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루씨 Jan 10. 2021

복직 왕

요즘 광고회사의 조직문화

소수의 임원을 빼고는 모두 서로를 프로로 부르는 수평적 조직에서 일하고 있다.

나이 많다고 혹은 경험이 더 있다는 이유만으로는 존중받지 못하고, 오로지 그때그때 논리와 

아이디어로 정정당당하게 서로 경쟁할 것을 요구받는다.

능력 자본주의 시대에 맞는, 완벽하게 이상적인 회사다.


그런데 함정은 대부분 우리가 상대하는 마케팅의 타겟은

밀레니얼(20대와 30대 초반), 그리고 더 어리게 보면 젠지(10대와 20대 초반)이라는 사실.

그들의 일상과 취향을 제대로 이해 못하고, 그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내지 못하면

별로 존재 가치가 없다.

그래서, 얼핏 보기엔 공평한 것 같지만
우리 일은 사실 나이가 들수록 불리해지는 구조다



평생 마케팅 일을 했는데,
직급에서 나오는 의사 결정권이 없으면
그냥 아무것도 아니다

젊은 친구들과의 경쟁은 언제나 긴장되고 가슴 떨린다.

게다가 중국 주재 5년을 마치고 막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에

스스로 위축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반전)


의외로 일은 할 만했다!!


소비자가 엄청 바뀌었네, 디지털이 판을 치네 해도 

사람들의 생각 구조는 비슷하고 아무리 디지털이라 해도 기본 메시지는 필요한 거니까.

빅 데이터가 중요하다고 하는데, 어차피 마케터라면 기본적으로 숫자나 통계에 대한 감은 있다. 

숫자가 커진다고 갑자기 기본 분석 프레임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본사로 돌아와 팀장으로 다시 시작한 회사 생활은 힘들었다.

동기가 임원이 되고, 까마득하게 어리던 후배가 같은 팀장 급이 되었다는 것 정도는 애교였다.


문제는 같이 일하는 팀원들과의 관계였다. 


옛날 대학 다닐 때는 복학생 선배랑 4~5살 차이만 있어도 엄청난 세대 차이를 느꼈는데

나는 지금 주로 같이 일하는 팀원들과 보통 10~20살 차이가 난다.

게다가 요즘 젊은이들은 하도 옛날과 다르다고 하니 뭐라고 말 붙이기가 지레 겁도 난다.


계속 말을 높여도 ‘에이 그냥 말 놓으세요’ 하는 녀석이 하나도 없다.
정말 하나도 없다
무슨 말을 해도 조심스럽다


극소심 A형인 데다 어느 회의에 가든 독보적으로 나이가 많으니 혼자 전전긍긍이다.

그야말로 살얼음판


자연스럽게 그 옛날 복학생 선배들이 떠오른다.

저학년 때, 4년 이상 차이 나는 높은 학번의 선배가 

어느 봄날 불쑥 전공 기초 과목 수업에 나타나서 군대 다녀왔다고 쑥스럽게 인사를 했다.

외모상으로는 거의 교수 급이었다.

옛날 학점 잘 못 받은 과목을 졸업 전 관리 차원에서 재수강해서 듣는다고 했다. 

그리고 성실해 보이는 여자 후배(그러니까 나)에게 접근해 밥을 사 주며

필기 노트 복사 이야기를 은근히 꺼내곤 했었다. 


지금 내가 직장 후배들에게 이런 모습이 아닌가.

20대 후반의 대리급 후배와는 20살 차이가 난다. 요즘 트렌드 잘 모르겠다면서 맨날 물어본다. 

파워포인트 기술은 신통치 않으면서 본 것은 있어 가지고 자꾸 이것저것 부탁한다. 

밥 사주겠다고 어디 갈래? 묻기만 하고 구시렁구시렁 이 이유 저 이유 달아서

결국은 자기 취향대로 한식집을 데려간다.

마주 앉으면 궁금하지도 않은 중국 이야기를 자꾸 꺼낸다. 

미국 뉴욕 이야기를 들어도 신통치 않을 요즘 아이들에게 중국 북경 이야기가 가당키나 하냔 말이다.


이제 내가 그 상황이 되고 보니 옛날 그 복학생 선배들에게 왜 그리 쌀쌀맞게 굴었나 후회가 된다.

함부로 말 놓는다고 속으로 흉봤던 기억도 마음 아프다.

맨날 나랑 다른 친구랑 헷갈려했던 선배의 어리바리함도 이제야 이해가 된다.

북경 미세먼지 때문인가 나이 때문인가 예전보다 총기가 확연히 떨어져

후배들 이름과 인적 사항 기억하기도 힘들다.

겨우 입력한 A의 정보를 B에게 아는 척 이야기했다가 진땀만 흘렸다.

아, 그거 저 아닌데요?

머릿속에서 “쟤는 결혼했다던가, 아니던가.. 쟤가 요새 목공예를 한다는 그 친구 맞았나? ”하며 

무슨 말을 꺼낼까 궁리하다가 자연스럽게 대화할 포인트도 놓쳐 버리고,

그냥 별로 주변에 관심 없고 분위기 파악도 못하면서, 매사에 뜨악한 복직 왕이 되어 버렸다.


원래 나도 좀 재미있는 사람이었는데.

처음에 보기보다 지내다 보면 괜찮다는 이야기 꽤 들은 사람이었는데.

아 

지금은 그 모든 재미를 상실하고 

도대체 이해도 안 되고 아무 재미도 없는 무맛인 사람이 되어버렸다.

돌려 말할 것 없이 나는 그냥 아싸(아웃사이더)다.


이렇게 되고 보니, 젊은 친구들에게 좀 사정을 하고 싶은 비굴한 마음도 생긴다.

나만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니.


너희도 나를 좀 생각해 주면 안 될까?

너희가 세상의 중심이면 주변을 향한 배려심이 있어야지.

걸그룹 센터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잖아, 리더십이 중요하다며.


너희 또래가 겪는 미래에 대한 불안함, 내가 좀 안단 말이야.

나도 그 나이와 연차를 겪었으니까. 

그리고 그 불안함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 몇 가지 정도는 알려줄 수 있다고. 

대신 확 달라진 이 세상에서 버텨 내려고 노력하는 이 선배의 불편함을 

너희도 이해하고 배려해 주면 안 되겠니.


수평적 조직 문화 다 이해하고 좋아.

그래도 대화는 해야 서로 이해를 하지. 

이왕 같이 모여 있는 회사, 아닌 거 아니라고 솔직히 말하고 잘한 거는 서로 칭찬하면서. 

상호 윈윈 하자고.

쿨하게. 


얼죽아(얼어죽어도아이스아메리카노) 세대와 한 테이블에 앉아 보고자 애쓰는 복직 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