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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DA Mar 06. 2024

파리의 여왕

; Madame Récamier



1789년 프랑스혁명 후, 피비린내 진동하던 잔인한 공포정치가 끝나고 다시 평화를 찾은 프랑스는 순수하지만 매혹적인 여인의 향기에 빠져들었다.



Julliete Récamier, François P. S. Gérard, Musée Carnavalet, 1802


그녀는 여신 같은 우아함이 넘치는 신고전주의 예술의 상징이자, 혁명 이후 프랑스 상류 사회를 지배한 파리 사교계의 명사로 이름을 떨친 ‘레카미에 부인: Madame Récamier’으로, ‘아름다운 줄리엣’으로 불린 그녀는 동시대 사람들이 바라는 완벽한 이상형이었다.






얇은 베일 아래 쉬고 있는 비너스



얇은 베일 아래 쉬고 있는 비너스로,
파리의 걸작으로 간주되는 성과이다.



그녀의 나이 23살에 그려진 이 초상화는 신고전주의의 수작으로 꼽힌다. 흠잡을 데 없는 그녀의 명성을 미학적으로 보여주는 하얀 드레스 차림으로 미소를 머금고 나른하게 소파에 기대어 앉은 맨발의 여인은, 고전주의가 만연하던 당대의 이상을 의인화한 모습이었다.


초상화를 의뢰받은 화가 '제라드: François Gérard' 처음엔 그녀를 누드로  있는 그림을 그릴 계획이었지만, 단순한 순백의 하이웨이스트 드레스에 캐시미어  다리에 걸치고 안락의자에 기대어 앉은 - 당시로서는 매우 아방가르드한 모습으로 묘사했다.

과감히 하얀 어깨와 팔의 맨 살을 드러낸 그녀의 얼굴은 수줍은 듯 홍조가 어린 소녀의 특징 또한 띠고 있어 초상화는 ‘순수함으로 가려진 우아한 에로티시즘의 걸작’으로도 평가받는다. 레카미에 부인에게 내재된 근본적인 수줍음은 그녀를 특별하게 만들어준 마력과도 같았다.


동시대 유명한 예술가들에게 가장 많이 묘사되고 조각된 여인 중의 한 명이었던 레카미에 부인은, 매혹적이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제라드의 초상화에 매우 만족했다. 부인은 자신이 바라던 이미지를 잘 구현해 낸 화가에게 편지를 보내 흡족한 마음을 전했다.



[…] 이 달콤하고 몽환적인 표현은
나를 닮은 것보다 더 나를 기쁘게 합니다.



폼페이와 신고전주의

자신이 보이고 픈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정성 들여 세심하게 관리했던 레카미에 부인은 신고전주의 스타일을 선택했다. 가볍고 단순한 흰색 모슬린 튜닉 드레스에 캐시미어 숄을 걸친 부인의 모습은 고대 그리스의 여신을 떠올리게 한다.

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신화적인 모습은 혁명의 공포에 떨던 사람들에게 필요한 심적 평화를 선사해 주었다. 혁명 후, 혼란스럽고 도처에 죽음이 산재한 시간을 보내던 사람들은 이상향으로 완벽하다고 생각하던 시대인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를 꿈꿨고, 때마침 역사적인 사건도 진행되고 있었다.


폼페이 유적의 발굴이 시작된 것이다.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묻힌 고대 로마 도시였던 폼페이는,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었고, 유럽인들은 고대 유적의 발견에 자극받아 고전주의로의 회귀사상에 심취했다. 그리스 건축 양식이 프랑스에서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고, 화려한 로코코를 벗어나 편안하고 단순한 생활방식에 대한 열망이 퍼졌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유행시킨 ‘슈미즈 드레스’ 또한 그러한 열망의 일환으로 탄생했고, 처음에는 사람들의 비판과 비난을 받았지만 결국 여인들의 일상복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 슈미즈 드레스는 혁명의 시기엔 소재나 실루엣이 더욱 단순해졌다. 사치스러운 왕정을 무너트린 혁명이었기에 긴축정책은 당연한 흐름이었다.


당시 고전의 미를 가장 세련되게 표현한 이는 레카미에 부인이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추구하는 스타일이 확고했고, 그 모습은 고전적이면서도 매우 스타일리시했다. 부인은 아무런 장식 없이 단순한 순백의 하이웨이스트 모슬린 드레스를 입고 종종 맨발로 다니며, 자신만의 특별한 아우라를 만들었다. 고대 석상을 닮은 짧은 머리스타일에, 다른 여성들과는 달리 화장도 하지 않은 레카미에 부인의 피부는 유달리 하얗게 빛났다.

당시 유행했던 ‘희생자 스타일’의 전형적인 차림새의 레카미에 부인을 동시대 사람들은 ‘메베이웨즈: Me’veilleuses’라 불렀다.



