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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긍정 Aug 09. 2016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몇 가지 교육 통념들.

아이들은 우리의 보호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보호가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으려면
온갖 산만한 일상과 분주한 삶으로부터 보호해주어야 한다. 

- <길들여지는 아이들,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 중


  이러한 보호는 비단 우리 아이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좀 더 큰 학생들, 그리고 이미 더 커버린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해당이 되겠죠.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우리는 교육으로부터, 그리고 잘못된 교육 통념들로부터 너무나 많은 세뇌를 당해왔습니다. 지금이라도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 위험으로부터의 과잉보호가 아닌 각종 통념들로부터의 보호를 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몇 가지 교육 통념들


1. 수능은 공정하다.


우리나라의 교육 문제가 비단 오늘날의 일만은 아닙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교육 문제들. 이 문제들을 해결해보겠다고 나온 정책들마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문제들을 갖다 붙이는 판국이죠. 그래서 그런지 각종 언론에 실리는 교육 관련 문제들은 이제 뭐 새롭지도 않고, 사람들 역시 반쯤 포기한 듯 무덤덤한 반응들이 대부분입니다. 일종의 '학습된 무기력함'을 보여주고 있죠. 

그런데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사람들이 흔히 다는 대표적인 댓글들입니다. 

"차라리 예전 시험제도가 낫다. 공정했던 본고사 시대로 돌아가자. "
"가장 공정한 건 수능 100%로 해서 정시로 뽑는 것."


지금의 교육정책들이 오죽 답답하고 불공정했으면 이러한 얘기들이 나올까 하는 생각도 들기도 하지만, 표준화된 시험이, 정시가, 100% 수능이 과연 정말 '공정한' 것일까요?

겉으로 보기엔 어떠한 주관적 평가의 개입 없이 오로지 개인의 노력으로 객관화된 점수를 얻는 시험이기에 굉장히 공정한 시험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이미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수능이라는 시험제도에는 사교육과 부모의 경제력, 정보력이 충분히 관여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사실이 개인의 노력으로 포장되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기에 더더욱 위험할 뿐이죠. 겉으로 보기엔 공정해 보이는 시험이지만 실상은 태어나고 자라온 환경, 어떠한 학교를 가느냐, 부모의 경제력과 정보력, 각종 과외와 학원 수업 등 수많은 환경적 요인 등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수많은 통계자료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죠.

사실 애초에 '공정한' 시험 자체가 있기 어렵습니다. 개인의 출발선 자체가 너무나 다르기에 애초에 '경쟁'을 통한 서열화 자체가 불공정한 것이죠. 그 수단이 표준화된 시험이라고 해도 말이죠. 개인의 노력만으로 우리 교육 시스템에서 이러한 출발선을 극복하기엔 너무나 힘이 듭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추첨제'의 도입입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단의 링크를 참고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수능이 애초에 개인의 역량을 제대로 평가하는 수단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수능이 왜 만들어졌는지, 어떠한 취지와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안다면 지금의 시험제도가 얼마나 왜곡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애초에 수능은 학생이 가진 '일부 역량'을 평가하는 '여러 제도 중 하나'로 만들어졌습니다. 즉, 학생의 모든 역량을 결코 판단할 수 없는 시험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협소한 일부 역량을 평가하는 수능이라는 시험을 지난 몇십 년간 표준화 시험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험의 점수를 통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평가하고 앞으로의 인생까지 결정지어 버리는 말도 안 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죠. 믿기지 않으신다고요? 더 자세한 내용은 수능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박도순 초대 수능평가원장의 강연 동영상을 한 번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출처 : 평가의 다양성 - 박도순 초대 수능평가원장, 컨퍼런스 위기>


왜 이러고 있을까요? 바로 살벌하게 서열화된 구조에서 객관식 형태의 시험을 통해 공정성에 대한 이의 제기와 시비를 피할 수 있고, 채점의 편의성을 확보할 수 있으며 선발하는 입장에서도 선발의 편의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죠. 즉, 편하기 때문입니다.


설마 진짜 이러한 역량이 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해서 지금껏 이러한 시험을 운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죠? 물론, 이러한 역량이 정말 필요한 분야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의 다양한 역량과 길을 반영하지 않고 모두에게 이러한 역량을 강요하는 것이 문제이죠. 

