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리 아이르 섬의 일상은 그저 평화로웠다. 사람들끼리 얘기하는 소리도 잘 들을 수가 없었다. 관광객들로 붐비는 길리 트리왕안 섬과는 분위기가 확실히 달랐다. 섬의 규모도 훨씬 작아서 트라왕안에서는 관광객들을 실은 흔히 보이던 마차도 이곳에서는 볼 수 없었다. 마차가 지나갈 때마다 들리던 작은 방울 소리를 못 듣는 건 좀 아쉬웠지만 붉다 못해 보랏빛으로 물드는 노을만큼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아이르 섬으로 옮겨오고부터 낮에 한두 차례의 정전을 겪었다. 처음에는 숙소 주인에게 양수기 같은 기계를 돌리게 하기도 했지만 5일 차가 된 이제는 그런 수고스러운 부탁은 하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해야 할 일이 없으니 바닷물의 소금기를 닦는 일 정도는 미룰 수 있었다. 앞마당의 작은 해먹에 누워 머리카락과 발가락 사이의 모래를 말리는 시간이 오히려 즐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멀지 않은 곳에 코모도 섬이 있기 때문인지 아이르에서도 가끔 공룡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도마뱀을 볼 수 있었다. 멀리서 바닷가를 유유히 지나는 도마뱀들을 보고 있으면 쥐라기의 어느 해변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혼자 떨어져 생존을 고민하는 주인공의 마음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날도 멀리 보이는 도마뱀을 한 번씩 쳐다보며 백화 된 산호를 줍고 있었다.
“코모도 도마뱀이야!”
3주 만에 들어보는 내 나라의 언어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갔다. 그는 트라왕안에서 세 개의 섬을 돌며 스노클링을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아이르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도 어쩌면 나처럼 새로운 행성에 오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마뱀을 보는 그의 눈빛에서 내가 느꼈던 진정한 홀로 됨의 떨림 같은 것이 보였다. 그에게 아이르의 황홀한 노을을 보여주면 어떤 눈빛을 할까 궁금해졌다. 커피 맛집과 거북이를 본 스폿 등 말해줄 사람이 없어 아껴둔 정보를 공유하며 노을 이야기를 꺼냈다. 역시나 그는 큰 관심을 보이며 나를 따라나섰다.
우리가 막 도착했을 때 바닷가에 세워둔 하얀 그네 뒤로 점차 아이르만의 색으로 물드는 하늘이 보였다. 그도 나도 그저 붉은 기운을 덮치며 밀려드는 보랏빛의 거대한 파도 같은 장관을 바라봤다. 아이르의 노을을 보고 있으면 자꾸 마음속에 뭔가가 울컥울컥 차올랐다. 차올랐던 것들이 다시 마음 아래로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도 좋았지만 한 번쯤은 누군가와 이런 마음을 나누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와 함께 이 광경을 보았다는 게 기뻤다. 누구에게도 이야기해보지 않은 어떤 것들에 대해서 나눠볼 용기가 났다. 우리는 'CAFE JOE'의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해피 아워의 1+1 서비스로 받은 마가리타를 마시며 그가 막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즈음 갑자기 주위의 불빛들이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정전에 그는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목소리에선 이내 좀 더 웃음이 묻어났다. 우리는 마가리타의 시큼한 맛에 집중했고 그와 나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였다. 바닷속에서 본 거북들의 등껍질 색깔과 제대로 마르지 않아서 냄새가 나게 된 샌들, 작은 조개를 엮어서 만든 팔찌를 파는 아저씨, 마가리타에 들어 있는 올리브 맛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따뜻한 어둠 속에서 카페 앞 옥수수 리어카에 달린 조그만 등만이 옥수수향을 머금고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