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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Apr 24. 2023

Crew

나의 항해일지. 목숨을 맡기는 동료

연습. 한 시간 동안 네 번 뒤집히던 날



또 다른 연습. 역시 뒤집히던 날


Crew


단순히 같은 직장에 다니거나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단어보다 조금 더 끈끈한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을 때, 그들을 크루라고 부른다. 다양한 곳에서 쓰이고 있는 이 단어의 어원은 선원의 집합이었다. 그 말에는 나의 행동이 전체의 목숨과 직접 맞닿아 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열악한 장비로 대양을 항해하던 선원의 상황에 대입해보면 이 단어의 절박함을 상상할 수 있다. 내가 실수할 경우 일행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고, 그만큼 무리 안에서 한 명 한 명의 역할이 대체불가할 만큼 필수적이고, 따라서 누군가 위험에 빠지면 반드시 구한다는 뜻도 함께 갖고 있다. 


어제는 제주도도민체전 요트시합이 있었다. 올해 결성되어서 카톡으로 겨우 알고 지내던 우리 요트클럽 사람들을 어제 처음 만나볼 수 있었다. 생활의 무대에 있는 사람들이니까 한 번에 모이기 쉽지 않았고, 연습도 개인 시간에 맞춰 따로 하다가 시합이라는 핑계로 드디어 만났다. 다들 각자의 바다를 헤쳐온 사람들.


바다는 사나웠다. 전날부터 이어진 풍랑주의보 때문에 오전에는 배를 띄울 수 없었고, 오후가 되어서 파도가 조금 낮아진 것 같았지만 바람은 여전해서 쉽지 않았다. 평소 연습이라면 이런 바다 상황에서는 항해하지 않겠지만, 오늘은 시합이니 결과가 필요하기도 하고, 또 상대적으로 주변에 시선이 많아서 조난 위험은 적었다. 바람은 북동쪽에서 불어와서 만약에 혼자 전복된다고 하더라도 배는 모래해변으로 밀려올 것이다. 시합 강행을 결정했다. 


윈드서핑이나 카이트보드에 비해 출전인원이 적어서 우리 클럽 맴버들이 전부였지만, 연이어 출항한 딩기요트들이 바다에 늘어선 모습은 꽤나 장관이었다고, 전해들었다. 나는 바다 가운데서 사나운 파도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으니까. 


파도는 딱 지난해 연말 마지막 항해때처럼 높고 거칠었다. 이 바다에서 한 번 뒤집히면 배는 바람과 파도에 밀려 내게서 빠른 속도로 멀어질 것을 안다. 목적지까지 최대한 파도를 신경쓰며 항해했다. 높은 파도는 정면이나 뒤에서 맞으면 괜찮지만 측면으로 맞으면 배를 뒤집는다. 목적 부표까지는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해 지그재그로 나아가야 하는데, 가능한 측면 파도를 덜 맞을 수 있도록 코스를 그렸다. 지난 연말 경험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무조건 일자로 가지 않고 파도에 따라 조금씩 러더를 밀고 당기며 움직였다. 


반환점을 돈 배는 이제 결승선이 된 출발점까지 일자코스로 내달린다. 런 코스에서는 배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킬을 빼는데, 속도가 오르는 대신 전복되기 쉽다. 코치님은 오늘 파도가 높으니 돌아올 때도 킬을 빼지 말라고 지시하셨다. 높은 파도에 올라탄 배는 서핑하듯 파도를 타는 듯하다가 선수부터 내려박기를 반복했다. 그때 바닷물이 배 안을 절반 넘게 채워서 잘 못하면 그대로 물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다 싶었다. 킬이 물속에 그대로 있으니 배는 돛의 힘과 킬이 받는 힘으로 갈라져 싸우는 것 같아서, 러더를 움직이는데 힘이 많이 실렸다. 바람과 파도 때문에 배는 좌우로 뒤뚱거렸고, 그때마다 몸과 러더의 움직임으로 균형을 잡아야 했는데 아주 작은 움직임에도 배가 크게 반응해서 움직임의 크기를 정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킬이라도 박아뒀으니 망정이지, 올리고 왔다면 전복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파도에 전복되면, 그 다음은 답도 안 나온다.


두 달 가까이 준비한 첫 시합이 끝났다. 아침부터 함께 대기하며, 김밥과 사발면을 함께 먹으며, 새 돛을 끼우고 항해를 준비하며, 서로의 상황을 살피고 배를 정리하면서 맴버들과 가까워졌다. 제주 뿐 아니라 전국에서 온 사람들이니까 언제 다시 볼지 기약이 없지만, 내년에는 각자 1인승 딩기요트를 타는 대신 함께 레이싱요트를 타고 대회에 참가해보자고 이야기했다. 언젠가는 이들과 같은 배를 타고 있겠다. 내 첫 요트시합이 끝났고, 내 첫 요트크루들이 생겼다.


시합코스 내 항적


시합 코스 결승점 통과


+ 나는 은메달.

+ 하나부터 열까지. 오늘도 예외없이 홀딱 젖은 우리 최봉록 코치님.  

+ 마지막 영상은 클럽 최혜원님 제공


#제주국제요트학교

#김녕해수욕장

#제57회제주도민체전

#요트경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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