백번 양보해서 나름의 공정성과 신뢰성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시험의 교육적 타당성은 있을까요? 수능이 대학에 입학할, 혹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검증하는 시험일까요. 아니면 소수의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학생들을 한 줄로 나열하기 위한, 서열화시키기 위한 수단일까요. 

수능의 난이도와 관련된 이슈들만 보더라도 이 난이도가 학생들의 역량을 진단하기 위한 자격을 기준으로 조정되고 논의되는 것이 아니라 소위 물수능, 불수능과 같이 너무 쉽거나 너무 어려우면 그만큼 '선발'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논의만 가득할 뿐입니다. 즉, 선발의 공정성, 편의성만 있을 뿐, 교육적 타당성은 결코 없는 것입니다. (물론, 선발의 공정성조차 거의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수능의 비중을 완화하고 학생부종합전형을 강화하는 등의 지금의 교육정책들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얘기하는 것 역시 결코 아닙니다. 수시의 비중이 늘어나는 등 겉으로 보기에는 교육적 타당성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대입 선발 정책이 변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부모의 경제력과 정보력이 개입될 여지가 더 커져가고 있는, 학교의 역량에 따라 그 격차가 커질 수 있는, 선발의 공정성마저 약화되고 있는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바로 '실력주의'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뒤에서 별도로 다루겠습니다. 



2. EBS가 있어서 그나마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고 수능 준비를 할 수 있어요. 수능-EBS 연계 정책.


이 역시 겉으로만 보면 지역적 격차를 줄여주고, 각종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고도 EBS를 통해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수능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기에 꽤 좋은 정책으로 보입니다. EBS를 통한 수능 출제 비중 역시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기에 EBS 수능교재와 강의만 잘 듣는다면 값비싼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고도 수능을 잘 준비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육, 우리 학교의 모습을 볼까요. 하나같이 해당 교과의 내용을 의미 있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EBS 수능교재가 수업의 주교재가 되어 학교조차 마치 학원처럼 입시 준비에만 매달리는 꼴이 되었습니다. 학교의 역할은 역시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곳인 걸까요, 아니면 진정한 배움의 장인 것일까요교육적 타당성이 거의 없는 수능을 준비하기 위해 국가가 발 벗고 나서서 학원처럼 또 다른 형태의 주입식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국가입시학원'인 셈입니다. 

국가가 진정으로 해야 할 역할은 EBS를 통해 수능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수능과 같은 시험제도를 혁신하는데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국가가 이렇게 수능을 뒷받침하는데, 학교는 어떨까요. 당연히 객관식 문제풀이 기관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겠죠. 수능-EBS 연계와 학원의 차이점은 그나마 값이 저렴한 또 다른 학원을 다니는 것이며, 지식을 암기하는 내용이 학원 교재가 아닌 EBS 교재로 바뀐 것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방식이 지속되는 한, 우리의 교육은 결코 주입식 교육, 맹목적 입시 교육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3. '실력주의'에 대한 오해. 실력주의 사회가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앞서 언급했듯이 객관식 형태의 맹목적 문제 풀이 등 수능과 같은 표준화된 시험으로 인한 폐해를 해결하고자 점차 대입시험의 형태가 변해가고 있습니다. 수능의 비중은 점차 줄어들고, 수시의 비중이 커지고 있으며 특히 입학사정관제부터 시작해 최근에는 학생부종합전형이 대입의 핵심 요소가 됨으로써 학생들과 부모, 학교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교육적 타당성을 나름 확보하고자 한 노력들은 도리어 '부모, 사교육, 학교 역량'의 의존도를 높여버리며 그나마 조금이라도 있었던 선발의 신뢰성마저 떨어뜨리고 있습니다부모의 정보력과 경제력이 개입될 여지가 더 커졌음은 물론이고, 학생부종합전형을 준비하기 위해 학교에서는 입상 가능한 각종 교내 대회들을 양산해내며, 학생들을 위한 나름의 포트폴리오들을 만들어가고 있으며, 학생과 부모의 불안심리는 신속하고 발 빠르게 준비된 사교육 시장에 이미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제대로 준비할 역량도 갖추지 않은 채, 학교 구성원의 의견은 제대로 수렴하지도 않은 채, 그저 하향식으로 정책들을 무작정 정하고 추진해낸 결과입니다. 백번 양보해 나름 좋은 취지를 가지고 이러한 정책들을 추진했다고 한다면, 도대체 왜 취지에 걸맞은 결과를 얻어내지 못한 것일까요. 저는 <실력주의사회에 대한 오해(3): 학벌 타파를 통한 신세습사회 구축, 박남기>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흔히 우리는 '학벌주의'로 인해 오늘날 많은 문제들이 야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학벌'은 크게 '지위학벌'과 '파벌학벌'이라는 두 개념으로 나뉘게 됩니다'지위학벌'이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출신 학교의 사회적 지위나 등급을 의미하며 학벌이 좋다고 할 때 쓰이는 말입니다. '파벌학벌'이란, 같은 학교 출신에 의해 만들어진 파벌을 의미하며 조직 내에서 같은 배경을 가진 사람들끼리 특정 직업을 독과점하는 현상을 나타냅니다.

