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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Jan 28. 2017

빨간 체크무늬 가방

누구에게나 마음의 상처가 있다

우리 엄마는 지금도 유행에 아주 민감한 신식이시지만, 

1970년대~80년대 그 시절에도 그러셨다.

유행하던 아이템은 우리 집에도 다 있었다.

주황색 곤로, 카스텔라 프라이팬, 곰돌이 팥빙수 기계 등등.

https://www.instagram.com/p/qMFUHhCfos/

엄마는 카스텔라도 자주 구워 주셨고,

속옷과 양말까지 매번 삶아 새하얗게 입혀 주셨고,

불란서 레이스를 떠서 피아노 커버도 만드시는

재주 많은 신여성이셨다.

엄마가 만들어 준 트렌치코트. 잘 보관했으면 조카들하고도 나눠 입었을텐데 영 아쉽다. 엄마와 나와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많은 옷들이 아까워 죽겠다.

우리 엄마는 아이 넷을 키우시면서도

일본 책 보며 우리들 옷을 만들어 입히셨고,

엄마가 만들어 준 원피스를 입고 버스정류장에 서 있으면

"어머 얘, 그 옷은 어디꺼니?" 하고

옷을 뒤집어 보는 아주머니들이 종종 계셨다.

옷 만드는 엄마 옆에서 나는 원단 갖고 놀기도 했고,

단추 달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엄마가 자투리 천으로 빨간 체크무늬 가방을 만들었던 것도 그즈음이다.


그 체크무늬 가방은

오랜 투병 중인 둘째의 사진, 옷, 책 등등이 들어 있었는데,

그즈음엔 장롱 위에 올라가 있었다.

나는 저 가방이 내려오면 둘째도 이 세상에서 떠난 거라고,

나름의 지표로 삼고 있었다.

매일 그 가방을 쳐다보며, 동생과 나의 약속대로

내가 100점 맞으면 둘째도 병과 싸워 돌아올 거라 믿었다.

그래서 엄마가 없어도 열심히 공부했고,

매번 100점을 맞았다.

내겐 기도와 같았다.

동생의 긴 투병 동안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것 밖에 없었다.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살아 돌아오길 기도하며 천 마리의 학을 접었고,

학알도 천 개씩 접었다.

마지막 두 어 달은 엄마가 병실에도 못 오게 했다.

학기 초, 부회장이 된

기쁜 소식을 전하려는 핑계를 만들어 병원에 갔는데

입원실 문 앞에서 그냥 돌아오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 아침, 빨간 체크무늬 가방이 내려와 있었다.

내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

"엄마. 혹시 죽은 거 아니지?"

"아니야."

엄마는 아니라고 학교에 가라고 했다.

아빠와 통화하는 내용을 들었는데,

검은색 넥타이를 찾고 계셨다.

틀림없이 오늘 둘째는 죽었다.

엄마는 또 학교에 가라고 했고,

나는 이 상황을 믿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계속 100점을 맞았는데, 왜 죽었을까. 

이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

악몽이라면 좋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학교에 갔다.

학교에서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요즘 같으면 심리 치료나 놀이 치료라도 받았을 텐데,

그 시절엔 그런 것도 없이 그저 견뎌야 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눈물도 없고, 웃음도 없는

까칠한 아이가 되었다.

기억 속엔 소나기 오기 전 하늘색 같은 회색빛 나날들이다.

내가 울면 엄마가 너무 슬퍼할까 봐 걱정이 되었고,

동생이 죽었는데 웃을 수도 없었다.

책을 읽는 동안은 자유로웠고,

100점 맞으면 동생한테 덜 미안했다.


그렇게 세월은 지나갔고,

생의 친한 친구였던 아이가 대학생이 되어 나를 찾았다.

그 이름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갑자기 동생이 너무 보고 싶었다.

내 동생은 10살 그대로 더 자라지 않았는데,

동생 친구는 어른이 되었다.

너무 보고 싶은데 볼 수 없고,

너무 만져보고 싶은데 만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그 순간,

몇 시간을 엉엉 울었던 적도 있다.

나는 다 잊고 씩씩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동생과의 이별이 내게 큰 상처였다는 건

아이를 키우며 았다.

20년도 더 지난,

잘 견뎌낸 아문 상처라고 생각했던 동생과 헤어짐은 

아직도 빨간 피가 철철 흐르는 채로

가슴속 깊은 곳에 생생했던 것이다.

그때 잘 가라고 인사라도 나눴더라면 어땠을까.


다른 사람들나처럼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가 있다는 것도

아이를 키우며  알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인생은 항상 힘들기만 하지도,

항상 좋기만 하지도 않다.


아들이 자라면서 어린 나를 찬찬히 들여다보게 되었고,

마흔이 넘어서야 비로소 열두 살의 나에게

힘들었을 텐데 잘 견뎠다고 토닥여 주었다.

'심리학이 서른에게 말하다' 김혜남 박사님 말씀처럼

과거의 상처가 아물어야 현재에 살 수 있게 된다.


명절이면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다.

2017년 어른이 된 우리들은 이젠 약하지 않다.

마음에 있는 어린아이에게

그때 잘 해냈다고 스스로 꼭 안아주는,

몸과 마음과 생각이 건강해질

새해맞이 '설날'이 되면 좋겠다.


https://www.instagram.com/p/qdVlFMCf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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