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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묘한 Jul 11. 2022

파혼의 신호들

귀를 막을수록 더 크게 들릴 것이니.....


경상도 남자라서 아무래도 아버지와 아들 간의 대화는 없거나 무미건조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아버지가 나이 드신 후에는 대화를 종종 시도하시기는 하는데 이제는 내가 그렇게 반기지 않는다. 이번에 고향에 내려갔더니 아버지 지인이 하객으로 다녀온 결혼식 이야기를 꺼내셨다. 양가 부모님께 인사하는 타이밍에 신부가 인사를 하지 않고 버텼고, 화가 난 신랑의 부모는 그 자리에서 하객들에게 파혼을 선언했다는 내용이었다.


아무래도 아버지는 시부모의 눈으로 보기 마련이고, 반대로 난 신부의 입장이 보였다. 그 자리에 서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기에, 오죽했으면 그 인사도 못했을까. 물론 양쪽 이야기는 모두 들어봐야겠지만 아무 사연 없이 시부모에게 인사를 거부 할리는 없다. 적어도 그 용기는 칭찬해주고 싶다.


최근에 나도  이혼 전에 파혼을  생각은  했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여러 번의 파혼을 생각해보라는 신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생각으로 그 신호를 무시했는지, 결혼 후에는 언제 깨달았는지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혹시 지금 이 순간 파혼을 고민하는 분들이 있다면 작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사실 크고 작은 신호는 많았다. 결혼 준비 기간 동안 수없이 삐걱거렸다

비록 나는 냉담 중이긴 했지만 우리 집안 모두가 천주교임에도 대형 기독교 교회 결혼식을 강요받았고,

신혼집은 처가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잡을 뻔하다가 우리 부모님의 반대로 전 와이프의 회사에서 자차로 10분 거리로 잡았으며,

친분 있고 대중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싱어송라이터 친구에게 축가를 선물 받았으나 그 친구가 실수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직접 피아노 연주하는 대신 MR을 강요받았다. (이건 내가 강요받고 참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기에 끝까지 지켜냈고 지인들에게 내 결혼식은 축가만 기억에 남았다.)

예물반지 역시 돈만 어느 정도 처가에 드린 채 깜깜이로 진행되었고 이혼 후 내 반지는 18만원에 금은방에 넘겨졌다. 문자 그대로 소고기 한 끼로 그렇게 사라졌다.


일련의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넘어갔던 가장 큰 이유는

결혼 준비할 때는 다들 싸우고 삐걱댄다더라.

라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그냥 결혼식 당일까지만 내가 양보하고 잘 버티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실제로 그런 커플들이 대다수일 테고.


마지막 신호이자, 가장 강하고 확실했던 신호는 결혼식 당일 아침에 발생했다.

신랑의 지인이 웨딩카를 해주는 게 우리나라 결혼문화의 일부이고, 나 역시 친한 후배가 그 역할을 맡아주었다. 당일 아침부터 미용실과 결혼식장 이동을 도와주었고, 지루한 대기시간을 함께 보내주었다. 그 과정에서 그 후배는 나와 우리 가족, 예비 처가의 사람들을 가까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결혼식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그 친구는 한마디를 하고 자리에 앉기 위해 계단을 올라갔다. 멍하게 그 친구가 계단을 오르는 걸 쳐다보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형, 저라면 이 결혼 안 해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자존감이 높기로는 손에 꼽을 정도인 후배였던지라 그 말은 더 크게 다가왔다.

그렇게 한 대 맞고 결혼식이 입장하였고, 1년 남짓 지나서 소송을 시작하며 내 발로 신혼집을 떠났다.


이혼의 결심에 이르던 과정도 비슷했다.

처음에는 무엇인가 잘못됐다 느끼면서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내가 워커홀릭이긴 했으나 나와 같이 밤을 새우던 직장동료도 모두 처자식이 있었고, 다들 과중한 업무로 집에서는 못난 남편이자 아빠로 고개를 숙이고 사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들을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었고, 그 역시 다들 그렇게 못 보고 사는 줄 알았다. 결혼하면 실제로도 서로 자주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성격상 그렇게 모임이나 친구가 많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뭔가 이상하다, 잘못됐다 라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겨우 참석한 모임에서 한 친구 놈이 테이블 반대편의 나를 가리키며


다들 결혼해서 못 보고 바쁘게 살지만 그중에서도 점마가 젤 불쌍타.

라는 것이 아닌가. 내 상황을 남에게서 객관적으로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남의 말만 듣고 덜컥 이혼을 해서도 안되고 그럴 일도 없겠지만, 내 상황에 의문을 갖고 고심하던 시기에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모임을 시작으로 내 상황을 객관적으로, 혹은 더 많은 사람들의 눈으로 보려고 노력하게 되었고, 대체로 의견들은 수렴하기 시작했다. 파혼은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고 참고 산다쳐도 얼마나 참을지도 개개인의 차이가 있어서 "객관적"이라는 관점이 있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내가 꽤 먼 길을 잘못 와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도움이 된다.


그 후로 주변의 의견을 묻지 않아도 될 정도의 일들을 몇 번 더 겪고 이혼 소송을 시작하게 되었다.




파혼을 부추길 마음도, 말릴 마음도 없지만, 고민하는 분들께

신호를 애써 무시하지는 말라

고 말씀드리고 싶다. 신호가 여러 번 온다면 반드시 덮어두지 말고 한 번쯤은 심사숙고해보시기 바란다. 절대 신호를 놓칠 수도 없다. 놓칠수록 다음 신호는 더 크게 올 테니. 

본인이라면 이 결혼 안 한다고 한 후배의 일갈처럼.


덧붙이자면, 파혼과 이혼 이야기를 들어보면 적지 않은 분들이 본인의 선택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이 힘들었다고 한다. 결혼을 마음먹었든, 이미 결혼을 했든, 그 선택들은 결국 스스로가 내린 선택들이었고 파혼과 이혼은 그 선택들이 틀렸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그 선택을 두려워하고 어떻게든 눈에 보이는 문제들을 무마하거나 고쳐보려 애쓰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성격차나 작은 트러블은 서로 노력하면 해결될 수 있지만 폭력, 외도, 도박처럼 누가 봐도 아닌 상황에서 스스로의 선택이 잘못됐음을 인정하기 어려워서 버티려는 생각은 하지 않으셨으면 한다. 


잊지 마시길.

사람은 고쳐쓸 수 없고 우리에겐 그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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