지위학벌이 문제가 되는 것은 개인의 실력과 실제 상관관계가 낮은 학벌 또는 졸업장만으로 사회적 지위와 재화 배분이 좌우되는 것이며, 파벌학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조직 내 파벌이 가져오는 불합리한 의사결정, 인사, 재원 배분, 부조리 등입니다. 지위학벌과 파벌학벌의 문제는 겉으로 보기엔 동일한 학벌의 폐해로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사실 서로 다른 현상이며, 해결책 역시 서로 다르다고 필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한편, 우리나라는 이러한 학벌주의를 타파하고자 '실력주의'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사회가 합의한 개인의 실력을 기준으로 사회적 재화와 지위를 배분하려 합니다. 그래서 실력(능력)중심사회를 구현하고자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모습은 학벌사회적 특성이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세습사회적 특정마저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대학 입시에서의 서열화가 학벌사회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입학전형요소를 다양화하고 입학사정관제, 학생부종합전형을 도입하는 등 각종 개선을 시도함으로써 겉으로 보기엔 순수하게 학생의 다양한 능력을 중심으로 선발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부모의 직접적 영향력이 점점 더 크게 작용하는 쪽으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이는 실력주의에 대한 개념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실력주의 역시 크게 두 가지 개념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먼저 '이상적 실력주의'는 개인의 실력을 기준으로 사회의 재화가 배분되면 사회적 갈등이나 무한 경쟁 등 많은 문제가 해결되고 보다 공정한 사회가 될 것이라고 믿는 관점입니다. 학벌주의를 타파하면 진정한 실력주의사회가 구현될 것이라 믿습니다. 

반면, '현실적 실력주의'란 개인의 실력이 사실 노력만이 아니라 타고난 재능, 부모의 지원, 운 등의 다양한 요인이 결합하여 만들어지기 때문에 실력을 기준으로 사회재화를 배분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공정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 관점'입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실력주의사회가 진행되면 빈부격차, 경쟁, 갈등, 교육전쟁 등의 제반 문제가 도리어 심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현실적 실력주의자들의 관점이라고 합니다. 

생각해볼까요. 과연 정말 학벌주의를 없애고(여기서의 학벌은 지위학벌을 의미), 실력주의 사회를 구현한다면 이상적인 실력주의 사회가 구현될까요. 아니면 사회 특정집단의 인기대학과 학과 점유율은 높아가고, 특정집단의 고위공직, 의사, 법조계 점유율 또한 더욱 높아갈까요. 

사실 진짜 우리나라의 문제는 '실력주의사회의 그림자'인데, 학벌주의 병폐라고 착각한 진단 오류, 잘못된 진단을 근거로 실력주의를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제도를 구축한 제도 설계의 오류, 그리고 이러한 학벌타파를 주장하면서 그 안에서 신세습사회를 구축해가고자 하는 숨겨진 의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지금과 같은 결과를 초래했다고 합니다. 진짜 타파해야 할 것은 '파벌학벌'인데 말이죠. 

