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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Oct 03. 2018

떠나야 보이는 소중한 것들

남편의 출장

결혼


처음부터 기대라고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스물여덟 살에 만나던 동갑내기 남성과 결혼했다. 우린 연애하던 2년 반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만났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두 번 넘게 도는 동안 남자 친구는 약속 시간보다 항상 일찍 나와 책을 보고 있었고, 언제나 단정해서 좋았다. 길에 뿌리는 시간과 에너지가 아까워 결혼을 생각했다. '그래, 해 보고 아니면 말지 뭐.' 그런 마음으로 결혼했다.  


"나는 일을 계속할 거니까, 집안일은 같이 해야 해."

"응. 당연하지."

"내가 빨래와 밥 짓기를 담당할 테니까, 니가 설거지랑 청소를 담당해."

"응. 나도 청소가 더 좋아."

"그래, 그럼 우리는 결혼하면 그렇게 하자."


신혼여행 후 처음으로 우리 보금자리에서 저녁을 지어먹었다. 식탁을 정리해야 하는데 꿈쩍도 안 한다.

"니가 정리하고 설거지하기로 했잖아."

"어, 그랬지. 근데 어떻게 하는 건데?"

"밥 먹고 치우는 거 몰라?"

"어."

"한 번도 안 해 봤어?"

"어."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친절하게 하나하나 알려줬다.

"남은 반찬은 버리고, 반찬통에 넣어 뚜껑을 덮어 냉장고에 넣고, 밥그릇 국그릇은 물에 담가 두고, 설거지는 세제를 묻혀 닦은 다음 물로 헹궈......"

시간은 엄청 걸렸지만, 나는 그냥 지켜봤다. 그래도, 그 날 이후로 남편은 집안일을 같이 하겠다는 말을 잘 지켰다. 우린 직장에서 돌아오면 자기 할 일을 스캔해서 자동으로 움직였고, 우리의 스킬은 286에서 펜티엄을 거쳐 스마트폰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파리

결혼 7년 차. 하던 일도 자리를 잡고, 뭔가 편안해졌는데 남편이 미웠다. 뒤통수를 보면 한 대 날리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얄밉고 싫었다. 그즈음, 남편에게 프랑스 회사에서 오퍼가 왔다.  파리에서 인턴을 해야 한단다. 당연히 가야지. 일부러 항공권, 호텔 예약해서 가는 곳인데, 어떻게 되든 여행하는 셈 치고 가라고 말해줬다. 마음 한편으로는 '그래, 당신 지금 이렇게 가면 우린 안녕일 수도 있겠다.'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행히 떨어져 있으니 왜 미웠는지 조금씩 잊혔다. 나도 메종 오브제를 관람할 겸, 남편도 볼 겸 파리로 떠났다. 머무는 동안 오르세 미술관, 퐁피두, 루브르 박물관을 매일매일 가고, 와인을 한 병씩 마셔야지 하는 부푼 기대를 안고. 파리에서 일하고 있는 남편을 보니 조금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내가 못 하는 것을 하고 있으니까. 낯선 곳에서 적응하는 것은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지만, 그 과정을 겪으며 강해진다.


그런데,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뭔가 이상한 게 느껴졌다. 속이 울렁울렁. 파리 전체가 배처럼 움직이는 기분이다. 어... 임신이구나. 박물관을 코앞에 두고 한 번도 가지 못 한 채 하루 종일 방에 누워 입덧을 했다. 파리 특유의 세제 향이 나를 괴롭혀 밖에 나갈 수가 없었다. 아마도 파리를 생각하면 뱃멀미가 생각이 날 거야.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을 거야. 6주를 누워만 있다 돌아왔다.


편을 그곳에 둔 채로 돌아오는 길엔 눈물이 났다. 남편은 회사에서 돌아와 내가 없는 텅 빈 방으로 보니, 마음이 그렇게 안 좋더라고 네이트온이 와 있었다. 그래, 우린 헤어지지 말라는 운명인가 보다. 그 해, 임신한 나를 혼자 두고 출장이 참 많았었지. 입덧하는데 같이 먹어줄 사람이 없어 힘들었던 기억도 난다. 어쨌든 아들은 건강하게 찾아왔고, 11년이 지났다.


남편이 또 한 달 동안 출장을 떠났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아 현재에 맞게 최적화시켰다 싶으면 또 뭔가 변화의 파도가 몰려온다. 인생은 끊임없이 균형을 잡는 부표 같다. 어차피 원래 그런 거라면 그저 파도에 몸을 맡기고 유연하게 넘실거리고 싶다. 2007년 그때가 오버랩된다. 아들은 그 사이 부쩍 자라 내 짝꿍이 되었고, 남편은 '사랑해 여보~'를 남겼다. 어쩐지 우리 가족에게 시즌 3이 시작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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