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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안 Sep 13. 2022

젖먹이

<white rabbit>




어떤 꿈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나를 흔들어 깨우는 생경한 소리가 들리고, 나는 어렴풋이 수면마취에서 깨었습니다.


"엄마, 아기 나왔어요"


녹색의 면포에 돌돌 말린 갓난아이의 얼굴이 흐린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 내가 잠에 빠졌었구나. 그럼, 지금 내 배가 열려 있는 건가? 아무 느낌이 없군. 아기가 나왔구나. 머리가 까맣네. 내 아기가 맞구나. 나 다시 재워주겠지 설마? 뭔가 감동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건가? 곧 간호사는 아기를 데리고 사라지고 나는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후처치가 끝나고 회복실로 가는 길. 감사합니다. 마취의 기운이 남아 몽롱한 정신으로 나는 '감사합니다'하고 계속 중얼대며 연신 고개를 까딱거렸습니다. 누구라도 이 감사한 마음을 받아주기를 바라며. 또 감사합니다. 회복실로 도착하고 남편을 만나고 또 감사합니다. 오로가 잘 나오는지 확인하기 위해 내 배를 꽉꽉 누르는 간호사에게도 또 감사합니다. 남편은 내게 아기를 처음 만난 이야기와 집도의가 전하는 말을 전해주고는 쉬라며 이불을 더 끌어 덮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침대에 누운 채로 일반병실로 올라가는 길에 아기를 한 번 더 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신생아실 창 안으로 보이는 아기의 모습은 처음보다 깨끗하고 말갛게 혈색이 돌고 있습니다. 눈도 약간 떳네요. 하지만 그 얼굴에서 떠오르는 그 누구가 없어 조금은 낯설다 했습니다. 저런 인상의 사람을 우리 집안에서 본 적이 있었던가. 남편은 아기에게서 나의 아버지 혹은 자신의 아버지의 모습이 좀 보이는 것도 같은데, 역시 잘 모르겠다는 의견입니다.


수술은 잘 끝났고 불편함은 있으나 아픈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척추에 달린 무통주사 덕분입니다. 남편에게 나 잘 해낸 것 같다고 칭찬을 해달라며 몇 번 칭얼거렸습니다. 예상했던 문제들 없이 잘 넘어가 주었습니다. 혹시 문제가 생긴다면 대학병원으로 전원해야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또 대학병원 출산도 고려를 했던 터라 모든 게 수월하게 진행되어 준 것이 후련할 따름입니다.


모든 것이 일정대로 수순대로 흘러갔습니다. 병원에서는 수시로 나의 상태를 점검하며 회복의 단계를 일러주었고, 남편도 이 낯선 상황을 낯설어 하지 않고 해야할 일을 묵묵히 찾아 해내고 있습니다. 나도 온전한 회복을 위해 최대한 내 몸에 집중했습니다. 무통주사가 도와주고 있을 때 더 열심히 움직이겠다고 소변줄을 제거하자마자 부은 발이나마 걷고 또 걸었습니다. 비는 시간에 아기를 면회함은 물론입니다. 성실한 생활이었습니다.




아기가 태어나고 삼일째 되던 날, 처음 수유실로 향했습니다. 신생아실 앞에서 남편과의 동행을 끝내고 수유실로 홀로 들어갑니다. 그것이 조금 버겁게 느껴졌습니다. 아기를 만나기 전 간호사는 아기를 신체계측한 내용과 특이사항을 일러주었습니다. 오른쪽 머리에 두혈종이 약간있고, 왼쪽 눈꺼풀에 연어반 그리고 음낭수종과 몽고반점이 있다합니다. 대부분 조금씩 있는 문제들이고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문제라고 하지만 마음이 좀 쓰입니다.


수유실은 전체적으로 우드톤에 핑크빛이 도는데 부드러운 전구색 조명이 반사광으로 퍼져있습니다. 거기에 가벼운 플루트 음악이 깔려 한결 더 차분합니다. 아무도 없어 더 다행이라 여기며 앉을 소파를 골라보는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버찌 엄마. 뒤돌아보니 아기를 안은 간호사가 보입니다. 간호사는 손목의 팔찌로 본인임을 한번 더 확인하고 내게 아기를 건네주었습니다. 간호사는 아기를 안는 법을 한번 더 설명하며 자세를 잡아줍니다. 나는 아기에게 젖병으로 먹이겠다고 요청했습니다.


3.5키로그램의 사내아이. 처음 살을 맞대봅니다.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도록 무척이나 가볍고, 팔이 무색하게 너무도 조그맣습니다. 그래서 그 앞에 두고 낡은 숨을 쉬는 것이 불경하게 느껴집니다. 가늘게 뜬 눈빛이 계속해서 조금씩 구르는데 그것이 나를 찾는 모양새인 것 같아 조금 기뻤습니다.


아기의 얼굴은 가는 털들로 뒤덮여 있고 귀가 무척 컸습니다. 콧대는 초음파 사진에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 입니다. 그리고 까맣게 뒤덮은 머리숱. 저와 남편을 닮은 확실한 부분입니다. 그 점도 조금 기뻤습니다. '안녕'하고 말을 건네봅니다.


간호사에게서 젖병을 받아 아기 입에 물려보았습니다. 빠는 힘에 놀랐습니다. 인형같더니 살아있구나 느낍니다. 젖병을 빠는 아기에게 또 말을 건네봅니다. 혹시 내 목소리가 기억나느냐고 물었습니다. 아기는 대답 대신 또 눈을 굴려 나를 찾습니다. 내 멋대로 기억하는구나 해버렸습니다. 이윽고 아기는 젖병을 비우고 나는 계속해서 아기와 눈맞춤을 시도합니다. 참 예쁘다 여겼습니다.


수유실에서 나온 내 온몸이 땀으로 젖어있었습니다. 속옷부터 산모복까지 모두 갈아입어야 할 정도입니다. 약간의 어지럼증에 숨이 조금 가쁩니다. 방금 아기를 만나고 온 일이 현실인지 환상인지 잘 구분되지가 않습니다. 내내 밖에서 기다린 남편에게 무어라 말도 못하고 한동안 손만 잡고 기대었습니다. 몸이 떨립니다. 이 증상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지만 거부하고 싶습니다. 힘든 과정 잘 지나왔는데 왜 지금.


몇 시간 후 수유콜이 또 울리고 다시 수유실로 향합니다. 긴장되는 마음과 몸을 부여잡고 수유실로 들어가 아기를 안았습니다. 아기에게 엄마가 왔다고 목소리 알겠느냐고 계속해 말을 걸었습니다. 젖병을 빨던 아기는 점점 빠는 힘이 약해 지더니 슬슬 잠이 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간호사가 '아이구, 엄마 품이라고 자네’합니다. 아기가 정말 나를 알아보았나 봅니다. 한켠 뿌듯합니다.


하지만 수유실을 나온 후 저의 상태는 오전의 그 때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공황발작. 더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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