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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칠이 일상꽁트 Sep 26. 2016

아버지의 그림자_2. 태풍에도 당신이 있어 맑음

문득문득 생각 한 자락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이다. 초가을? 늦여름? 애매한 계절에 태풍주의보가 내렸다.

이맘때 오는 태풍에는 벼가 쓰러진다며 아빠가 속상해하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수업 중에 창문 밖으로 바람이 거세다. 운동장 주위로 심어져 있는 나무들이 바람에 부러질 듯 흔들리고 선생님들은 뭔가 분주하다. 하교 시간은 아직 되지 않았는데 가방을 싸라 하신다. 유치원생 동생이 교실로 찾아왔다. 곧이어 다른 동생들이 찾아오기도 하고, 언니 오빠들이 친구들을 데리러 오기도 한다.

'무슨 일이지...?'


교무실에 갔던 담임 선생님이 교실로 돌아오셨다. 비슷하게 부모님들의 차가 하나 둘 운동장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차들은 차례차례 줄을 맞추고, 차에서 내린 부모님들은 서로를 보며 반갑게 악수를 하신다. 우리가 나오길 기다리시는 모양이다. 도시의 아이들도 겪어봤을 풍경일까?

"태풍주의보가 내렸어요. 바람이 너무 세서 다들 부모님한테 연락했어요. 부모님과 함께 집에 갈 거예요. 부모님이 바빠서 못 온 친구들은 집 근처에 사는 친구들과 함께 돌아갑시다."


태풍? 무엇인지는 알지만 그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아직 모른다. 그저 운동장 밖으로 우리 오토바이와 엄마가 보이는 것에 신이 날 뿐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우리 집에는 차가 없었다. 우리 집의 유일한 교통수단은 '시티 100' 작고 귀여운 빨간 오토바이였다. 그 작은놈이 비바람을 뚫고 씩씩하게도 달려왔다.


엄마가 우비를 들고 교실로 들어오신다. 동생과 나는 엄마 손에 이끌려 우비를 챙겨 입고 엄마의 등에 단단히 매달린다. 지금 생각하니 꽤나 위험했던 것 같다. 비바람 부는 날 오토바이라니. 하지만 당시에는 데리러 올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었다.

무서움도 잊고 달리는 오토바이 바퀴를 따라 퍼지는 비를 감상하며, 무엇이 그리 신이 나는지 연신 깔깔 웃어대며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우리는 아늑한 집에서 따뜻하게 배를 깔고 누워 주전부리를 먹으며 태풍 몰아치는 초가을, 늦여름 밤을 평화롭게도 보냈다.


밤새 내리던 비도 아침이 되니 잦아들었다. 휴교령이 내려질 정도는 아니니 우리는 여느 때와 같이 등교 준비를 한다. 어제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오토바이 운전기사가 엄마에서 아빠로 바뀌었다는 것? 노란색, 파란색 우비를 각각 챙겨 입고 다시 오토바이에 올라탄다. 다른 때 같으면 버스를 타고 갔을 텐데 작기만 한 우리가 걱정스러웠던 아빠의 서비스로 오토바이를 타고 등교하는 호사를 누린다. 아빠는 동생과 나를 태우고 15분 정도 떨어진 학교까지 열심히도 달리신다. 학교 가는 길 중간쯤 있던 개울이 온통 흙탕물이다. 개울이 가득 차다 못해 다리 위로 살짝살짝 물이 차 올라올 지경이다. 밤새 비가 얼마나 많이 내렸는지 실감이 난다.


무사히 학교에 도착해 오토바이에서 내리고 보니 나의 연한 청반바지 앞자락이 온통 젖어있다. 꼭 오줌을 싼 것 같다. 하필 창피한 곳이 젖어버렸다. 동생은 그대로 유치원 교실로 들어갔는데 나는 들어가지 않겠다며 눈물 바람이다. 이대로 들어가면 분명 친구들이 오줌을 쌌다고 놀릴 것이다. 교실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티기 시작한다. 아빠는 곧 마를 것이니 들어가라시지만 고집쟁이인 내가 말을 들을 리가 없다.


아빠는 또 내게 지고 마신다.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나를 번쩍 들어 다시 오토바이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오신다. 돌아온 내 모습에 엄마가 놀라서 뛰어나온다. 아빠는 웃으며 내 바지가 젖어서 돌아왔다며 놀란 엄마를 진정시킨다. 엄마는 기다리면 마를 것을 돌아왔다고 마구마구 잔소리를 하며 서둘러 바지를 갈아 입혀주신다. 다시 한번 돌아오면 오늘 학교는 못 갈 것이라는 엄포를 빼놓지 않으신다.


다시 학교로 출발하기 위해 이번엔 커다란 아빠 우비를 입는다. 덩치가 워낙 작았던 나였기에 내가 2명은 들어갈 것 같은 커다란 우비에 파 묻힌다. 내 우비를 다시 입고 갔다가 어디 바지자락이라도 다시 젖으면 분명 또 돌아오겠다 찡찡거릴 것이 뻔하니 그 큰 우비를 입히셨던 것 같다.


다시 그 길을 반복해 달린다. 축축한 아빠 우비에 얼굴을 비빈다. 그렇게 학교에 도착한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총총 교실로 들어간다.



태풍 하면 어느 동네는 둑이 터지고, 산이 무너진다.
살던 집이 잠기기도 하고, 논밭이 온통 물바다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내게 태풍은 널따란 아빠 등판에 매달려
곧 넘칠 것 같은 다리 위를 작은 오토바이로
씽씽 달려가던 모습으로 기억된다.
엄마 등, 아빠 등 그렇게 번갈아 매달려가며 이만큼 컸다.
그래서인지 일기예보에 무섭게 나오는 태풍예보는
어쩐지 그리운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다시는 해보지 못할 일...
꿈에서라도 다시 한번 비 오는 날 아빠 등에 매달려
오토바이를 타고 신나게 달려보고 싶다.

태풍 몰아치는 무서운 날도
엄마, 아빠가 있어서 내게는 언제나 맑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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