정리하자면, '파벌학벌의 폐해'를 '지위학벌의 폐해'로 착각하여 보다 완벽한 실력주의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파벌학벌의 심화로 나타나고 있으며, 지금과 같은 파벌학벌을 타파하기 위해선 실력주의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학력을 기준으로 역차별을 해야 한다고 필자는 얘기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정책들은 선발의 타당성을 높인다는 명목하에 부모의 직접적인 압력 또는 영향력 행사가 가능한 제도를 도입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을지도 모릅니다. 비단 입시제도뿐만 아니라 법학전문대학원 등의 제도 역시 말이죠. 결국, 지금의 학벌문제는 오히려 실력주의사회의 그림자이므로 이를 완화시키기 위해 실력주의적 요소를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이상적 실력주의가 아닌 현실적 실력주의이기에) 역으로 실력주의 사회의 그림자를 옅게 하는 보완책을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사회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실력'의 개념 역시 변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능부터 각종 국가고시 등 우리 사회가 인정하고 평가하려는 실력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 실력의 개념이 진정한 의미의 실력으로 재정의되지 않으면 지금의 실력주의 사회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은 도리어 지금의 사회 구조를 고착화시킬 뿐일 것입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 링크(<실력주의사회에 대한 오해(3): 학벌 타파를 통한 신세습사회 구축, 박남기>)를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4. 우리나라에서 '공부'를 잘한다는 의미에 대한 오해와 착각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공부를 잘한다.

학생이든, 학부모든 어느 누구든 공부를 잘한다는 이 문장은 대부분이 갖고 싶고 이루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공부를 잘한다는 건 곧 어느 정도 사회에서의 성공과 출세를 의미하기 때문이겠죠. 우리나라가 인정하는 '실력'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공부를 잘한다는 것이 정말 '진짜 공부'를 잘한다는 것일까요?

<공부 잘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 이한>이란 글에서는 우리나라에서의 공부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정해진 기간에 정해진 책으로 문제 풀이에 대비한 외우기를 중심으로
머리 쓰는 노역을 우리는 흔히 '공부'라고 한다.


동의하시나요? 그래서 저자는 이러한 노역의 습관, 즉 공부 노예들의 표준화된 7가지 습관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 주어진 노역을 얼마나 잘 해내느냐에 따라 장래의 사회 계층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또는 더욱 과장되게 인식하고 틈틈이 이를 상기하여 자신을 채찍질한다. 공부 잘하는 사람들은 결코 막연하고 애매한 소망을 갖고 공부하지 않는다.

2) 공부를 삶의 가장 우선순위에 놓는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은 봉사활동이나 친구를 만나는 일은 시험공부와 숙제를 다 하고 난 뒤에 시간이 남으면 하는 일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의 삶은 언제나 자신들을 평가하는 통제자의 손아귀에 놓여 있다. 연예인을 좋아하거나 취미 활동을 하더라도, 지적 노역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수단으로 할 뿐,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3) 이성친구를 사귀지 않거나 사귄다고 해도 공부에 방해되지 않는 방식으로 사귄다. 사랑은 노역을 위한 충전기요, 발전기다.

4) 단조로운 생활을 한다.

5) 자신의 지적 활동을 주어진 노역에 맞춘다. 쓸데없이 생기는 의문은 싹부터 자른다. 단순 암기보다는 이해를 바탕으로 한 암기를 중시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이해'란 문제를 푸는 데 꼭 필요한 만큼의 이해를 뜻할 뿐이다. 더 깊이 파고드는 일은 금물이다.

6) 노역을 아주 능동적으로 한다.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칼날같이 파악해서 행동한다.

7) 시험 전의 압박을 견딜 줄 안다. 찬찬히 시간의 고문을 견디면서 시험공부라는 노역을 해낸다. 


이러한 일곱 가지 습관을 두루 갖춘 실력자들이 지금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진짜 공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삶으로부터의 배움 그 자체가 사실 진짜 공부가 아닐까요. 적어도 학교에 갇힌 공부, 시험에 갇힌 공부가 아닐 텐데 말이죠. 



5. 배움은 '학교'에서만 이루어지는가?