Me’veilleuses의 삼미신 ‘레카미에 부인’

혁명에 의해 계급의 모든 구분은 폐지되었고, 1793년 새로운 법은 ‘의복의 자유’를 선사했다. 사람들은 이제 마음대로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지만, 혁명 직후의 사람들은 무엇보다 정치적 신념에 의한 자신의 사상을 드러내기 위한 옷을 입었다.



다르시 루이, 메베이웨즈와 앵코야블, 파리, 1796-97


당시 최고의 멋쟁이들이었던 ‘메베이웨즈(여): Me’veilleuses‘와 ‘앵코야블(남): Inc'oyables‘들은 독특하고 기괴한 자신들만의 패션을 탄생시켰다. 특히 여성들의 패션리더였던 메베이웨즈는 고전 양식의 단순함을 극단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들은 단순히 멋을 부릴 목적으로 기이한 옷을 입는 것은 아니었다. 일종의 사회적 시위였다. 그들 중 다수는 혁명 중 단두대에 부모를 잃고 최근 제정된 법령으로 몰수되었던 재산을 상속받아 이제 막 부자가 된 - 군주제에 대한 향수를 가진 젊은 귀족들이었다. 이들의 극단적인 패션은 공포와 처형에서 홀로 살아남은 사회적 불만과 우울함이 한데 섞여 표출되는, 세상을 향한 트라우마의 향이 가득한 외침이었다.


본래 이들은 사향과 육두구가 섞여 귀족적인 맵고 짙은 향수를 뿌리고 다닌데서 유래된 ‘무스카딘: Muscadin’으로 불렸는데, 정기적으로 이들이 가장 좋아한 “C'est incroyable!: 세상에!”와 같은 감탄사와 과장된 표현을 남용하면서 다녀 ‘Incroyables‘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여인들도 ‘멋쟁이 여인’을 의미하는 ‘Merveilleuses‘*로 불렸다. 의미가 있었기에 단어 그대로 쓰지도 않았다. 가족을 앗아간 ‘Révolution: 혁명’을 없애 버리거나 혹은 강조하듯 첫 글자인 ‘R’을 생략하고 발음하지 않았는데, 이 두 단어에서도 ‘R’을 없애 부르며 ‘Inc'oyables‘와 ‘Me'veilleuses‘로 자신들을 정의했다.


레카미에 부인은 보아르네 부인 -훗날 조세핀 황후-, 탈리앙 부인과 더불어 총재시대 메베이웨즈의 삼미신: Les Trois Grâces - 그리스∙로마 신화 속 세명의 아름다운 여신- 으로 일컬어졌다. 이 ‘삼미신’은 당시 파리 사교계의 주요 인사들이었다.



윌리엄 해밀턴, 처형받기 위해 감옥을 떠나는 마리 앙투아네트, 프랑스혁명 박물관 소장품, 1794


메베이웨즈는 단두대로 가기 전 목이 드러났던 사형수들의 스타일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고, 그들끼리 ‘절망적인 드레스’라 명명한 마리 앙투아네트가 마지막 순간에 입었던 하얀 튜닉드레스를 입었다.

하얀 슈미즈 드레스는 혁명시절 감옥에 갇힌 여성들이 입었던 스타일의 드레스이기도 하다.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마지막 길에 하얀색 슈미즈 드레스를 입었기 때문에 파리의 패션리더 ‘메베이웨즈’들에게는 혁명으로 인한 희생자의 상징처럼 남았고, 당시 훌륭한 미학적 모델이 된 고대 스타일과 더해져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그들의 패션은 ‘à la victim: 희생자 룩’이라 불리며 퍼졌다.


현대에는 고전적이며 우아하기 그지없는 스타일로 평가받는 하이웨이스트 슈미즈 드레스는, 사실 당시엔 헐벗고 돌아다니는 젊은이들의 객기에 가까운 매우 무례하고 남사스러운 패션이었다. 메베이웨즈 무리는 리넨과 거즈로 만든 투명하고 속이 다 비치는 드레스를 입고 다니며 파리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제임스 길레이, 강풍 속의 은혜(풍자화), 시카고 미술 협회, 1810


드레스는 본래 다양한 색상과 직물로 만들어졌지만, 1798년경부터는 모슬린으로 만든 하얀색 하이웨이스트 드레스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스타일은 극단적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한 겨울에도 너무 얇아 ‘직물이라기보다 증기에 더 가까웠던’ 속이 다 비치는 얇은 튜닉 위에 모피 망토만 걸치던 여인들은 감기를 달고 살았고, 이는 ‘모슬린병’이라 불렸다.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했지만, 여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풍자화가들은 이러한 모습의 여인들을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려대기 바빴다.


이 얇은 모슬린 드레스는 나폴레옹이 제1 영사로 취임한 뒤 ‘투명한 드레스 패션은 음란하다’며 공개적으로 비난하면서 점차 투명한 수입 모슬린이 아닌 자국(리옹)에서 제조된 실크로 대체되었다. 이후 나폴레옹 치하 아래에서는 제국(Empire)의 스타일이 되어 ‘엠파이어 드레스’라 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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