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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모 Dec 19. 2022

참을 수 없는 빈 공간 속에서

우리도 사랑일까 Take This Waltz (2011)

그린에게,



언젠가 너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 그림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아쉽다고 하자 너는 답했지. "꼭 배워야지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건 아니야. 생활 속에서의 창작도 예술이 될 수 있어." <셔커스>를 보고 너의 말을 곱씹게 되더라.


샌디가 필름을 되찾는 데 집착하는 반면, 내게 그림은 회피의 대상이었어. 화구통을 옷장 깊숙이 숨겨두고 오랫동안 그림에 손을 대지 않았지. 난 이젤 앞에 앉아 팔레트를 든 게 가장 이상적인 형태라고 여겼어. 그랬던 나는 지금 컴퓨터로 디자인 작업을 해. 그림이 너무 싫다가도 때때로 공책이나 태블릿에 낙서를 하게 돼. 사실은 그림 그리는 게 마냥 즐거웠던 날들이 그립거든.


샌디는 사랑했던 그 시절을 긍정하며 떠나보냈어. 세 친구는 지금도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영화를 하고 있지. 나도 그러고 싶어.



<우리도 사랑일까>를 다시 봤어. 영화는 첫 장면에서부터 결말을 알려주고 있어. 그리고 단지 러브 스토리가 아님을 얘기하며 출발해. 이건 채울 수 없는 마음을 가진 마고의 이야기라고.


마고는 비행기를 놓칠까 봐 불안함을 느끼는 것조차 두려워서, 경유해야 할 땐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야. 그녀는 매일같이 남편인 루와 장난을 치며 시간을 보내.


두 사람은 상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끔찍하게 표현하는 게임을 하곤 했어. 보통은 마고가 더 잔인한 문장을 만들어서 이겼지. 그런데 어느샌가 루를 따라잡을 수 없게 돼버려. 그는 '이제 내가 당신을 더 사랑하니까'라고 넌지시 말해. 하지만 결혼기념일 날, '당신에 대해 이미 알고 있으니 굳이 대화를 할 필요없다'며 조용히 밥만 먹는 루 역시 변한 건 마찬가지였어.


서로가 더 이상 궁금하지 않은 순간이 오면 그 사랑은 끝난 걸까? 아니면 익숙한 안정감을 지루함으로 착각하는 걸까? 모두가 겪어본 감정일 거야. 재밌었던 장난은 그저 루틴이 되고, 장난치는 연인이 점점 성가셔지는 시점이 다가와. 애정마저 무상해진다는 게 조금은 슬퍼.


마고와 루는 끊임없이 상대방에게 장난을 걸며 마음을 속삭여왔어. 다만 어긋난 타이밍에 자신의 사랑을 외쳐댔지. 그렇게 둘은 평행선 위를 달리지만 누구도 완전히 탈선하지 않아. 자주 다투고 때로는 깊고 오래된 사랑을 느끼면서 건너편을 바라볼 뿐이야.


마고는 대니얼과 만나 새로운 설렘을 좇아. 주변에선 말하지. 새로운 것도 언젠가 낡고, 낡은 것 또한 원래는 새것이었다고. 마고도 알았을 거야. 하지만 그때의 그녀는 이유 없이 울어도 왜 우는지 물어봐 줄 사람을 필요로 했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마고는 지난한 관계를 끊어내고 대니얼과의 왈츠를 시작해. 아름답고 뜨겁고 잔잔하게 이어지던 왈츠가, TV 소리에 묻혀 들리지도 않는 순간이 이들에게도 찾아와. 그래도 애써 얘기해. "30년 뒤에 만나지 않기를 잘했다."


대니얼과 탔었던 놀이기구를 혼자서 타는 마고. 번쩍이는 조명과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한참을 흔들리고 나면 공허만이 그녀를 기다려. 세상 모든 관계가 그럴지도 몰라. 열기가 식으면서 벌어지는 빈틈을 메꿀지, 그대로 두고 느슨히 살아갈지는 저마다의 선택에 달린 거야.



추신 -


결이 살짝 다른 영화지만 코고나다 감독의 <콜럼버스>를 보면 좋겠어. 이 영화는 삶의 빈틈을 가진 두 사람이 같은 관심사를 통해 교감하는 이야기야. 이들은 무엇으로 틈을 채울까. 혹은 빈 공간을 인정하고 나아갈까.


너의 감상을 기다릴게.



설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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