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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May 07. 2024

텔테일telltales

나의 항해일지 240421


흰 돛(세일) 가운데 지렁이처럼 매달려있는 것들이 텔테일이다.



“오늘 바람이 많이 돌았지?”

“(두 손으로 곡선을 그리며) 이렇게 이렇게 돌았죠. 그래서 그때 테킹해서 바람이 딱 맞았죠.”


시합이 끝나고, 선수 출신의 참가자와 코치가 나누는 대화. 그리고 그 대화를 듣고 있는 나.

‘아, 바람이 돌았나 보다. 나한테 말도 안 하고.’


도민체전 시합이 있었다. 1년 만에 받은 연락. 작년 한 해는 집을 짓느라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요트를 타러 간다는 것은 생각 밖이었다. 새벽부터 밤까지, 집 짓는 현장이 내 일터이고 또 놀이터였다. 나름 그것도 재미있었지만 바다에서 올려다보는 돛 끝은 그리웠다.


시합 핑계로 코치님의 연락을 받고 창고에 들어가 공구들 사이에 파묻혀 있던 물놀이 장비 박스를 꺼냈다. 상자는 나무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썼다. 지난 한 해 나의 바다는 톱밥이 파도치는 곳이었구나. 뚜껑을 열면 그 안은 다른 세상이다. 먼지 한 톨 안 묻은 슈트며 장갑을 하나씩 챙긴다. 소금냄새를 잊은 말끔한 장비들. 출전을 앞두고 옛 영광의 갑옷을 꺼내는 기사의 마음이 이럴까, 훗.


이번 요트 시합은 신양섭지해수욕장에서 열렸다. 성산일출봉으로 건너가는 광치기해변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바다. 전날 밤 지도와 일기예보를 살펴보니 바람은 남서풍으로 아주 약하게 불고, 시합 시간쯤 물때는 간조에 가깝다. 아, 약한 바람은 내가 잘 못 타는 바람이고, 지난번 시합 때 보니 출발이 내게 가장 어려운 숙제던데… 잠자리에 누워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배의 궤적을 그리다가 잠들었다. 


아침 일찍 한 시간 넘게 운전해서 시합장에 도착했다. 바람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없었다. 고요한 바다와 분주한 사람들. 1년 만에 보는 클럽 멤버들과 인사하고, 안부를 묻고, 김밥과 사발면으로 점심을 먹고, 배를 띄운다.


점심 먹는 동안, 경력이 많은 선수 출신의 멤버에게 이렇게 바람이 없는 날에는 어떻게 타야 하는지 물었다. 


"텔테일만 보고 가는 거죠. 거의 그것만 봐요."


아, 그거! 알고는 있으나 써본 적은 없는 그거. 처음 배울 때 한두 번 듣고 존재를 잊어버렸던 저 꼬리. 세일에 붙어있는 끈쪼가리. 나 그거 뭔지 앎.


돛마다 다르지만, 지금 걸어둔 돛에서는 바람의 방향을 알려주는 텔테일이 세일의 아래위에 각각 두 개씩, 양면에 있으니까 모두 8개가 붙어있다. 요약하자면 텔테일이 슈퍼맨 공중비행하듯 일자로 날리고 있다면 돛이 바람을 잘 안고 진행 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바람이 약해서 나아가는 배의 기세가 뚜렷하지 않을 때는 텔테일을 살펴서 진행방향을 바꾸거나 돛의 각도를 고쳐가면 된다는 뜻. 오케이, 속성과외 완료! 배를 띄워라.


깃발이 올라갔다. 3분 남았다.

깃발이 하나 더 올라갔다. 2분 남았다.

두 개 중에 하나가 내려갔다. 1분 남았다.

마지막 깃발이 내려간다.

시합 시작!

출발선이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인양 그 앞을 오가던 배들이 쏘아지는 화살처럼 내달린다.


결과적으로, 나는 출전 선수 중에 거의 꼴찌를 했다. 거의라고 말하는 이유는 금은동 빼고는 순위를 안 알려줬으니까. 다섯 번의 레이스 중에 꼴찌로 결승선을 통과한 것이 두 번이고 한 명 정도를 뒤에 두고 들어온 것이 또 두어 번이었으니까. 맞다, 결승점 마크를 배로 걸어버린 것도 두 번 있었지. 감점!


확신을 만드는 것은 경험이고 그중에서도 누적된 실패의 경험치가 영양가 높다. 속성으로 배운 과외에는 내 경험치가 빠져있어서, 들은 대로 확신하지 못하고 자꾸만 이것도 건드려보고 저렇게도 방향을 바꾸는 사이에 다른 배들은 나를 앞질렀다. 마지막 레이스에서 모든 기대를 내려놓고 나니 비로소 주위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는 무슨, 입맛이 쓰다. 당연하지, 그래야 시합이지!


돛 끝에 가느다랗게 붙어있으니 당연히 꼬리tail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텔테일telltales이다. 이야기tales를 전하는tell 이. 숨겨진 비밀을 알려준다는 뜻으로 사전에 적혀있고, 특히 어린아이의 고자질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고 한다. 



큰 바람은 따로 내가 읽을 필요도 없이 온몸을 덮친다. 나는 그 단순하고 강한 바람 아래에서 테킹의 하나 둘 셋을 겨우 배웠다. 하지만 미풍이 불 때, 아직 섬세하지 못한 내 더듬이는 바람을 읽을 수 없고, 그때 바람과 돛이 만드는 양력의 나침반이 되어 그 작고 비밀스러운 바람의 이야기를 내게 전해주는 것이 바로 텔테일이다.


여전히 내 항해의 지향점은 바람이 보인다던 코치님의 말, 그 어디쯤이다. 언제쯤 나도 말할 수 있겠지. 두 손으로 커다란 호를 그리며,


“오늘 바람이 어찌나 돌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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