장들과 친해지려 노력한다. '그래도 야마는 있어야 할 것 아니야!' 이 문장은 앞의 문장과 열심히도 싸운다. 일이 아니라 인생에도 이 질문은 그대로 적용된다. '뭘 그렇게 열심히 무언가가 되려고 하는 것이냐, 니가 뭘 한다고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냐, 먹고사는 일에 집중해라.'와 '그래도 인생에 야마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의 싸움인 셈이다. 누가 이길 것인가. 누구든 이겨라. 뭐든 되겠지.



(쓰면 쓸수록 해결될 줄 알았는데 더 허탈해지는 이유, 어딘가는 있겠지? 찾을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