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모비는 1988년에 태어났다. 쌍팔년도 용띠라고 불렀다. 제일 많이 듣는 질문은 88 서울 올림픽을 봤냐는 것이었으나, 봤을 리가 없다.
조모비는 조진성과 문나미의 첫째 딸이다.
조진성은 전남방직을 다니며 농성동 일대에 땅이 많은 부자 아버지를 두었다. 그 부자 아버지는 첫째 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같은 직장에서 만난 두 번째 부인을 들여 아들 둘과 딸 둘을 낳았는데 그중 조진성은 차남이다. 두 번째 부인이 지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시골에서 시부모를 모시던 조강지처를 광주로 불러들였고, 진성은 말하자면 새어머니 밑에서 오랜 세월 자랐다. 뭘 좀 아는 나이였던 누나와 형은 꽤나 속을 썩였다지만 진성은 당시 어렸기 때문에 엄마, 엄마 하며 지금의 할머니를 잘 따랐다고 한다.
문나미는 서울 쌀집에서 자란 넷째 딸로 새침하면서도 당당한 서울여자였다. 서울도 다를 것 없이 아들이 귀해 언니들 모두 남동생을 보기 위해 '사내 남'이 들어간 이름을 받았으나 딸, 딸, 딸, 나미, 그리고 나서야 아래로 남동생 둘이 태어났다. 나미만큼은 고집을 부려 기어코 개명에 성공했고 남동생들에게 끝까지 사랑을 빼앗기지 않고 막내딸로서 편애를 듬뿍 받으며 자랐다.
그들이 모비를 낳은 것은 24살 때로 아찔한 사고였는지, 우연이었는지, 진실한 사랑의 결실이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서울에서 만나 결혼을 한 뒤 독산동과 사당동에서 살았다.
조진성의 키는 180이 넘었고 문나미의 키는 150이 조금 넘었으니 결혼사진은 큰 고목나무에 매미가 매달린 것 같았지만 그들은 젊고 훤칠했다. 둘 다 각자의 집에서 한 꼬락서니 하는 막내들이었으므로 가정에서 조차 뜻을 굽히지 않아 자주 싸웠는데 모비가 7살일 때는 꽤나 큰 싸움을 하여 문나미는 친정으로 가버리고 조진성이 딸 둘을 데리고 광주행 기차를 탔다.
모비는 진성과 할머니집에 들어가 살았다. 할머니는 그때도 꽤나 허리가 굽은 노인이었으므로 애 둘은 절대 볼 수 없다고 하여 모비의 여동생은 고모네로 보냈다. 모비가 할머니집에 남은 이유는 동생보다 3살이 많아 어른 손이 덜 갈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때 모비는 문나미처럼 아주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미는 마루인형을 꾸미듯 매일매일 모비의 머리를 요란하게 묶었다. 디스코 머리, 양갈래 머리, 형형색색 고무줄, 왕방울 머리끈, 나비 집게… 그러나 광주에 오자마자 모비의 머리카락은 골칫거리가 되었다. 노모는 긴 머리를 감기는 것조차 힘들어서 당장 모비를 데리고 미용실부터 갔다.
긴 머리카락을 단발로 잘라준 것도 아니고 사내아이처럼 숏컷으로 자른 이유는 밤새 뒤척여 꼬인 모비의 머리를 다정하게 풀어주기는커녕 뻗친 단발머리에 물을 묻혀줄 애정과 관심조차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비는 자기 머리카락이 잘려나갔을 때 무언가도 함께 잘려나갔다고 느꼈다. 그리고 평생 자신을 따라다닐 어둑한 그림자가 생겼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약한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데다가 치매가 있는 할아버지는 무뚝뚝하고 엄청난 자린고비였지만 아들이면 껌뻑 죽어 차남인 조진성에게 요구받은 돈을 신문뭉치로 싸서 다음날이면 턱 하니 마루에 내어놓았다. 그 덕에 조진성은 광주에 내려오자마자 유통업 대리점 사장이 되었고 이후로도 이유 없이 차를 자주 바꾸었다. (같은 차종인데 색깔만 바뀌기도 했다. 코란도.)
조진성은 매일 늦게 들어왔다. 모비는 그가 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자지 않고 버텨 마침내 조진성과 나란히 엎드려 누운 시간을 좋아했다. 깜깜한 방에서 진성은 야광시계로 시간 보는 법을 가르쳤다. 구구단을 알기 전인데도 모비는 금세 깨우쳤다.
모비는 병원 가는 날을 좋아했다. 차와 살짝 부딪혀 오른발에 깁스를 했는데 그때는 낮에도 진성을 볼 수 있었다. 진성이 한 팔로 거뜬히 안아 동네 정형외과에 데려가 줄 때면 모비는 180의 높이에서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진성과 가장 가까이 있는 순간이었다.
조진성과 모비가 쓰던 방은 거실에서 들어오는 방 말고도 밖에서 들어올 수 있는 문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문으로 들어오는 이는 대게 젊은 여자들이었다. 짧은 치마와 스타킹, 짙은 향수. 모비가 커서 생각해 보니 아마 그들은 조진성의 대리점 경리였을 것이다. 그들이 집에 몰래 들어와 무엇을 한 것은 아니고 그저 잠깐 앉아있다가 할머니 몰래 다시 바깥문으로 나갔으며, 조진성이 바쁜 주말에는 그 언니들(한 번에 한 명씩이었으나 자주 바뀌었다)과 아동극을 보고 시내 유생촌에서 돈가스를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낮. 문나미가 진성이 없는 틈을 타 할머니집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