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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모 Dec 12. 2022

당신을 성장시키는 한심한 나날들

프란시스 하 Frances Ha (2012)

그린에게,



안녕? 편지를 쓸 땐 항상 상대의 안부를 물으며 글을 시작해. 이상하지. 누가 규칙을 정한 것도 아닌데 다들 똑같은 인사말로 첫 줄을 채운다는 게 말이야. 나는 "안녕"을 전하는 내 마음이 매번 어정쩡하다고 느껴. 반가움이나 그리움 같은 감정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기계적으로 건네는 인사치레가 된 지 오래거든.


사실 우리는 인사를 나누거나 편지를 주고받는 게 무색한 사이지. 거의 매일 연락을 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만나니까. 이미 좁아질 거리가 없을 정도로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네 말대로 우린 올해 들어 더욱 친해졌어. 이렇게 친밀한 관계도 꾸준히 발전할 수 있음을 깨닫는 중이야.


함께 영화를 감상하는 시간만큼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영화제에서 널 처음 만나고부터 그건 아주 당연한 일상이 되었어. 나는 너와 함께 본 영화에 대해 얘기하고 서로가 좋아하는 영화를 추천해 주는, 비슷하지만 다른 모든 순간들이 소중해.



넌 <프란시스 하>를 끔찍이도 사랑하지. 인생영화를 꼽아보라는 질문에 너의 대답은 늘 정해져 있잖아. 나도 예전에 봤던 영화야. 고등학생 때 노아 바움벡 감독의 작품을 몇 편 봤거든. 그때는 틈만 나면 영화를 보곤 했어. 아마 영화가 나의 도피처였나 봐. 그래서 그 당시 감상한 영화 중에는 이해하기 일렀던 영화들도 많아. <프란시스 하>역시 이 카테고리에 들어간 작품이었어.


네가 <프란시스 하>의 내용이 우리랑 닮았다고 얘기할 때마다 '언젠가 다시 봐야지' 되뇌었어. 기억나는 거라곤 길거리를 뛰어다니며 춤추는 장면이 전부였으니까. 너의 편지를 받고서야 재생 버튼을 눌렀어. 내 기억보다 재밌더라. 네가 왜 프란시스와 소피를 보며 우리를 떠올렸는지 공감됐어. 성공한 미래에 관해 떠드는 두 사람은 우리와 쌍둥이 같았지.


현실에 발붙이지 못하고 여기저기 전전하는 프란시스가 한심하고 애처롭게 느껴지는 건 내 모습이 보여서 일거야. 예술가로서의 삶은 내 청소년기를 통틀어 꿈꾸고 동경해왔던 미래였거든. 되게 심각했지. 예술로 이름을 날리지 못하면 요절한 천재들을 따라가고자 했을 정도니... 중학교 무렵까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쭉 해왔어.


하지만 고등학생 때 점차 성인이 될 시점이 다가오자, '나 같은 애가 예술을 하겠다는 건 불효가 아닐까'하는 마음에 내내 괴로웠어. 아닌 척했지만, 나의 애매한 재능과 열정을 인지하고 있었거든. 결정을 내려야 했지. 프란시스가 안무가의 길을 걷기로 했듯이 말이야.


결국 프란시스는 성장하기를 택했어. 난 이걸 포기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이 돼. 확실한 것은 프란시스가 무용수에 대한 고집을 버려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는 거야. 애석하게도, 어떤 성장은 포기를 동반하나 봐. 내가 이 영화를 또 보는 날이 온다면 프란시스의 서투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어른이 되어 있기를 바라.


너도 알다시피 나는 원래의 꿈과 전혀 다른 분야를 공부했고, 이젠 그 분야와도 관련 없는 일을 시작하려고 해. 어쩌면 난 포기한 적조차 없을지 몰라. 당장의 관심사에 따라 흘러가며 살아왔을 뿐. 그래서 취미로 시작한 영화감상을 10년이 넘도록 지속하고 있는 내가 대단스러울 때도 있어. 영화제에서 활동하며 관객이 아닌 나의 자리가 있다는 것도 확인했지. 이 아늑한 변두리에 계속 머물고 싶어. 가능하다면 너와 함께.

 


추신 -


답장이 길었지? 오랜만에 프란시스를 만나길 잘한 거 같아. 생각이 많아지더라. <프란시스 하>를 보는 동안 <셔커스: 잃어버린 필름을 찾아서>라는 다큐멘터리가 문득 떠올랐어.


샌디 탄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인데, 1992년 싱가포르가 주된 배경이야. 샌디가 어린 시절 잃어버린 필름을 추적하는 내용이지. 친구들과 의기투합해서 찍은 영화 필름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거든. 어른이 된 샌디는 필름이 사라진 이유를 파헤치며 다시 되찾고자 노력해. 줄거리를 모르고 봐야 더 흥미로운 영화라서 여기까지만 알려줄게.


<프란시스 하>를 통째로 외울 듯 아끼는 네가, <셔커스>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해. 쓰다 보니 밤이 됐네. 내일도 좋은 하루 보내.



설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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