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세대에는 TV를 보면서 감정이입을 많이 했습니다. 드라마 속 악역의 얄미운 행동을 보면서 어르신들은 혀를 끌끌 차며 ‘저 나쁜 놈’이라며 한 마디씩 던지셨고, 악역을 맡았던 배우들은 드라마가 끝난 이후에도 길거리에서 시민들에게 궂은 말이나 흘겨보는 눈빛을 받았다고 합니다. 미디어 속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선한 주인공을 응원하고 악역을 비난했던 우리들의 모습은 콘텐츠 제작자가 의도한 관점과 캐릭터 설정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공 또한 외면당한 사례가 있었으니 오래전 ‘야인시대’라는 드라마가 생각이 납니다. 극중 주인공이던 김두한이 나이가 들어 안재모 씨에서 김영철 씨로 배우가 바뀌는 장면이 있었죠. 이때 그동안 익숙했던 청년 김두한과는 너무 다른 이미지에 시청률은 반 토막 나기도 했습니다. 비록 당시에는 대중들에게 외면받은 ‘중년 김두한’이었지만 십수 년이 지나 극 중에서의 ‘4딸라’ 캐릭터가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이슈가 되면서 디지털 세대로부터 큰 호응을 얻게 됩니다. 최근에는 영화 ‘타짜 3’ 개봉과 맞물려 타짜 1편에서 ‘곽철용’ 역을 맡았던 김응수 씨가 화제입니다. 네티즌은 다른 캐릭터에 가려졌던 곽철용의 숨겨진 따뜻함을 조명하면서 여러 스핀오프 콘텐츠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유행에 편승하면서도 왜 이제서야 지나간 캐릭터들이 주목받을까 궁금해합니다.
시대가 변했습니다. 디지털 시대의 콘텐츠 소비 방식과 수용 태도는 이전과는 다릅니다. 유튜브를 중심으로 형성된 ‘디지털 콘텐츠 시장’에는 다양한 수용자 시각과 관점이 공존합니다. 같은 영화도 리뷰어에 따라 해석이 다르며, 네티즌도 저마다의 생각과 견해를 댓글로 토해냅니다. 이제는 콘텐츠 제작자의 관점과 의도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대중들은 소통, 해석, 재생산의 과정을 거쳐 각자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콘텐츠를 수용하고 소비합니다. 김영철의 4딸라, 박찬호의 투 머치 토커, 김응수의 곽철용이라는 캐릭터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메인 스트림으로 강제 소환하는 디지털 대중문화의 힘은 흡사 ‘문화주권’을 행사하는 시민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더 이상 문화의 흐름을 주도하는 힘이 매체나 콘텐츠 공급자가 아닌 수용자인 대중들에게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디지털 콘텐츠 소비문화는 이미 수명이 다한 작품과 캐릭터도 숨을 불어넣어 살려냅니다. ‘4딸라’와 ‘곽철용’이 역주행하는 맥락은 좋은 작품에서 사랑받은 악역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영화 베테랑의 ‘조태오’나 신세계의 ‘정청’이 독보적인 캐릭터와 개성 있는 유행어로 화제였다면 지금은 ‘김두한의 꼿꼿함’, ‘곽철용의 인간미’와 같이 캐릭터의 새로운 성격을 발굴하고 재해석한 점입니다. 나아가 기존에는 캐릭터 특징을 모방하고 재현함으로써 오리지널에 가깝게 패러디하는 것이 콘텐츠 재생산의 축이었다면, 이제는 새로 발굴된 캐릭터 성격과 모티브를 일상 속 상황에서 끊임없이 확장, 파생시켜 갑니다. 시간 약속을 미루는 친구에게는 ‘4딸라’ 사진을, 신세를 한탄할 때 ‘곽철용’ 대사를 인용하는 식입니다.
최근에 손흥민의 슈퍼콘 광고, 동원참치, G마켓 등 많은 브랜드가 ‘후크송 광고’를 선보였습니다.
같은 멜로디가 반복되면서 중독성이 강한 후크송 광고는 이미 10년 전 가요계 원더걸스로 시작해 광고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고 대표적으로 김연아 선수의 씽씽송 에어컨 광고가 기억에 남습니다. 후크송 광고가 다시 대세가 된 이유는 앞서 살펴본 디지털 콘텐츠 소비문화와 연관이 높습니다. 현재 10대에서 30대에 이르는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는 새로운 콘텐츠를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따라 하고, 맘대로 바꿔 부르고, 패러디하며 각자만의 스타일대로 소비합니다. 한 때 iKON의 ‘사랑을 했다’라는 곡도 미취학 아동과 초등학생이 저마다의 가사로 재생산했듯이 기업들 역시 디지털 시대의 콘텐츠 소비 방식에 발맞춰 이전처럼 멋지고 아름답게 포장한 광고보다는 대중에게 명확히 인식되고 대중들로부터 재생산될 수 있는 콘텐츠를 목표로 광고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특히 약간의 유치함과 병맛코드가 담겨 있는 후크송 광고는 ‘노동요’와 ‘수능 금지곡’ 등으로 불리는 1시간 이상의 반복 영상으로 탄생하면서 디지털 콘텐츠의 ‘재생산 소비’ 흐름을 견인 중입니다.
앞으로도 디지털 시대에서 콘텐츠란 완제품 그대로 소비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대중에게 콘텐츠는 재료일 뿐, 각자 개성대로 재생산과 소비가 결합된 ‘콘텐츠 DIY 시대’이기 때문이죠. 브랜드에서 고민할 관점도 변했습니다. 기존에는 완결된 콘텐츠로서 대중에게 어떤 인식과 메시지를 전달할 것인지를 고민했다면 지금은 사람들에게 어떤 재료들을 던져줄 것이며 그로 인해 어떤 이야기와 여론이 조성될 수 있을지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을 대중의 몫으로 비워두어야 합니다.
1인 미디어라는 말은 참 오래전부터 많이 들었지만 지금에서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디지털 콘텐츠의 소비자만큼이나 많은 이들이 콘텐츠 재생산에 관여하면서 모두가 소비자이자 동시에 생산자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대중들은 기존에 콘텐츠에서 보여주던 이야기 외에도 그동안 조명 받지 못한 캐릭터와 이야기들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곽철용이 걱정했었던 마포대교는 멀쩡하지만 콘텐츠 공급자와 소비자의 경계는 무너지고 있는, 디지털 시대의 시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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