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꼴통 : 직장 상사
나이 차이가 월등히 많거나, 실력이 부하직원보다 뛰어나지 않은 이상 솔직히 부하직원을 꾸짖는 것은 어렵다.
게다가 요즘 부하직원들의 인내력은 예전 직장인들과는 사뭇 다르다.
야단맞으면 즉각 반응을 보인다.
가끔은 조금 무서울 수 있다.
꾸짖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꾸짖는 방법을 익히기 위해서는 실제로 부하직원을 꾸짖고 그 반응을 확인하면서 익히는 방법밖에 없다.
‘요즘 젊은이들을 꾸짖으면 안 돼.’라고 생각하는 상사가 있으나, 꾸짖는 것 자체가 틀린 것이 아니다.
꾸짖어야 할 때에는 확실하게 꾸짖어야 한다.
문제는 꾸짖는 상황과 방법이다.
꾸짖어선 안 될 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부하직원이 반론할 수 없을 만큼 궁지에 몰려 있을 때이다.
아무리 봐도 부하직원이 잘못을 해서 빠져나갈 길이 없거나, 변명의 여지가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 꾸짖어선 안 된다.
어떤 상사는 상대방이 빠져나갈 길이 없을수록 자신의 지위를 노려 강도를 높여 가며 꾸짖는다.
‘부하직원들 앞에 군림할 때다.’ 싶어 아주 강력하게 밀고 나간다.
상대방이 반론의 여지가 있을 경우에는 꾸짖는 쪽도 반격을 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피곤하다.
꾸짖을 때에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꾸짖는 방법을 모르는 상사는 오히려 반론을 받을 때에 꾸짖지 않는다.
자기가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부하직원이 따르고 싶어 하는 상사는 부하직원이 반론의 여지가 있는 경우에 꾸짖는다.
부하직원에게 반론의 여지가 없는 경우에는 더 이상 꾸짖지 말라.
이미 쓰러져 있는 인간에게 펀치를 날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히려 주위의 비난을 받는다.
본인도 실패를 마음속 깊이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럴 때는 오히려 격려를 해야 한다.
부하직원에게 도망갈 길을 만들어 주어라.
단, 부서원들이 많을 때 하지 말라.
그 부하직원이 더 비참해질 수 있다.
꾸짖는 것은 상대방을 굴복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것이다.
두 번 다시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꾸짖는 것이지, 결코 재기불능으로 만들어 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꾸짖는 것은 부하직원을 갱생시키기 위한 것이다.
인간을 갱생시키는 데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런 에너지는 아깝지 않다고 여기는 상사에게 부하직원은 따르기 마련이다.
한편, 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를 본다면, 부하직원은 상사에게 강한 반론을 펴지는 못한다.
펴고 싶어도 상하의 역학관계 때문에 결국 부하직원 본인에게 피해가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강한 반론을 할 수 없는 입장에 있는 인간에게 꾸짖을 때에는 그만큼의 배려가 필요하다.
사실 부하직원이 잘못하지 않은 경우에도 상사와 부하직원이라고 하는 관계상 반론을 할 수 없을 때도 많다.
상사는 이러한 경우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상사는 이래서 복잡하고 매일 스트레스를 받는 위치에 있다.
(Dall-E 이용, prompt: 복도에서 40대 여성이 20대 남성에게 야단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