먼저 학교가 만들어지기 '전'을 상상해보려 합니다. 학교가 만들어지기 전, 사람들은 어떻게 공부를 해왔을까요? 사람들은 어떻게 배우고 있었을까요? 아마 삶 전체로부터 하루하루 모든 것들을 자연스럽게 배워갔을 겁니다누군가가 획일적으로 정해준 여러 가지 과목과 기술을 획일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다양한 배움들을 충족시켰겠죠. 물론, 주위의 누군가의 도움들이 있었겠지만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떠한 가요? 마치 학교에서만 배움이 일어나는 것처럼 학교에선 열심히 누군가가 표준화시켜놓은 여러 과목들의 수업을 언젠가 다가올, 어쩌면 앞으로 '불필요하게 될' 미래를 위한 지식을 위해 억지로 꾸역꾸역 열심히 '듣고' (과연 배우고 있는지는 의문) 학교에서 나온 후, 우리는 어떠한 배움을 삶 속에서 내면화하고 익히고 있을까요?

<학교에 관한 거짓말을 넘어, 김현수> 글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배워야 할 모든 것이 학교에 있고 학교만이 배움의 장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 말이 너무도 당연하게 들린다면 우리는 이미 타성에 젖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이들이 동네에서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무시하고 아이들을 그저 학교로 몰아넣기만 했다. 
학교만이 배움의 장이라고 강요함으로써 아이들로 하여금 그 무수한 삶의 터전을 배움의 장이 아닌 요상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시장에서 물건을 팔고, 거리에서 일을 하며, 경찰들이 마을을 순회하는 것에서는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배움은 오직 책과 선생님에게만 있다고 거짓말을 해온 것이다.


미국의 교사 존 테일러 개토는 26년 동안 자신이 교사로서 저질렀다고 고백한 일곱 가지 죄 가운데 하나가 '아이를 교실에 구속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사회, 그리고 이미 세뇌된 우리는 아이들에게 학교에서만 배움이 있다는 거짓말을 하여 많은 우리 이웃의 삶을 비하시키고 만 것입니다. 아이들은 그저 정형화된 희망만 복제하며 주변의 이웃에겐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마당에 어떻게 아이들이, 또 교사와 학교가 그런 이들과 교류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을 필자는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배움의 장인 학교에서는 제대로 된 배움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굳이 길게 말하지 않고 다음의 문장 정도로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 최고 수준의 강의를 무료로 올리겠다는 꿈을 실천에 옮겨 유명해진 칸 아카데미 설립자 살만 칸 역시 교육계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 많이 벌어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다. 그에 따르면 학교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일이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학생들에게 강요된다. 임상실험조차 거친 적 없는 신약을 환자에게 처방하는 것과 다름없는 짓이 벌어진다. 왜 50분 강의하고 10분을 쉬어야 할까, 지금의 학년제는 무슨 기준으로 정한 걸까, 방학은 꼭 있어야 하나, 시험이 정말 문리를 깨치는 데 도움이 되나. 그는 모든 일이 미심쩍어 스스로 학교를 만들어 새로운 방식을 실험하는 중이다." 

(출처 :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교육 현장의 미신들, 문정우> / 하단 링크 참고)



| '통념은 깨져야 한다'는 통념까지도


  비단 우리가 알고 있는 통념들은 위에 있는 것들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이렇듯 수많은 교육 문제들이 실타래처럼 엉키고 설켜 우리 사회를 병들게 만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행스럽게도 교육과 관련된 여러 통념들을 깨고 진정한 교육을 위해, 진정한 배움으로 나아가기 위한 의미 있는 책과 논의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중 <교육 통념 깨기, 민들레>라는 책은 저에게 참 많은 것들을 깨닫게 해 준 책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 나와있는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통념은 깨져야 한다'는 통념까지도 다시 뒤집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길들이기로 가득한 학교와 사회에서 부디 학생들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잘 성장해나가길 바랍니다. :)  


*참고자료
- <교육 통념 깨기, 민들레>
- <공부 잘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 이한, 교육 통념 깨기 중>
- <학교에 관한 거짓말을 넘어, 김현수, 교육 통념 깨기 중>
- <평가의 다양성, 박도순 초대 수능평가원장, 컨퍼런스 위기>
- <대입제도, 무엇이 문제인가?, 안선회,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
- <실력주의사회에 대한 오해(3): 학벌 타파를 통한 신세습사회 구축, 박남기,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
-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교육 현장의 미신들, 문정우, 시사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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