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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Sep 06. 2017

캘리포니아의 아침

더리빙팩토리의 새 시리즈 비하인드 스토리

꽤 많은 나라들을 다녔음에도 미국은 한 번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왠지 햄버거 포장지의 빨강 노랑처럼 빠르고 가볍기만 할 듯했다. 처음으로 미국에 가게 된 건 다섯 살이 된 아들이 '맥퀸'을 보고 싶어 해서이다. 캘리포니아. 콧노래가 흥얼거려지는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미국을 만났다. 항상 파란 하늘에 초록 초록한 나무가 많은 그곳. 마당에서 오렌지와 레몬을 따 에이드를 바로 만들어 먹는 싱싱함이 있는 곳.  


낮에는 아이들과 관광을 하고, 밤에는 업무가 이어지는 시간들 속에서 한국과 비슷한 양의 업무를 처 내면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경험이 신기했다. 똑같은 일을 비슷한 시간을 투입해서 똑같이 하고 있는데, 마음이 평온해지는 느낌. 이게 뭘까. 아이들이 놀고 있는 그 시간 동안 나는 계단에 쪼그려 앉아 하염없이 하늘을 봤다. 낯설게 행복했다. 뽀얀 아가 얼굴을 볼 때처럼 시간이 잘 가고, 보고 있어도 또 보고 싶었다.


낯선 여행지에서 나만의 리추얼은 마켓과 미술관을 방문하는 것이다. 마켓에서 생생하게 꿈틀대는 날 것의 생명력을 보아야, 미술관에서는 다채로운 컬러로 표현되는 희로애락의 정서를 느껴야 그래야 마음이 꽉 찬다. 나는 마켓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역마살이 잔뜩 낀 장돌뱅이이자, 미술관을 꽉 채운 컬러들을 마음에 구겨 넣고 또 구겨 넣어야 안심이 되는 디자이너다.


올 5월 긴 연휴를 맞아 어렵게 갔던  LA 여행. 동생네와 유치원생부터 중학생까지 다양한 연령층을 소화하는 일정에서는 랜드마크를 찍고 오는 여행이 무난했다. 다녀왔으되 국물만 떠먹고 온 헛헛한 느낌. 그래도 그 와중에  LA와 캘리포니아는 내게 많은 영감을 주었고, 이번 여행을 통해 드디어 캘리포니아가 주는 이유 없는 편안함의 근원을 알아냈다. 바로 자연의 컬러! 햇빛에 노곤하게 지친 듯 한 톤 다운된 뉴트럴 한 색감이었다.  


비도 잘 오지 않는 사막 기후인 캘리포니아는 항상 파랗다. 5년 전에 비하면 대기오염이 조금 더 심해진 것 같지만, 그래도 항상 파란 하늘, 하얀 구름,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 풀향기, 낮은 건물들, 자연의 컬러들이 릴랙스 하게 늘. 어. 지. 는 편안함을 준다. 내 마음속에 들어와 인화된 몇 장면들이 내내 긴 여운을 주었고, 그 컬러들과 야외에서도 쓰고 싶은 마음을 담아 캘리포니아 시리즈가 나왔다.

영감을 받은 바로 그곳의 사진과 재료들, 10년 된 단추. 프렌치라벤더 밭, 야자수, 라벤더 컬러와 우유빛깔. 조각들이 모여 만드는 컨셉 보드.


샘플링한 컬러들과 모양들을 가지고 패널들에게 보였더니, 기존의 제품들과는 다른 느낌을 매우 반겨주었다. 제품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제일 보람 있을 때에는 우리 제품을 정말로 좋아해 주시고, 자주 사용해주시면서도 또 구입하시는 친구 같은 고객들을 만날 때이다. 나이와 성별, 사는 곳, 생김새를 모두 떠나 우리 제품과 브랜드의 감성으로 하나 되는 느낌. 아우 이뻐라. 너무 예뻐서 또 사게 된다니까. 하시는 말씀들.


카탈로그 촬영의 메인 이미지는 수평적인 구조를 상징하는 원형 테이블에 세팅하고 싶었다. 딱 이렇다 싶은 테이블이 없었다. 빌릴 수도 없고, 구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극적으로 촬영 2일 전, 빈티지 가구점에서 빛나는 아우라를 뽐내고 있는 프리츠 한센 6 스타 테이블을 찾았다. 올레! 가끔 딱 맞는 뭔가를 찾을 땐 영혼이 반짝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딱 맞는 소품들을 찾아 캘리포니아에서도 수많은 소품샵, 플리마켓을 뒤졌다.

이 수평적인 관계의 비주얼을 만들고 싶어 장장 몇 개월 찾아 헤맨 원형 테이블. 소품들은 모두 소장품. 의자는 가로수길 2층 카페 세컨드팩토리 시절부터 사용하던 10년 된 카르텔.

벽에 그림을 걸고 싶었는데, 도저히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찾을 수 없어 결국은 그렸다. 캘리포니아의 구름 냄새, 초록 풀향기를 담아 표현하고 싶었다. 옆에서 걱정의 눈길로 쳐다보았지만, 과정도 결과물도 나는 정말 좋았다. 걸어 놓고, 며칠을 지켜보아도 계속 기분이 좋은 이미지. 하나의 그림은 나조차도 똑같이 그릴 수 없으니 카피나 복제가 어려운 점도 마음에 들었다.

꽃을 꽂을 때에도, 붓으로 그려나갈 때에도 의외로 나는 거침이 없는 편.

제품을 스타일링하고, 촬영이 진행되고 조마조마. 카메라가 찍는 게 아니라, 감성이 통하는 사진가가 찍는 것이고, 그 감성을 이해해 주는 디자이너가 카탈로그를 디자인한다. 감성이 통하지 않으면 통나무 같은 사진과 찌라시 같은 비주얼이 나온다. 무형의 에너지가 통하는 순간. 그건 현장에서만 결과물을 알 수 있어 항상 조마조마하다. 아무리 프로들이라도 그 날의 컨디션에 따라 결과물에도 조금씩은 편차가 있으니까.

오히려 2번으로 생각했던 이미지가 더 마음에 들어 어떤 컷을 메인으로 쓸 지 고민 중.

오늘 사진 촬영된 원본을 받았다. 영감을 받고, 제품을 만들고, 비주얼로 일관되게 표현되는 시리즈를 보니, 예뻐서 기분이 좋다. 이렇다 저렇다 해도, 영혼이 들어간 예쁜 비주얼은 본능적으로 눈길을 끌게 하는 힘이 있다. 새 시리즈를 마켓에서 고객들께 보여드렸더니, 새 라인 중심으로 제품이 판매되었다. 아! 기분 좋은 바로 이 순간이다. 자금에 여유가 있을 때마다 겨우 한 번씩 신상품을 내 가며 끌어온 지난한 세월이 보상받는 느낌.


그러나 기뻐하는 것도 바람 같은 한 순간일 뿐. 14년 동안 브랜드를 끌고 온 경험은 샴페인은 저 멀리 밀어 놓고, 책상을 깨끗하게 치우고 새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나를 잡아당긴다. 그래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 밤새 꿈속에서도 일하면서도 지치지 않는 일은 바로 이 일이다. 우리 제품이 일상 속에서 기분 좋은 제품으로, 자주 사용하시면서도 제일 먼저 손에 잡히는 제품이기를, 부디 그렇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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